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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읽다

그녀의 고민은 계속해서 변화할 것이다

<잘 나가는 그녀에게 왜 애인이 없을까>

장영선|영화감독 / 2020-06-11


<잘 나가는 그녀에게 왜 애인이 없을까>
수 크레이머|2006|코미디, 멜로/로맨스|미국|96분|15세이상관람가

<잘 나가는 그녀에게 왜 애인이 없을까> 스틸컷

영화는 하트 무늬가 가득한 원피스를 입은 그레이(헤더 그레이엄)가 수트를 입은 한 남자와 스윙 댄스를 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반들반들한 마룻바닥 위에서 경쾌한 재즈에 맞춰 춤을 추는 한 쌍의 남녀는 아름다워 보이고, 그레이는 완벽하게 사랑스럽다. 다정한 커플처럼 그와 함께 춤을 추던 남자가 그의 친오빠라는 사실은 쉽게 밝혀진다. 그의 친오빠 역시 싱글이며, 두 사람의 관계는 주변 사람들에게 커플이라는 오해를 산다. 이것이 그레이가 가진 유일한 문제다. 그레이는 뉴욕에 살고, 광고 회사에 다니고, 스윙 댄스를 잘 추며 고전 영화를 좋아하는데다 매사 자신의 취향이 확실하지만 싱글이기 때문에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이 이 영화의 설정이다). 이는 외과 의사인 그의 친오빠 샘(톰 카바나) 또한 마찬가지다.

그레이는 샘에게 여자친구를 만들어주기로 결심하고 그의 이상형에 가까운 여성인 찰리(브리짓 모나한)를 운명처럼 찾아내 샘에게 소개해준다. 문제는 샘 못지않게 그레이 또한 찰리와 운명적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샘에게 소개해줄 수 있을 만큼 찰리와 손쉽게 친해진 것은 그레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레이와 샘은 함께 커플 스윙 댄스를 출 만큼, 자신들을 커플로 오인하는 이들에 대한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친하고 죽이 잘 맞는 남매다. 비현실적인 일이지만 어쨌든 그렇다. 찰리와 샘이 잘 맞는다면, 자연스럽게 찰리는 그레이와도 잘 맞을 수밖에 없다. 세 사람은 삼각관계에 빠지게 될 운명인 것이다.

<잘 나가는 그녀에게 왜 애인이 없을까> 스틸컷

영화는 그 삼각관계에 한층 강수를 두는 방법을 택해, 샘이 곧바로 찰리에게 청혼하게 만든다. 결혼식은 돌아오는 주말로 정해지고 세 사람은 함께 라스베이거스로 떠난다. 그레이는 왠지 이 결혼을 반대하고 싶지만 찰리가 너무나도 똑똑하고, 아름답고, 재미있고, 정말 끝내주기 때문에 반대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레이와 찰리는 결혼식 전날, 브라이드 나잇이라는 명목으로 단둘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라스베이거스 호텔 스위트룸의 더블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은 키스한다. 안타깝게도 찰리는 취해있었었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두 사람의 키스가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진위를 의심하게 되어버린다. 그레이는 이 키스 덕분에 자신의 세계가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그러나 찰리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 키스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잘 나가는 그녀에게 왜 애인이 없을까> 스틸컷

찰리 역의 브리짓 모나한은 이 영화에서 가장 미스테리한 존재다. 나는 사전 정보 없이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고 해도 그레이가 퀴어였다는 사실을 반전처럼 받아들이고 깜짝 놀라는 관객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까지 찰리가 그레이와의 키스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는 너무나도 놀라버리고 말았다. 찰리가 끝까지 그레이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나에게는 더 심각한 반전이었다. 

