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20대의 ‘생존’수당
<혼다, 비트>
유자 / 2019-12-16
<혼다, 비트> 스틸컷
요즘 들어 부쩍 ‘돈이 곧 자유’라는 생각이 든다. 몰랐던 건 아니지만, 학생 시절이 끝나고 길고 긴 취업 준비의 문을 열자 그 말의 무게가 더욱 실감이 났다. 부모님이 한 달에 한 번 주시는 50만 원으로 끼니, 교통비, 책값, 시험 응시료 및 기타 비용 전체를 해결한다. 부모님은 부담 갖지 말고 돈이 부족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하지만 학생도 아니고 노동자도 아닌 백수는, 이미 생존수당 50만 원만으로도 눈치가 보인다. 마음껏 책을 사는 것도, 영화를 보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를 빈곤하다고 느낀다.
물론 나는 ‘부르주아 새끼’다. 생활고에 시달린 적도 없고 돈이 없어 끼니를 거른 적도 없다. 용돈으로 생활했고, 등록금을 스스로 벌어야 했던 적도 없으며, 경기도에 거주하기 때문에 서울 소재의 대학을 다니면서도 자취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성인으로서 독립해야 할 의무를 강하게 느꼈고 생존 이외의 것을 조금이라도 누리기 위해선 절약을 생활화해야 했다.
학생 시절이 끝나고 이제는 부모님으로부터 진짜 독립해야 하는 상황에서 마주친 취업난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돈 벌 수 있는 자리는 적고, 가난한 젊은이들은 많아서 이 길고 긴 취업의 과정이 언제 끝날지 막막하고 불안하기만 하다. 그럴 때마다 뽑힐 만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았는지 스스로를 다그치고 검열한다. 그럼에도 높은 문턱 때문에 실패가 반복되면 자존감은 더욱 낮아지고 내가 하고 싶은 일 혹은 ‘꿈’과 같은 단어는 점점 사치가 되고 만다.
굶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모님께 지원을 받는다는 이유로 가난은 어불성설이라고 하기엔, 그저 앓는 소리 한다고 하기엔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 너무 팍팍하다. 청춘이고 젊다는 말로 20대의 고단한 일상을 뭉뚱그리기엔 청년들이 마주하는 삶이 너무 고단하다.
<혼다, 비트> 스틸컷
양주희 감독의 다큐멘터리 <혼다, 비트>(2016)는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통해 이와 같은 20대의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영화학과에 재학 중인 감독은 영화를 한 편 제작하고 나자 통장에 ‘엔꼬’(전차나 자동차 등이 고장 나 움직이지 못함을 이르는 일본어)가 나버린다. 공과금과 월세, 학자금 대출, 부족한 생활비라는 경제적 짐을 안고 있는 그는 당장의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영화 소품용으로 산 그의 바이크, 혼다 비트를 팔고자 한다. 중고나라에 혼다 비트 판매 게시글을 올린 후 감독은 구매자를 기다린다. 혼다 비트는 과연 팔릴 것인가?! 그 여부가 다큐멘터리를 이끄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된다.
중고나라로부터의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작품에는 감독 자신과 그의 친구들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혼다 비트를 타고 달리던 주인공은 한 집 앞에 내린다. 이어지는 장면에선 감독이 살고 있는, 다소 좁아 보이는 원룸이 나타난다. 한 명만 겨우 수용 가능한 그 공간에서 그는 중고나라에 혼다 비트 판매 게시글을 올린다. 추운 날 비트를 타다 감기 기운이 생겨 간 병원에서도 돈 걱정이 따라다닌다. 아르바이트, 편집실, 원룸이 반복되는 그의 일상에서 친구들과의 유흥이나 여유는 거의 없었다.
편집실에서 만난 친구들의 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본가가 지방에 있는 한 친구는 서울에서 보증금 3000만 원, 월세 30만 원인 원룸을 얻어 살고 있다. 월세와 교통비, 식비를 합한 90만 원 정도의 생존비는 부모님이 지원해주시지만, 친구를 만나거나 영화를 보는 등 생존과 관련 없는 활동을 하면 예산을 초과하기 일쑤다. 부모님께 받은 돈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님에도 생활은 빠듯하고, 그렇다고 부모님께 더 손을 벌릴 순 없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해도 시급은 너무 적고, 90만 원이라는 돈으로 간신히 유지하는 생활도 그렇게 질 좋은 삶은 아니다.
