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IRST
나의 첫 영화 연출기
영화를 만든다는 것: 나만의 속도
<그녀의 속도> 제작기
한여울|영화감독 / 2019-12-16
‘처음’이란 말은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죠. 설렘이기도 두려움이기도 한 그것! 우리가 사랑하는 여성 감독들의 처음은 어땠을까요? 여전히 두근두근 소중한 기억일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하는 부끄러움의 시간일지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감독들이 직접 들려주는 ‘나의 첫 영화 연출기’를! 영화제작 과정부터 우당탕탕 좌충우돌, 따뜻한 메시지까지 < MY FIRST > |
<그녀의 속도> 슬레이트 ©한여울 감독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영화를 만들기 위해 가장 처음에 해야 하는 일은 임팩트 있는 한 문장을 만드는 것이다. 그 문장이 있어야 장르가 형성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보인다. 나는 내 안의 가장 작은 욕망부터 먼저 생각하는 편이다. 살다 보면 무언가를 잘하고 싶은데 잘 안 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그런 것들을 생각한다. 왜 잘 안 되는 걸까? 나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가?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인가? 혹은 노력하면 가능할 수도 있는 일인가? 이런 것들을 따져봤을 때 하나의 이야기가 탄생하게 된다. 이야기를 쓰고 난 뒤에 시간을 두고 다시 읽어보면 그 감정에서 빠져 나와 객관적인 시선이라는 것이 생긴다. 오늘 봐도 좋고 내일 봐도 좋고 몇 달 뒤에 봐도 좋은 이야기가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남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 교수님이, 친구가, 동료들이 좋아할 것 같은 이야기 말고 작가 본인이 언제 어디서 봐도 사랑스럽다고 느낄 수 있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 감독 스스로가 이야기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남은 과제들을 추진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녀의 속도>(2018)를 초반에 기획할 때 두 달 동안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미술학원에서 강사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초등학교 때 나갔던 타자대회가 떠올랐다.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의 나는, 초등학교 6년 내내 타자대회에 나갔지만 늘 하위권에 있었다(끈질긴 노력 끝에 마지막 대회에서는 우승을 했지만). ‘모든 부분에서 느린 아이가 타자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싶어 한다면? 꼭 1등을 하고자 한다면?’ 아이디어가 떠오르자마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혹시나 잊어버릴 것을 염려해 급하게 어딘가에 적어두었다. 이렇게 아이디어라는 것에는 잠복기가 있다. 무엇을 하든 이야기의 끈을 놓지 않고 있어야 내가 잊고 있었던 나의 무의식을 끄집어낼 수 있다.
한 줄로 요약한 이야기가 정해지면 그 다음부터는 무척 수월해진다. 장르, 주인공 연령대, 시대적 배경, 가족 관계, 주인공과 관련된 주변 인물의 배치 등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결말’ 부분인데, 나는 항상 결말을 정하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이 부분은 일단 보류해두고 동료들을 만나러 다니는 편이다.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가끔은 정말 엄청난 아이디어를 얻기 때문이다.
<그녀의 속도>에 출연한 이재인 배우(왼쪽)와 김시은 배우 ©한여울 감독
배우의 중요성
초고 정도의 시나리오가 완성됐다면, 다음 단계는 바로 캐스팅이다. 배우는 영화 연출의 절반이다. 작가가 쓴 이야기와 배우들의 연기 합이 맞아야 영상의 완성도와 깊이가 결정된다. 사실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다가 영화로 넘어오면서 가장 고민되는 부분이 배우 캐스팅이었다. 누구를 어떻게, 어디서 섭외를 해야 할지 상당히 막막했다.
