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여성의 눈으로 보는 뱀파이어의 고독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홍재희|영화감독 / 2020-02-20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애나 릴리 아미푸르 | 2014 | 멜로/로맨스, 스릴러, 공포 | 미국 | 101분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스틸컷

내게는 좋아하는 소녀가 둘 있다. 한 명은 스웨덴 작가 스티그 라르손 원작 영화인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The Girl With The Dragon Tattoo, 데이빗 핀처, 2011)의 주인공 ‘리스베트 살란데르’.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애나 릴리 아미푸르 감독의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2014)의 주인공인 외로운 뱀파이어 소녀다.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삶을 유지하는 흡혈귀 뱀파이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학과 미술뿐만 아니라 특히 영화에서 수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한 캐릭터다. 뱀파이어의 대명사로 자리 잡은 드라큘라 백작 같은 경우는 영화나 드라마뿐 아니라 최근에는 뮤지컬까지 영역을 넓히며 제작됐다.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의 독일 표현주의의 걸작 <노스페라투>(1979),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의 <죽음의 키스>(1987), 리즈 시절 톰 크루즈와 브래드 피트를 볼 수 있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94),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뱀파이어 액션 컬트인 <황혼에서 새벽까지>(2000), 뱀파이어의 21세기적 해석에 판타지와 로맨스를 버무려 전 세계적으로 흥행한 <트와일라잇>(2009) 시리즈, 짐 자무시 감독의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2013), 넷플릭스에서 2020년 1월 방영한 영국 드라마 <드라큘라>까지.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만 꼽아봐도 이 정도니 영화계의 뱀파이어 사랑은 끝이 없다. 정통 호러물부터 판타지, 액션, 로맨스, 코미디, 컬트까지 뱀파이어라는 캐릭터를 가지고 온갖 장르를 버무린 작품들이 잊을 만하면 또 나오곤 한다.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스틸컷

그리고 여기 2015년 국내 개봉해서 소수의 마니아층을 열광시켰지만 크게 대중의 관심을 받지는 못했던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A Girl Walks Home Alone at Night)>가 있다. 영화가 발표된 2014년 당시 선댄스 영화제와 도빌, 밴쿠버, 런던, 스톡홀롬 등 각종 영화제를 휩쓸고 고담 어워즈,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즈, 인디와이어에서 ‘올해의 영화TOP10’에 선정되기도 했던 저력의 뱀파이어 영화다. 이란계 미국인 여성 감독인 애나 릴리 아미푸르가 연출한 이 영화는 외로운 소녀를 주인공 뱀파이어로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스웨덴 영화 <렛미인>(토마스 알프레드슨, 2008)과 어딘가 닮아있다. 

하지만 ‘죽음과 고독의 냄새가 풍겨나는 곳 ‘Bad City’. 한 뱀파이어 소녀가 밤마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고요한 길거리를 누비지만 도시의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어느 날, 소녀는 우연히 만난 소년에게서 슬픔을 느끼는데… 외로운 뱀파이어 소녀와 고독한 인간 소년의 핏빛 로맨스가 시작된다’는 영화 줄거리만 보고 <렛미인>과 같이 눈처럼 새하얀 아름다운 동화를 기대하면 안 된다. 무표정하고 건조한 하드보일드 서부극, 애잔하고 쓸쓸한 흑백 무언극 같다고 할까.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스틸컷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는 아주 특이한 뱀파이어 영화다. 이 영화가 기존 뱀파이어 영화와 다른 차별점은 바로 하이브리드, 즉 혼종성에 있다. 스파게티 웨스턴과 필름 누아르, 두 장르의 장르 혼합이 절묘하다.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세르지오 레오네와 데이빗 린치가 로큰롤 베이비를 낳았는데, <노스페라투>가 와서 베이비 시팅을 한 것 같은 영화다.” 

