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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읽다

나를 사랑하는 영화

<워터 릴리스>

장영선|영화감독 / 2020-04-09


<워터 릴리스>
셀린 시아마|2007|드라마|프랑스|85분

<워터 릴리스> 

<워터 릴리스>(셀린 시아마, 2007)는 여성들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어린 여성들이 수영장에서 웅성거리며 수중발레 발표회를 준비하고 있다. 화려한 수영복을 입고 머리를 바짝 빗어 넘긴 채 반짝이는 화장을 한 여성들은 물 밖으로 보이는 동작들을 위해 물 속에서는 쉼 없이 다리를 젓는다. 이것은 마치 여성들이 사회에서 ‘여자답게’ 보이기 위해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해야 하는 수만 가지의 것들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인 마리(폴린 아콰르)와 안느(루이제 블랑쉐르), 플로리안(아델 에넬)은 모두 수중 발레를 하는 여성들이다.

마리는 수중발레 공연을 하는 플로리안을 보고 그에게 완전히 매료된다. 마리와 친구 사이인 안느는 다른 사람들보다 뚱뚱한 자신의 체격이 부끄러워 모두가 돌아간 후에 옷을 갈아입다 갑자기 들어온 남학생 프랑수아(워렌 자킨)에게 나체를 보이고 만다. 그러고 나서 마리와 안느는 플로리안과 프랑수아가 있는 파티에 함께 간다. 마리는 플로리안에게 어제 공연에서 아름다웠다고 말하고, 앞으로도 계속 지켜보고 싶다고 한다. 고백과 다름없는 말을 들은 플로리안은 키스를 연상시키는 미묘한 행동으로 마리에게 잊히지 않을 순간을 남긴다. 안느는 젖어버린 겨드랑이를 감추는 것을 신경 쓰며 프랑수아를 바라본다.  안느에겐 일말의 관심도 없는 프랑수아는 플로리안과 키스한다. 안느는 절망에 빠져 울음을 터뜨린다.

<워터 릴리스> 스틸컷. 왼쪽부터 안느, 마리, 플로리안.

영화는 공감을 매개로 관객을 태우고 가는 열차와도 같다. 한 번 공감한 사람은 절대로 그 열차에서 함부로 뛰어내리지 못한다. 도입부에서 이미 공감을 넘어서 마치 내가 겪은 일처럼 괴로워진 나는 인상을 쓰고 한숨을 쉬면서도 이 열차에 끝까지 매달려 있기로 마음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나와 다른 존재를 욕망하고 그 존재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하겠다는 그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적어도 나는 아니다.

그러나 도입부를 지나면 영화는 다른 영화들과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흐른다. 마리가 플로리안의 주변을 끝없이 맴돌고 플로리안이 강렬한 매력을 발산하는 것은 기존의 영화들과 비슷한 흐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플로리안이 수중발레가 끝난 후 허기를 채우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바나나를 먹는 장면을 시작으로 그가 어떤 식으로 대상화되는지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한 여학생이 플로리안처럼 바나나를 먹는 것(으깨 먹지 않고 껍질을 한 풀 한 풀 벗겨내고 먹는 것)은 많은 남자애들과 섹스를 해봤다는 것이라 말하고, 다른 여학생들은 그 얘기를 들으며 수군댄다. 수중발레부의 남자 매니저는 긴장을 풀어준다는 이유로 수영복 차림의 플로리안에게 마사지를 해주겠다며 추근대고, 이를 본 다른 여학생은 플로리안이 창녀라고 말한다. 플로리안은 이 모든 상황 앞에서 그저 태연할 뿐이지만 마리만은 그런 그를 언제나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

