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그때 그 ‘언니’들은 무얼 하고 있을까

<왕자가 된 소녀들>

장윤주|영화감독 / 2020-02-13


<왕자가 된 소녀들>
김혜정|2011|다큐멘터리|한국|79분

<왕자가 된 소녀들>

지난 주말 엘캠프에 다녀왔다.¹ 2014년에 시작된 엘캠프는 세대와 지역을 넘어선 사교와 네트워크의 장이자, 개개인의 회복과 휴식 그리고 안전함과 평화를 충분히 느끼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매년 개최되는 레즈비언 캠프다.

이번 해에는 2박 3일간 가평에서 쉬고 함께 밥을 해 먹고 산책하고 운동하고 영화 보고 밤새 이야기하며 늦가을의 시간을 보냈다. 저녁에 레즈비언 영화를 보고 난 뒤 이어진 대화 시간에 ‘할머니 레즈비언의 삶을 만든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들의 삶과 역사를, 또 훗날 우리가 될 ‘할머니’ 레즈비언의 모습을 스크린으로 더 많이 보고 싶다는 열망의 표현이었다.

나이든 여성, 특히 레즈비언의 역사는 대중매체로 찾아보기 힘들다. <왕자가 된 소녀들>(김혜정, 2011)은 여성들만으로 이뤄진 공연예술, 여성이 남성의 역할과 여성의 역할을 모두 해내는 창작음악극, 1950년대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여성국극’에 대한 이야기로, 레즈비언적 요소를 전방위로 깔고 있다기보다는 그 행간을 읽어 내려갈 수 있을 만한 인터뷰, 사진 자료, 공연자료들이 커다란 힌트가 된다.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여성 간의 동료애와 팬과 배우 간의 끈끈한-‘오빠부대’는 댈 것도 아니었다는-관계는 여성 간의 우정과 사랑으로 읽힐 수 있는 여지를 듬뿍 담고 있다.

<왕자가 된 소녀들>

<왕자가 된 소녀들>은 지금은 노인이 됐지만 여전히 짧은 머리, 남자 목소리를 잘 낼 수 있다고 자랑스러워하는 여성국극 배우 조금앵 씨가 분장하는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주름이 패인 눈가. 자연스럽고 당당한 태도. 연기 생활만 60년. 그는 자신보다 햄릿의 칼싸움을 잘하는 배우는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들의 위풍당당하고 화려했던 때는 흑백사진으로 남아있다. 남자 역할의 배우와 여자 역할의 배우가 분장을 하고 의상을 갖춰 입고 찍은 사진들은 공연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을 담아낸 사진만큼이나 놀랍다. 바뀐 역할놀이, 부치-팸, 드래그로 읽힐 수 있는 요소가 전국적으로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었다던 1950년대의 풍경이 그대로 녹아 있다. 그들은 인터뷰로, 일상의 모습으로 지금은 지나간 그 시절을 돌아본다.

<왕자가 된 소녀들> 

영화에는 여성 배우와 여성 관객의 가상의 결혼식 사진도 등장한다. 여성 배우는 남복 정장 차림이고 관객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다. 하객들도 함께 서 있다. 이 하나의 사진에서 오랫동안 지속돼온 레즈비언적 열망을 읽는다.

아직도 그때의 배우들과 관객들은 음식을 준비해 함께 나눠 먹으며 정기적으로 만나는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다. 국극을 따라다니기 위해 살림을 더 열심히 하고 “약장사를 해서 모은 돈 2억을 국극에 쏟아붓고 다 날렸어도 후회가 없다” “배우가 되지 못했어도, ‘할머니는 남자 같아’라는 말을 들어도 짧은 머리를 하고 다니는 것으로 대리만족한다“는 나이 든 팬들의 인터뷰는 이러한 여성 공동체가 몇십 년간 지속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소중한 자신의 성적, 정신적, 문화적 레즈비언적 욕구를 분출할 곳을 알고 있었고 정성스레 지켜온 삶의 역사를 회고한다.

<왕자가 된 소녀들>

배우들은 또 어떤가. 그들은 그저 무대에 서는 것이 좋아 가족이나 대학진학 같은 것은 모두 잊고 그것만을 위해 살았다고 이야기한다. 한 배우는 “여성국극을 하니까 남자처럼 하고 다니는 것이 당연해”라고 이야기한다. 남복을 입고 담배를 피우는 사진들에서 그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은 우리가 여고 시절 학교 안의 스타들에게 열광했던 것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혹은 그 이상의) 스타들이었다. 그때 그 언니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우리는 가끔 생각하지 않는가.

배우들 대부분은 무대에서의 삶을 무대 밖으로 옮겨오지 못했다. 결혼과 육아로 인해 국극계에 ‘일꾼’이 사라져갔고, 독재 시절 문화 행정에서 배제되면서 국극은 스러져갔다. 당대 최고 스타였던 임춘앵은 무대를 잃고 50대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배우들 대부분이 7~80대이고, 지금은 젊은 축에 속하는 67세의 이옥천 배우가 제자를 기르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나 감독은 국극의 지난 족적을 살펴보는 것을 넘어 ‘현재성’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고 말한다. ‘드랙퀸(크로스드레싱을 일컫는 드래그(drag)와 퀸(queen)의 합성어)’과 연결지어 여성국극을 보는 다큐멘터리의 제작 가능성에 기대를 갖고 ‘젊은 친구들이 새롭게 해석하는 여성성, 남성성을 과거와 연결지어서 재미있게 풀어내지 않을까’ 기대한다.

여성성과 남성성을 전복적으로 풀어내고 재현하는 배우나 가수, 그러니까 퍼포머들이 그때와 같이 대스타가 되는 현상이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적어도 강요된 여성성과 남성성을 기반으로 연예인이 기획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스타성으로 연결되는 것이 가능하다면…. 

<왕자가 된 소녀들>

‘박력, 씩씩, 남자다움’을 기반으로 남자 역할을 했다는 조금앵 씨가 화장하는 장면은 긴 잔상을 남긴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마음껏 무대에서 펼쳐내고 그만큼 사랑받았던 스타였다. ‘나는 어떠한 사람이다’라고 굳이 정의 내리거나 내세우지 않아도 무대에서 자신들의 끼와 정체성을 마음껏 발현하는 것만으로 여성들은 스타가 되었고, 그런 스타를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하고 돌보던 팬들이 있었다.

배우의 욕망과 예술이 화려하게 일치하는 것이 가능한 무대. 그 무대로 같은 열망을 지닌 관객에게 사랑받는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조차 힘들도록 늙었지만 여전히 크고 작은 무대에 서는, 자신들이 했던 예술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늙은 배우의 얼굴과 몸. 뿌듯하고 아리다. 


1. 본 글은 2019년 11월에 작성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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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크로스 유어 핑거스>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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