감독이 술집에서 만난 친구들은 저마다 아르바이트를 하나씩 하고 있다. ‘던킨 알바생’, ‘백수’라는 소개 자막이 보여주듯 20대 청년들은 ○○대학교 ○○학과 학생이라는 정체성보다는 어디어디에 소속된 노동자라는 정체성이 더 강하다. 게시판에 덕지덕지 붙은 하숙, 원룸 광고와 공과금 고지서는 생존이 빠듯하고 미래가 불투명한 20대 청년들의 팍팍한 삶을 보여준다.
중고나라에서 연락 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주인공이지만, 사실 혼다 비트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사실 혼다 비트는 오히려 주인공인 감독에게 매우 중요하고 소중한 물건이다. 바이크 수리 센터 사장님들이 전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로 꼬질꼬질하고 흠집 가득한 혼다 비트는 알고 보면 주인공과 많은 추억을 나눈 물건이다.
“너 스쿠터 타면 약간 해방감 느껴?”라고 묻는 친구의 질문에 감독은 답한다. “한 번 타면 알 거야. 아, 진짜 이게. 되게 자유로운 순간들이 있어.”
<혼다, 비트> 스틸컷
새벽 촬영이 끝난 후 엄청 졸리고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임에도 비트를 타고 한 바퀴 돌면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스트레스가 싹 사라진다고 감독은 말한다. 혼다 비트는 그렇게 어디든 그를 데려다줬고 해방감을 느끼게 해줬고 즐거움을 준 소중한 존재였다. 바이크가 제발 팔리기만을 기다린 주인공이지만, 사실 러닝타임 내내 그는 혼다 비트와 어디든 함께였고 계속 붙어 다녔다.
그럼에도 비트를 팔아야만 하는 건 주인공의 상황이 참 어렵기 때문이다. 밀린 월세, 생활비를 어떻게 해서든 혼자의 힘으로 마련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값어치 있는 물건을 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주인공이 비트와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시급이 높고 4대 보험도 지원해주는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한 적도 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배달 노동자로 여자는 아무래도 좀 부적합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혼다, 비트>의 양주희 감독
일련의 과정을 거쳐 주인공은 비트를 팔아 월세를 마련하기로 했고, 드디어 중고나라를 통해 한 남자로부터 30만 원에 비트를 사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비트는 그에게 아주 요긴한 물건이었고, 즐거움과 추억을 나눈 물건이었음에도 30만 원이 당장 손안에 들어온다는 말에 그는 방방 뛰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나 실수로 놓쳐 먹을 것 사기가 죄책감 든다며 빵집에서 고민하던 주인공은 구매 연락을 받자 ‘쿠키 정도는 사도 되겠지?’라며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브라우니를 산다. 그리고 함박웃음을 짓는다.
그래서 그는 비트를 팔았을까? 사실 그 여부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이 비트를 파는 이유, 그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부자유한 20대 젊은이의 일상이 <혼다, 비트>가 보여주고자 하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20대 젊은이들이 혼자의 힘으로, 즉 성인으로서 진정한 의미의 독립을 할 수 있을지, 그게 과연 가능하긴 한 것인지 합리적인 의문을 던진다. 주(住)는커녕 의식(衣食)을 해결하기도 힘든 젊은이의 현실을 보여주는 <혼다, 비트>는 결국 바이크 판매라는 이야기를 통해 자유를 박탈당한 젊은이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한 가지 인상 깊었던 점은 작품이 상당히 우울한 현실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패배감에 젖어 있거나 자기 연민에 빠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주인공 주희를 비롯해 그의 친구들은 솔직하고 유쾌한 자세로 그들이 겪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결코 웃음을 잃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선 오프닝에 등장했던 것처럼 헬멧을 쓰고, 이어폰을 끼고, 비트를 탄 채 어디론가 향하는 주인공이 다시 등장한다. 감독은 마지막 장면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아마 어려움을 대하는 하나의 자세를 관객에게 제안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암울하고 불안하고 고단해도 어쩌겠냐고. 절망하지 말고 계속 나아가야지 않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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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019 대학 교지편집부에서 활동. 재미있고 가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콘텐츠 제작자 지망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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