그레이를 대하는 찰리의 행동엔 의심스러운 구석이 한둘이 아니다. 브리짓 모나한 특유의, 앞에 있는 사람을 똑바로 마주 보면서도 어딘지 먼 곳을 보는 듯한 몽환적인 눈빛까지 더해지니 도저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찰리는 한국 사람도 아닌데 그레이에게 너무 다정하다. 한국 여성들끼리는 아무런 의미 없이 거리에서 손도 잡고 팔짱도 끼고 뽀뽀도 하지만 저기는 한국이 아니고 미국이지 않은가! 미국 관객들은 찰리의 행동을 아무런 의심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단 말인가? 아무리 취했기로서니 누군가와 그렇게 진하게 키스하고 영원히 기억하지 못하다니. 정말 이렇게 샘과 결혼해도 되는 것인가, 라는 걱정마저 들었다. 아마도 상업영화로서 가벼운 전개를 위해 찰리를 그레이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캐릭터로 활용한 것이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레이의 마음을 찰리가 알게 됐다면 어땠을까 궁금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잘 나가는 그녀에게 왜 애인이 없을까> 스틸컷

영화가 중반을 지나기 전에 우리는 영화의 제목에 대한 답을 찾는다. 잘 나가는 그녀에게 애인이 없는 이유는 그가 본인의 정체성을 모르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레이는 퀴어이고, 이제 영화는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난 이후의 행보를 따라간다. 그레이가 친오빠의 약혼자, 즉 예비 시누이를 사랑하게 된다는 다소 파격적인 과정을 떠들썩하게 겪고 난 이후에야 본인이 퀴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는 설정에 비해 그 이후의 행보는 무난하고도 평화로운 편이다. 그는 조금은 전형적인 방식으로, 즉 여러 남자들과 데이트를 해봄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려 노력해보지만 당연히 그 모든 과정은 아주 손쉽게 실패로 돌아간다.

오히려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은 우연히 만나게 된 택시기사 고디(앨런 커밍)이다. 고디는 그레이를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 그레이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고백한다. 그는 그레이에게 키스를 시도해보지만 그레이의 마음이 자신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녀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나는 여기서도 약간의 문화적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 ‘2008년의 뉴욕은 택시기사가 갑자기 여성 승객에게 사랑 고백을 해도 아무런 거부감이 없는 도시란 말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그레이와 고디가 진정한 친구가 된다는 것이 이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영화적인 부분이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잘 나가는 그녀에게 왜 애인이 없을까> 스틸컷

그레이의 커밍아웃은 성공적이다. 그의 커밍아웃에 과도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무려 친오빠 샘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반응이다. 그의 직장 동료는 친구의 커밍아웃을 대하는 사람들이 보통 저지를 수 있는 작은 실수들(예를 들자면 나를 좋아한 적이 있는지를 묻는 것)을 저지르긴 하지만 아무런 편견 없이 그를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레이는 외로워한다. 그는 앞으로 절대로 파트너 손을 잡고 거리를 걸어갈 수 없고, 한때 꿈꿔왔던 결혼식을 절대로 올리지 못할 것이며, 아이를 갖지 못하고, 언젠가 자신이 죽을 때 자신의 연인은 남편만큼의 배려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지금, 그레이는 아마도 동성 파트너이기에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적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힘쓰고 있을 것이다. 좋은 친구들을 더 많이 만났을 것이고, 그 당시에 걱정했던 것들을 더 이상은 걱정하지 않거나 나름의 해결책을 찾았을 것이다. 그의 고민은 계속해서 변화할 것이다. 언제나는 아니겠으나 때때로는 언젠가 이 모든 고민과 걱정이 사라질 날이 올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기를 간절히 바라며.

<잘 나가는 그녀에게 왜 애인이 없을까> 스틸컷

‘Gray Matters’라는 원제를 ‘잘 나가는 그녀에게 왜 애인이 없을까’로 번역하고 영화의 메인 포스터를 영화의 전개와는 관련 없는 스틸컷들로 만들어놨지만,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그레이의 상사 줄리아(레이첼 쉘리)가 힌트라고 생각한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줄리아 역을 연기한 레이첼 쉘리는 레즈비언 드라마 ‘엘워드’에서 활약한 바 있다. 그레이가 용기 내 방문한 레즈비언 바에서 줄리아를 만났을 때 어찌나 반갑던지! 헤더 그레이엄은 물론이고 레이첼 쉘리, 브리짓 모나한까지. 퀴어 영화에 지체 없이 출연하여 필모그래피를 채우는 여성 배우들을 보는 것은 언제나 기쁘고 반가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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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돌아왔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정하게 바삭바삭> 등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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