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이전과 다른 모녀 서사

<방문>

문아영 / 2020-03-26


<방문>   ▶ GO 퍼플레이
명소희|2018|다큐멘터리|한국|81분

<방문> 스틸컷

목표에 대한 열망과 낙심이 분주하게 교차하는 노량진에서 ‘나’는 입시와 취업 모두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이런 때에 원가족이 사는 춘천은 언제나 방문이 허락된 곳처럼 보이지만, 엄마의 얼굴을 마주하는 건 어느 정도 심호흡이 필요한 일이다. ‘나’의 춘천 도착과 함께 화면에는 소양강의 녹색 물결과 <방문>이라는 텍스트가 한데 흔들리는 모습이 비쳐진다. 영화는 ‘나’라는 줄에 꿰어진 ‘물비린내’가 가득한 ‘춘천’ 그리고 ‘엄마’라는 세 가지 기호를 따라 한 편의 모녀 서사를 천착해나간다.

<방문> 스틸컷

유명희라는 사람

요컨대 ‘나’의 엄마 명희는 30년간 이어온 옷 장사를 접고 닭갈비 식당에 열심이다. 그런 그가 약속이 있는 듯 입술 선을 그려 색을 채워 넣고는 춘천역으로 향한다. 그런데 명희가 찾는 건 안면 있는 사람이 아닌 이곳 춘천이 새로운 사람, 여행객들이다. 말을 붙이거나 전단지를 돌리는 보통의 호객 행위 대신 명희는 지시봉을 꺼내 들고 관광 명소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예비 손님을 모은다. 오가는 데 필요한 시간과 요금을 꿰뚫고 있으며, 손님을 태우고 이동하는 와중에도 준비된 마이크로 누군가의 자식 풍문을 읊고 노래를 부르는 등 카메라는 직업인으로서의 명희를 담담히 잡아낸다.

명희는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움직이는(일하는) 사람으로 먼저 소개된다. 이는 명희의 정체성 중 가장 큰 부분을 이루는 게 무엇인지 반영한 영화의 선택으로 보인다. 또한 ‘나’가 명희와의 사이를 딸-엄마 외에 촬영자-등장인물로 새롭게 관계 맺으려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명희의 노동을 신성화하거나 낭만화하는 말을 얹지 않고 오직 ‘나’의 감정과 기억을 돌이키거나 등장인물과의 관계를 의미화하는 데 사용되는 내레이션이 이를 뒷받침한다.

<방문> 스틸컷

대물림되는 상처

명희가 태어났을 때, ‘나’의 할머니 필순은 나팔관 한쪽과 남편을 잃었다. 기어코 아들을 낳아야겠다며 집을 나간 남편의 염원은 필순에게 갓난아기에 대한 원망으로 묻어 나왔다. 명희가 그런 필순을 새엄마로 오인했듯이 ‘나’에게도 할머니는 오빠만을 예뻐한 사람으로 남아있다. 이렇듯 두 사람이 딸이라는 이유로 상처받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나’의 관점에서 명희는 ‘상처 준 사람’으로 다시 구별된다. “나에게는 보여준 적 없는 표정”이 자주 오빠를 향하는 것을 봤다는 ‘나’의 기억처럼 영상에는 혼자 찍힌 ‘나’와 달리 함께 웃고 있는 엄마와 오빠의 예전 사진이 연달아 제시된다.

모녀 서사를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여성 유대/연대의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뭇 해석과 달리 영화는 엄마와 딸 사이의 차이와 갈등에 주목한다.1) “엄마를 보면서 외할머니를 떠올”렸던 ‘나’에게 명희와 필순은 여성 혹은 유대라는 하나의 집합에 곧바로 묶이지 않는 존재다.

<방문> 스틸컷

엄마와 내가 보는 세상은 다르다

명희의 바람 속에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 번듯한 직장을 갖고 적당한 나이에 결혼하는 ‘여자’였다. 이러한 상(像)들은 기대 속에서나 하나의 레퍼토리를 이뤘고 실은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딱딱한 틀에 불과했다. 학교에서 어려움을 겪은 ‘나’가 이를 명희에게 털어놓지만, 노력으로 이겨낼 것을 요구하는 그의 말에 가로막히게 된다.

이후 ‘노력하면 달라지는 세상’은 ‘나’에게 화두가 되지만, 수년이 지나 ‘나’가 영화를 통해 말하는 건 엄마가 아닌 자신이 본 ‘다른 세상’이다. 이어지는 고백 뒤로 영상에는 빨간색 락카로 칠한 ‘철거’ ‘붕괴’ 등의 글자와 “현대화 결사반대한다”라는 문장이 붉은 천에 적혀 줄줄이 매달려있는 수산시장의 모습이 등장한다. 영화는 보는 이에게 ‘노량진 수산시장 현대화 사업’ 사건을 상기 시켜 개인의 성실함, 능력만으로 행해지지 않는 자본과 정치 경제의 모습을 들춰낸다.