알다시피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장르로 불리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독특한 서부 영화는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전형적인 미국 서부극의 백인 남성 영웅의 성공 신화를 해체했다.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는 바로 이 스파게티 웨스턴과 고전적인 필름 누아르에 호러 장르를 마치 칵테일처럼 섞어 놓는다. 거기다 그래픽 노블에 이란 스타일의 뉴웨이브까지. 배경음악마저도 디스토피아적 컬트 감성이 물씬 풍긴다. 한마디로 익숙한 이미지인데도 낯설고 새롭다.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스틸컷

영민한 감독은 여러 장르를 뒤섞는 데 망설임이 전혀 없다. 구태여 기존의 형식을 고집하지 않는다. 옛것을 가져와 자신만의 시선으로 해체하고 버무려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 낸다. 거침없고 자유롭다. 백인 기독교 중심의 주류 미국 사회에서 ‘이란계 이민자 여성’이라는 소수자의 정체성, 다문화적인 성장 배경이 이처럼 새롭고 독특한 호러 영화를 만드는데 풍성한 자양분이 되지 않았을까. 과거처럼 백인-남성-이성애자-중산층-프로테스탄트의 시선으로 만든 기존의 영화는 진부하고 구태의연하다. 21세기적인 새로운 시선과 다양성은 바로 여성과 성소수자 그리고 이민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이 바라보는 시선과 세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 영화가 잘 증명한다.

영화의 각본과 연출, 음악을 맡은 애나 릴리 아미푸르 감독은 12살 때부터 호러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만큼 호러 장르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을 것이다. 감독이 데뷔작으로 장르 혼합 뱀파이어 영화를 선택한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호러 장르는 남성만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다. 장르에 대한 사랑에 성별의 구분이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21세기 대한민국 도시에서는 과연 어떤 뱀파이어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어릴 적부터 호러 영화를 보고 자란 세대에서 호러를 통해 상상력을 펼치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담을 매체로 생각하는 여성 감독이 한국에서 더 많이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포스터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가 특별한 지점은 차도르를 쓴 뱀파이어 소녀가 이란이 아닌, 미국 서부에 어딘가 있을 법한 ‘유령 도시’를 돌아다닌다는 데 있다. 이 도시는 필름 누아르에서 보듯 어둡고 잔인한 무법의 ‘배드 시티’이며 ‘배트맨’의 고담 시티를 연상시키는 악에 물든 도시다. 미국 도시이지만 묘하게도 이 도시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영어가 아니라 페르시아어다. 흑백 아나모픽 렌즈에 담아 롱숏으로 보여주는 도시의 전경은 말 그대로 음침하고 음울하다. 낡고 지저분한 집과 공장에서 내다 버린 폐기물과 쓰레기가 어우러진 황량한 풍경은 더없이 쓸쓸하고 외롭다. 강렬한 흑백 화면은 마치 70년대 영화를 보듯 낯선 느낌을 준다. 게다가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타락한 이들뿐이다. 마약과 술에 절어 있거나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뿐 모두가 희망 없이 출구 없는 삶을 유지하고 있다. 살아 있되 진실로 살아 있는 사람이 없다.

남자 주인공 아라쉬(아라쉬 마란디)는 마약중독자 아버지 후세인(마샬 마네쉬)을 대신해 힘겹게 생계를 꾸려나간다. 아들의 처지는 아랑곳 하지 않는 후세인은 대놓고 마약을 한다. 중독자 아버지의 약값을 대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삶에 환멸을 느끼는 아라쉬. 아라쉬에게 남은 희망이 있다면 오직 이 도시를 뜨는 것이다. 거리의 창녀 아티(모잔 마르노) 역시 도시를 벗어날 돈을 모으기 위해 매춘을 한다. 하지만 마약에 중독된 그는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만도 힘에 부친다. 그리고 절망과 우울만이 감도는 도시의 밤길을 걸으며 말없이 그들을 지켜보는 한 소녀(세일라 밴드)가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뱀파이어 소녀는 괴물이나 악귀가 아니다. 무시무시한 존재이기는커녕 길거리를 방황하며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고독한 소녀다. 소녀는 그저 어둠 속에 서 있거나 밤길을 혼자 배회한다. 감독은 차도르를 쓰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다니는 이 소녀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하고 사는지 가족이 있는지조차 일절 설명하지 않는다.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스틸컷