첫 단편 영화 <자장가>라는 작품을 제작했을 때의 일이다. 나는 초보 영화 감독이었기 때문에 누군가와 협업해서 작품을 만든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1인 제작이 가능한 애니메이션과는 확연히 다름을 느꼈다. 경험이 없다 보니 도무지 사람을 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몇 번의 고민 끝에 친한 친구에게 부탁했더니 흔쾌히 연기를 해주겠다고 했다. 내가 어떤 실수를 하든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줄 것이라는 생각이 컸다. 그렇게 결정한 뒤에도 마음 한구석이 계속 찜찜해 2013년 부산국제영화제의 같은 섹션에서 상영된 인연으로 알게 된 감독님(장유빈 감독)이 생각나 그를 만나서 자문했다. 그는 나에게 꼭 실력 있는 배우를 캐스팅하라고 말해줬지만, 그때의 나는 리더로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게 첫 영화를 어렵게 제작했지만 캐릭터와 배우의 이미지가 잘 맞지 않아 혹평을 들었다. 그 후 몇 편의 습작을 더 거친 뒤에 <그녀의 속도>라는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의 속도>의 로그라인(이야기의 방향을 설명하는 한 문장)은 ‘모든 것이 느린 초등학생이 타자대회에 나가게 된다’는 한 줄의 문장이었는데, 주변 반응이 꽤 좋아서 첫 시작의 예감이 매우 좋았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내가 그리고자 하는 인물의 감성을 살아 숨 쉬게 만들 수 있는 배우를 꼭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초고가 나온 시점에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졸업영화제에 갔었다. 이재인 배우님과 김시은 배우님이 출연한 단편 <장례난민>(2017)과 <어바웃 웨딩>(2017)을 보고 마음에서 진한 울림을 느꼈다. 그들의 연기를 보며 내 작품의 인물들이 자연스럽게 연상됐다. 그분들과 꼭 함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섭외 방식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우선 부딪쳐보자’는 심정으로 회사 사이트를 찾아 무작정 전화를 걸었더니 메일로 시나리오를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이 기회가 ‘마지막’인 것처럼 정성스럽게 글을 써서 보냈다. 애니메이션으로 수상한 이력을 어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장 먼저 김시은 배우님에게서 직접 연락이 왔고, 긍정적인 답변을 주셨다. 배우님과 종로의 한 카페에서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느림의 미학’이라는 주제에 크게 공감하셔서 감사하게도 흔쾌히 출연 결정을 해주셨다.
한 명의 배우가 캐스팅되면, 그다음부터는 더 수월해진다. 김시은 배우님은 이미 독립영화계에서 잘 알려진 배우였다. 이후 이재인 배우의 소속사 측에 연락이 닿았고, 김시은 배우의 캐스팅 확정 소식을 알려드리며 시나리오를 보냈다. 얼마 후, 미팅을 하고 싶다는 황주혜 대표님의 연락을 받았다. 배우를 섭외하기 위해서는 내 이야기에 대한 확신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예상 질문을 뽑아 그에 대한 답을 생각하고 열심히 연습했다(마치 면접 준비를 하듯이). 첫 영화를 제작했을 때의 소심했던 나의 모습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러나 작품에 관한 질의를 받을 것이라는 예측과는 달리 대표님께서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질문하셨다. 영상 언어에 대한 연구를 더 하고 영화 감독의 길을 계속 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때도 영화를 계속 할지 말지에 대한 고민은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확신에 찬 대답을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장의 시나리오에 대한 평가나 감독으로서의 자질보다는 앞으로의 가능성을 더 염두에 두고 출연 결정을 내리신 것 같다. 나중에 영화를 제작하고, 첫 에세이집을 출간한 뒤 감사한 마음에 책을 선물해드리기도 했다.
<그녀의 속도> 촬영 현장에서 사용한 슬레이트 ©한여울 감독
제작비
내가 애니메이션을 제작했을 때 딱 두 곳에만 돈을 썼다. 성우 그리고 음악. 30만원 남짓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영화는 모든 것이 소비의 시작이다. 배우와 스태프의 인건비부터 시작해서 소품, 장비, 로케이션 비용, 식비, 이동비, 렌트비 등 모든 것이 예산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여러 습작을 통해 느낀 것은, 비용을 투자하는 만큼 감독이 원하는 영상 연출을 스크린에 그대로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를 찍다 보면 예산이 많이 들 땐 장면을 없애고 싶고, 돈이 적게 드는 방향으로 이야기의 주요 장소나 소품을 바꾸기 위해 타협하게 된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녀의 속도>를 촬영할 당시 많은 장소가 나와야 하기도 했고, 2000년대 초반이라는 시대를 반영하기 위해 옛날 소품들도 대거 필요했다. 턱없이 부족한 예산으로 고민했을 때 담당 프로듀서가 여러 제작지원 사업을 내게 알려줬다. 사실 지원 사업에 선정되기에는 매우 쉽지 않다. 전에 한 번 지원 사업에 신청한 적이 있었다. 애니메이션으로 큰 영화제에 초청된 이력이 있었음에도 결국 최종에서 떨어졌다. 그날 통보를 받고 집에 가면서 엄청나게 울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때의 기억으로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프로듀서가 알려준 제작지원 사업에 관한) 서류 제출을 계속 미루다가 오후 4시까지 제출해야 하는 것을 3시 59분에 겨우 제출했다. 그런데 며칠 뒤 면접을 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느림의 미학’이라는 영화 주제와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진정성 있어 보인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최종으로 선정됐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엄마와 통화하면서 또 울었던 기억이 난다. (왜 맨날 우는 거야?) 그렇게 <그녀의 속도>의 제작비는 전액 지원을 받아 내가 영화 속에서 그리고자 하는 세계관을 더 잘 표현할 수 있게 됐다.
