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순번 안에 ‘나의 차례’는 없다

<내 차례>

문아영 / 2020-03-05


<내 차례>   ▶ GO 퍼플레이
김나경|2017|드라마|한국|15분

<내 차례> 스틸컷

임신순번제에 관한 영화. <내 차례>(김나경, 2017)가 어떤 내용인지 묻는다면 대다수는 이와 같이 대답할 거다. 간단하면서 효과적인 설명이다. 선배 간호사가 신임 간호사를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발생하는 괴롭힘, ‘태움’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뒤 간호사 내의 임신순번제는 마치 대중에게 인지된 문제로 여겨졌다.

그러나 ‘태움’을 간호 인력이 부족한 병원의 문제가 아닌, 특정 집단에서 발생된 문화라는 문제로 바라볼 때 임신순번제는 여성의 직장 내 권리와 연결되지 못한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에서 병원이 임신과 출산을 인력 관리 방안으로 다뤄왔음을 문제시한 것이 2000년대부터다. 그렇다면 현재 대중은 임신순번제를 괴롭힘, 모성, 재생산 중 어떤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는가. 이에 따라 <내 차례>를 ‘임신순번제에 관한 영화’라 설명하는 것은 각기 다른 결과를 낳는다. 누군가는 여성의 재생산권에 관한 고민 없이 영화를 ‘모성 보호’의 관점으로 읽어낼 수도 있는 거다.

<내 차례> 스틸컷

극 중 현정(주가영)은 순번 체계에서 벗어난 임신을 한다. 차례를 맞은 미경(김해나)에게 사실을 알리는 이야기의 시작점부터 현정은 어디서도 편히 고개를 들지 못한다. 행동 변화가 크지 않던 그는 병원과 집 사이 공간 이동을 겪으면서 다른 움직임을 보인다.

“네가 주부야? 집안 살림만 하는 여자면 그렇게 해도 되지.” 이때껏 간호사와 주부 모두로 기능했던 현정은 임신을 기점으로 공간에 따라 자신을 철저히 분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병원 인력과 남편, 각 장소의 인물은 현정에게 다른 공간에서의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한다. 오히려 현정이 병원과 집 중 한 곳에 뿌리내리길 원함으로써 균열의 속도를 높인다.

이 틈을 비집고 나온 그의 몸부림은 보다 ‘안전한’ 임신중절 방법인, 병원에서의 시술을 거부한다. 대신 냉장고 속을 헤집어 찾아낸 소주를 들이켜려 하고, 차도에서 거침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는 방식으로 발현된다. 나아가 심한 체력 소모가 동반되는 포지션 체인지(환자들의 자세를 고쳐주는 것)를 홀로 하겠다는 현정의 행동은 지켜보던 미경 또한 큰 폭으로 뒤흔든다. 

<내 차례> 스틸컷

아직 알 수 없는 시험관 아기 시술 결과와 이번 차례가 넘어가면 안 된다는 이중 압박은 미경을 더욱 불안감과 죄책감 사이로 집어넣는다. 언제 울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영화는 두 사람이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곡소리는 오직 환자들을 통해서만 제시된다.

영화에서는 제목을 비롯해 순번, 새치기, 양보 등 순서에 관한 대사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임신이라는 상태가 개인이 차례를 지켜 얻어낸 ‘권리’로 여겨질 때, 소음은 문제의 근원지가 아닌 같은 위치에 한정돼 발생한다. 그리고 신체·정신 건강을 악화시키는 비체계적인 인사 이동, 3교대 시스템을 자동화하는 권력은 책임과 통제의 수고를 덜게 된다.

<내 차례> 스틸컷

“바퀴가 망가지면 자전거가 제대로 못 굴러가는 거야.” “바퀴가 아니라 자전거 전체가 고장 난 거면요.” 자전거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 위에 올라탄 이가 알지 못할 확률은 희박하다. 문제는 언제든 바퀴를 갈아 끼울 수 있는 권력의 태도와 그 실행에 있다. 이 같은 압력에 튕겨나지 않기 위해 임신순번은 간호사 내부에서 발화를 거듭하면서 차례이자 ‘양도될 수 있는 권리’로 간주된다.

이러한 흐름에서 영화는 병동 내 유일한 임산부 간호사가 간호 인력 내에서 열외로 취급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너 때문에 나까지 더 눈치 보이잖아.” 제 순번에 임신했음에도 그는 간호사가 아닌 ‘임산부’로 여겨지며 현정의 소식에 덩달아 긴장감을 느낀다. <내 차례>는 각자의 임신 여부와 순번 모두 다른 세 명의 여성을 한 장소에 위치시킴으로써 누구도 ‘나의 차례’란 이름의 권리를 가질 수 없는 현실을 전한다.

현정의 계획에도 임신은 없던 일이었다. 어쩌면 그는 건강과 생활, 목표 등을 고려해 스스로 중절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끝에 시술을 받고 병동으로 돌아가는 현정의 모습은 도입부에서 그가 병원에 출근하던 장면과 동일한 프레임으로 제시된다. 시간대만 교체됐을 뿐 옷과 가방마저 그대로다. 카메라는 미경이 떠난 자리를 정시하는 현정의 얼굴을 정면에서 담는다. 몸부림마저 몸의 바깥을 넘길 수 없었던 그는 마치 뿌리내림이 아닌 그 뿌리를 잘라버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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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는페미 소속, 서울여성독립영화제 집행위원, 여성인권영화제 프로그래머, 다큐멘터리 <멋진 하루> 공동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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