REVIEW
영화를 읽다
신화의 전복과 파괴
< The Genesis >
김승희|영화감독 / 2020-07-09
< The Genesis > 스틸컷
지금까지 신의 목소리는 거의 남성의 것이었다. 리벌브가 들어간, 낮고 또 낮은 음성. 남성의 낮은 음성으로 “빛이 있으라”라는 소리가 벌써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또 신은 이 세계와 인간을 창조한 창조주, 영적인 아버지로 대변되어 왔다. 그의 목소리에는 권위가 있고 영성이 있고 힘이 있다.
세계 곳곳의 다양한 창조 신화 중에 여성형의 신이 세계 창조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긴 있다. 그런데 그런 경우 대부분 ‘낳는’ 행위를 통해 세계가 창조되고 일종의 가문이 형성된다. 그리고 세계를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낳는’ 것으로 표현된다. 참 이상하다. 왜 여성형의 신은 영험하고 권위 있는 창조의 목소리를 갖지 못했을까? 임채린 감독은 2017년 작품 < The Genesis >에서 이 창조 신화의 스테레오타입을 전복시킨다.
그가 만든 창세기는 어둠 속에서 들리는 여성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그 목소리는 어둠 속에 오롯이 존재했던 태초의 신을 언급하는데, 그는 He가 아니라 She이다. 그리고 그 신이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어떻게 이 세상을 창조해 나갔는지 창조의 7일을 차분히 읊어낸다.
< The Genesis > 스틸컷
< The Genesis >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점은, 이 여성형의 신이 낳는 행위로 세상을 창조하고, 자녀를 낳아 가문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로 세상을 만들어나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영화 속에서 캐릭터의 각성이나 재탄생 등을 보여주고 싶을 때 메타포로서 여성의 자궁 이미지가 사용되는 것을 자주 봐왔다. 예를 들어 어떤 캐릭터가 이불 속에 웅크려있는 모습을 마치 자궁 속 태아처럼 보여주는 것 말이다. 임채린 감독은 이 작품에서 그러한 자궁 또는 내부에서 외부로 나오는 탄생의 공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 The Genesis >의 애니메이션은 사람의 몸 위, 피부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 몸은 여성의 몸이지만 자세히 보지 않는 한 여성의 특징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중립적인 시선으로 캡처된 어떤 이의 피부 위에 창세기가 펼쳐진다. 내부로 들어가는 자궁의 이미지가 아니라 피부 표면 위에 부유하는 창세기의 이미지들은, 여성형의 신이 자신의 신체를 해체하면서 자연을 만들어나갈 필요 없이, 즉 무엇인가를 낳는 행위를 통해 세상을 만들어나갈 필요 없이 권위 있는 단독자로서의 창조 행위를 부각시켜준다.
피부 위에 드리워진 애니메이션 드로잉은 마치 문신을 연상시킨다. 아직도 이 사회가 문신으로 가득 채운 여성의 몸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드로잉 애니메이션은 새 생명을 담고 잉태하는 그릇으로서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 사회의 기대나 시각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로도 읽힌다.
< The Genesis > 스틸컷
창조의 마지막 날 신은 자신과 같은 형태의 인간을 창조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신-인간, 하늘-땅이라는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수평적 관계를 보여준다. 여성형의 신이 만들어낸 세상은 분명 가부장제가 아닐 것이다. 우리가 대개 알고 있는 창조 신화는 가부장제를 바탕으로 한 권위 있는 아버지, 상속자로서의 아들 등의 모습을 담고 있다. 반면 < The Genesis >의 세계 안에서 신과 인간은 수평적인 관계를 갖고 있으며 성에 대해서도 중립적인 시선을 보여준다.
임채린 감독은 < The Genesis >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들에서도 신화적인 이미지 요소들과 성(姓)에 대한 담론을 작품 속으로 계속 다뤄왔다. < The Genesis > 이후에 만든 < Flora >라는 작품에서는 꽃을 메타포로 사용하여 성기에 대한 담론을 풀어낸다. 콘셉트만 들으면 조지아 오키프의 페인팅을 떠올릴지 모르겠지만, 임채린 감독은 여기서 좀 더 나아가 여성과 남성의 성기를 중립적인 시선에서 풀어낸다. 2020년 슬램댄스 영화제 애니메이션 단편 경쟁 부문에 오른 그의 최신작 < Mate >에서는 신화적인 이미지 요소들을 사용해 성과 젠더에 대한 얘기를 좀 더 시적으로 풀어내는 데 집중했다.
< The Genesis > 스틸컷
임채린 감독은 현재 젠더 이슈와 성(姓) 이미지에 대한 담론을 풀어내는 실험 애니메이션 작가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한 채 활동하고 있다. 앞에 소개했던 우진 감독과 같이 특정 주제에 대해 꾸준히 작업 활동을 하며 커리어를 발전시켜오고 있다. 그러기가 쉽지 않기에 우진 감독과 임채린 감독, 두 사람이 2020년 슬램댄스 영화제 단편 애니메이션 경쟁부문에 올랐다는 사실이 정말 반가웠다. 그래서 그런 그들을 있게 한 첫 작품을 꼭 소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감독님께 “잘하고 계신다. 멀리서 응원하고 있다”는 메시지가 담긴 편지를 이렇게나마 띄워본다. 보다 많은 아시아 여성의 목소리가 이 업계에 울려 퍼지길 바라며 응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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