한편, 명희는 관광 명소를 읊던 강의용 마이크로 야시장에서 노래를 부르며 옷을 팔아본다. 그러나 손으로 가볍게 들어 올릴 수 있는 스피커의 소리는 다른 소리에 쉽게 묻히고, 파격 할인을 알리는 현수막이 무색하게 카메라에 잡히는 명희는 줄곧 혼자다. 스스로도 물 건너갔다고 표현하는 축제에서 별다른 소득 없이 돌아가는 명희의 현실은 서울에서 노력만으로 되지 않음을 깨달은 나와 노량진 수산시장의 모습과도 어딘가 겹쳐진다.

<방문> 스틸컷

상처라고 말하기

과거에 성추행을 당한 ‘나’는 종종 꿈에서 그때 잡지 못한 범인을 본다. 생각하거나 마음속에 담아 놓을 필요도 없다는 명희의 말과는 달리 그것은 꿈과 현실에서 이따금 재현을 반복한다. 그러던 ‘나’는 어느 날 엄마와의 통화에서 지워지고 묵과됐던 범죄의 진상을 알게 된다. 이때 생기는 기억의 공백에 ‘나’가 춘천을 줄곧 떠나고 싶어 했던, 물비린내 나는 장소라 설명했던 걸 이어 붙여볼 수 있는데, 이는 비디오 가게 이모가 집을 나가고 오랫동안 다방을 했던 이모가 가게에서 뛰어내린 뒤에도 “동네는 언제나 조용했다”던 춘천의 모습이 ‘나’가 겪은 일에서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영상에서 눈밭을 걷던 ‘나’는 통화 소리가 끝나자 카메라가 닿지 않는 화면 구석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찢어지는 듯한 날것의 고함 소리가 세 번 울린다. 이렇게 영화는 딸이 자라서 엄마에게 이어받은 세상을 깨고, 상처를 내지르게 됐음을 보여준다.

<방문> 스틸컷

미움을 미안해하지 않기

시간이 지나 죽은 필순의 생일이 돌아오자 가족들은 한자리에 모인다. 죽은 이를 화장하기 전, 미안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는 명희는 영상에서 처음으로 ‘나’를 거치지 않고 필순에 대한 감정을 설명한다. “그 말밖에 할 말이 없더라고. 왜 그 말을 했냐면. 엄마한테 미움을 가졌던 게 다 있는데 그 미움을 엄마한테 말하고 싶었는데 말 못했어. (중략) 엄마한테 화가 나는데 그때의 마음은 엄마한테 미안하더라고. 왜인가 하면 내가 엄마한테 미움을 가졌다는 그 자체가 미안한 거야.”

그간의 모녀 서사라면, 반사적으로 엄마에게 감정 동화한 딸이 그와 거리 두기에 실패하는 게 정상인 것처럼 그렸을 테지만2) <방문>은 도리어 자신이 엄마와 할머니를 닮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나’의 모습을 이어 붙인다. 그리고는 “다시 이 원망과 미움은 엄마와 나와 할머니의 몫으로 남겨져 버렸”음을 인정한다.

앞서 극 중에는 아이를 가진 ‘나’가 어떤 안도감을 느꼈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들이란 말에 나는 안도했다. 질긴 끈이 끊어진 거 같았다.” 더는 딸에게 아이를 낳는 건 이전 세대인 엄마와 할머니의 자리에 접속하는 일이 아니다. 영화를 찍으며 ‘나’는 명희와 필순의 서사를 추적함과 동시에 그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재해석해왔다. <방문>은 여자를 구속했던 것에 할머니-엄마-딸 이라는 모녀관계 또한 연루돼있음을 밝히며, 모녀 서사를 해석하는 새로운 독법을 내놓는다.3)

─────────

1) 전기화, 「부풀어 오르는 모녀서사」, 『창작과비평』 2019년 가을호

2) 탱알, 「우리 ‘탈가정’할 수 있을까」, 『다 된 만화에 페미니즘 끼얹기』, 산디, 2019

3) 전기화, 2019

페이스북 공유 트위터 블로그 공유 URL 공유

PURZOOMER

찍는페미 소속, 서울여성독립영화제 집행위원, 여성인권영화제 프로그래머, 다큐멘터리 <멋진 하루> 공동연출

[email protected]


관련 영화 보기


REVIEW

퍼플레이 서비스 이용약관
read error
개인정보 수집/이용 약관
read error

Hello, Staff.

 Newsletter

광고 및 제휴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