기존의 뱀파이어 영화에서 여성은 언제나 뱀파이어 남성에게 물려 흡혈귀가 되거나 뱀파이어 남성을 사랑하게 돼 그의 옆에 머무르는 보조적 존재였다. 그러나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에서 뱀파이어로 등장하는 소녀는 마치 악행을 심판하듯 죄를 지은 남성들을 물어 죽인다. 마약 거래로 돈을 갈취하고 창녀 아티에게 마약을 주겠다며 섹스를 강요하는 마약상 사에드(도미닉 레인스)와 도박과 마약에 중독된 채 매춘에 빠진 후세인이 바로 그 대상이다. 소녀는 마약상과 마약중독자인 남성, 즉 악덕을 저지르는 남성들을 응징하지만 반대로 마약에 중독된 창녀 아티는 죽이지 않는다. 소녀는 아티를 조용히 따라다닐 뿐이다. 아티 곁을 맴도는 소녀는 아티를 위협하거나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악하고 폭력적인 남성들로부터 그를 지켜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티의 부도덕은 그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악의 굴레에 빠진 아티를 이해한다는 듯이.

“나는 당신의 눈에서 슬픔을 봤어요.” 소녀는 아티의 슬픔과 고통에 공감한다. 더 이상 자신이 뭘 원했는지도 기억나지 않고, 원한다는 게 뭔지도 모르는 삶이 되어버린 자의 슬픔을. 하지만 자신을 이해한다는 뱀파이어 소녀에게 아티는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부자 혹은 멍청이들이나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거라고 자조한다. 

하지만 아티는 몸을 파는 길거리 생활을 하면서도 열심히 돈을 모으고 있었다. 그랬다. 소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돈으로 절망의 구렁텅이에 놓인 자신의 삶을 바꾸고 싶었던 아티의 마음을. 출구 없는 삶, 겨우 숨만 붙어 있는 하루살이의 삶을 버티고 있던 아티에게도 욕망과 희망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음을 소녀는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스틸컷

그러나 소녀는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슬픔이나 고독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는 없다. 소녀는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 자신을 좋아하는 아라쉬에게도 설명할 수 없다. 소녀에게 귀걸이를 선물하는 아라쉬를 위해 제 귀를 뚫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소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의사 표현일 뿐. 슬픔에 잠긴 소녀는 아라쉬에게 자신은 나쁜 짓을 했다고, 나쁜 애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소녀를 사랑하게 된 아라쉬는 이렇게 대답한다. ‘너도 내가 한 짓을 모르긴 마찬가지야.’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아마도 아라쉬는 자신의 약쟁이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 소녀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라쉬는 용기를 내 소녀에게 한 발짝 다가선다. 뱀파이어 소녀와 아라쉬는 고양이와 함께 도시를 떠난다. 애초에 가족이 존재하지 않는 소녀와 이제 가족 없이 혼자가 된 아라쉬. 뱀파이어 소녀가 과연 인간 소년과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 서로를 마주 보는 두 사람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이들이 어떤 미래를 향해 나아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칠흑처럼 어두운 악의 도시를 벗어나 그저 도로를 달리고 달릴 뿐.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스틸컷

뱀파이어는 생명을 상징하는 붉은 피를 마셔야만 긴긴 어둠 속에서 빛처럼 살아갈 수 있는 존재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그 사이를 영원히 맴돌며 산 자와 죽은 자로 공존하는 존재. 뱀파이어에게 성별이 존재한다는 것은 모순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뱀파이어에게 고독은 천형이자 숙명이며 행운 같은 선물인 것.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문득 그런 이야기가 쓰고 싶어졌다. 미세먼지 가득한 서울을 배경으로 한, 빌딩 숲 사이로 사라지는 슬픈 뱀파이어 이야기가 반짝 떠올랐다.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며 한 권의 책이라 한다. 어두운 도시, 밤길을 가로지르며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소녀, 차도르를 쓴 얼굴, 슬픔에 잠긴 눈동자를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줄거리가 아니라 이미지를 따라가는 영화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일단 한 번 보면 그 이미지를 결코 잊을 수 없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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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이메일> <암사자(들)> 등 연출, 『그건 혐오예요』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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