이제껏 소위 ‘뮤즈’가 등장하는 영화들을 수도 없이 봐온 결과, 영화 도입부에서 나는 일찌감치 플로리안을 뮤즈라고 결론 내렸다. 흔히 그렇듯 뮤즈는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속을 알 수 없고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나눠주는 존재니까 플로리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플로리안은 영화 속에서 어느 정도는 그런 특성을 지닌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기존의 영화들 속 ‘뮤즈’는 그렇게 다가와 끝내 자신의 마음을 설명하지 않은 채 주인공(대부분 남자인)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떠난다. 그런 영화를 볼 때면 나는 대체 누구에게 공감을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나 또한 그 뮤즈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영화에서 묘사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워터 릴리스> 스틸컷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에게 공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뮤즈를 판단하고, 뮤즈의 마음을 이해할 노력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감할 대상을 찾지 못한 나는 그 열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과 결말을 보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흐지부지하게 목적지에 도착하고 시무룩한 마음으로 다른 열차를 찾아서 떠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플로리안은 달랐다. 플로리안은 자신을 좋아하는 마리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자신이 불특정 다수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었던 때의 불쾌함-을 털어놓는다. 플로리안은 그런 경험이 없는 마리에게 “너는 운이 좋다”며 “정말 행운아”라고 말한다. 플로리안은 뮤즈의 경험에 대해 토로하고, 그 순간 그는 ‘뮤즈’에서 벗어나 한 명의 인간이 된다. 기존 영화의 뮤즈들 역시 어쩌면 모두 플로리안처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정확한 인과도 배려도 없는 무조건적인 관심과 그로 인해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드라마틱한 서사가 사실은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며, 귀찮고 끔찍했을 뿐이라고. 그리고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며 몇 번이나 그와 비슷한 일을 마주한다. 불특정 다수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불쾌하게 대상화되며 그로 인한 피해를 겪는다. 그것은 뮤즈뿐만 아니라 그 어떤 애틋한 개념으로 포장한다 해도 결코 환상적인 일도, 행복한 일도 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플로리안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워터 릴리스> 스틸컷

이는 우리가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플로리안 또한 자신을 좋아하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인 마리에게만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하고 이해받는다. 연대와 사랑은 하나의 마음이라고 늘 생각해왔다. 플로리안이 마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만 마리와 플로리안 사이의 갈등은 서로를 향한 감정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마리는 플로리안이 버린 쓰레기봉투를 몰래 들고 와서 자신의 서랍 속에 보관한다. 쓰레기를 파헤쳐 플로리안이 베어 먹다 버린 사과를 먹는 마리를 보며 우리는 본능적으로 마리의 사랑은 결국 보답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쓰레기와 뒤섞였던 사과 조각을 뱉지 못하고 끝끝내 삼키는 것은 지독한 짝사랑에서만 가능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마리는 자신의 앞에서만 진실된 모습을 보이는 플로리안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을 영원히 모를 것이며, 플로리안은 마리를 사랑하지만 마리가 원하는 방식의 사랑을 되돌려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이 이들의 비극이다. 그래도 서로를 이해하는 비극은 비극 중에선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밖에.

<워터 릴리스> 스틸컷

한편 안느는 프랑수아에게 나름의 방식으로 돌진한다. 그 어색하고 서툴고 불편한 노력 또한 너무나도 공감이 돼서 보다가 미치는 줄 알았다. 결국 안느는 프랑수아와 섹스하고 첫키스도 한다. 안느는 프랑수아와 육체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사이가 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스스로 그에게 침을 뱉고 돌아선다. 그 순간이 통쾌하다고 해서 안느의 슬픔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참고로 프랑수아는 이 영화 전체에서 유일하게 공감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간의 사회적 학습으로 인해 이해는 가지만 공감은 어렵다.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단순히 역할 자체가 그렇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말했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영화를 사랑하며 인생을 보냈다”고. 그 말에 공감한다. 영화의 세계에서 나는 공감하지 못하는 인물들을 공감하려 애쓰며 열차와 열차의 이음새에 서서 배회했다. 모든 인물들의 마음을 진정으로 알 수 있는 영화를 이제야 만났으니, 나는 셀린 시아마 감독이 만든 모든 영화의 열차에서 영원히 내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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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돌아왔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정하게 바삭바삭> 등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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