<그녀의 속도> 촬영 현장 ©한여울 감독
촬영을 하며
이번 영화만큼은 변수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준비가 부족한 탓에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고, 최대한 시간을 줄이는 편이 비용을 아끼는 편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완벽하게 계획을 짠다고 한들 변수는 피할 수 없다.
<그녀의 속도>를 촬영할 때가 6월 초였다. 일기예보가 매시간 변화하는 까닭에 기상청 홈페이지를 틈날 때마다 들락날락거렸다. 분명 어제는 샛노란 햇빛 그림이었는데, 다음날이 되자 빗금이 죽죽 그인 비로 변했다. 2회차부터 인천의 한 학교에서 야외 촬영을 해야 하는데, 첫날 촬영을 마치고 스태프들과 카페에 모여 다음날 촬영 여부에 대한 회의를 했다. 비가 오면 야외 장면 전부가 날아가게 되고 스토리 전개상 문제가 되는 부분이 많았다. 메인 스태프들은 촬영이 불가하다는 결론을 내린 상황이었고 나는 어떻게든 진행하려고 고집을 피웠다. 아무런 해답을 찾지 못한 채 모든 스태프들이 밖으로 나갔고, 내가 홀로 남았을 때 자리를 지켜줬던 사람은 조명감독이었다. 그는 여러 상업영화를 촬영하며 겪은 일화들을 나에게 들려주며 현실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나는 해당 장면을 꼭 찍고 싶다는 말과 함께 헛걸음하더라도 촬영을 강행하자고 스태프들을 설득했다. 다행히 그날은 비가 오지 않았고 무사히 촬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간혹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문제가 터지기도 하지만 예상 밖의 행운으로 좋은 변수를 만나기도 한다.
<그녀의 속도> 촬영 현장 ©한여울 감독
어떤 일을 하더라도 갈등을 피할 수는 없다. 영화에서도 그렇다. 나라는 사람만을 믿고 달려온 사람들과 갈등이 생겼을 때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인가?
사실 감독의 자리는 무겁다. 어떤 분야의 리더가 되더라도 그럴 것 같다. 전체를 총괄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모두의 마음을 헤아리는 게 어렵다. 특정 타인에게 덜 신경을 썼을 때, 더 넓은 마음으로 배려를 해주지 못했을 때 사소한 갈등이 생긴다. 아무리 시나리오를 잘 썼고, 그것이 좋은 반응을 불러올지라도 감독의 의무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내 작품을 위해 선뜻 시간을 내주는 스태프들이 없었다면, 영화는 완성되지 못한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존중을 바탕으로 행동해야 한다.
나는 <그녀의 속도>의 촬영을 마치고, 내가 과연 감독으로서 자질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던졌다. 힘겹게 투자를 받고 사람들을 모아 원하는 장면들을 모두 찍었지만 어쩐지 내가 놓쳤던 부분들만 계속 생각이 났다. 그러한 의문들이 나를 괴롭혀서 밤잠을 설쳤다. 나는 아직 감독으로서 부족한 것들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편집을 하면서도 괴로웠고, 완성하고 나서도 그렇게 기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러 영화제에서 영화가 상영되고 난 후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한걸음에 달려와 주는 것을 보며, 비로소 모두가 고생했던 시간이 값진 보상으로 돌아옴을 실감했다.
<그녀의 속도>를 만드는 데 거의 1년 정도 걸렸다. 단편 영화치고는 굉장히 오래 걸린 편이다. 시나리오 때부터 고민을 많이 하고, 한번 마음먹은 것을 바꾸기보다는 그 안에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다. 마음과 정신을 쏟은 영화라 편집을 끝내면서 ‘내가 다음에 영화를 또 만들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하지만 나는 그 고민에 대한 답 그리고 영화의 의미를 늦지 않게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영화의 의미는 어딘가에서 상영이 되고, 그것이 누군가에게 인상을 심어주는 데에 있다. 지난해 겨울, 서울독립영화제에 초청됐을 때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7년 전 관객으로서 영화제 상영작을 보러 갔을 때 ‘언젠가 나도 저 무대에서 감독의 위치에 서 있을까’라는 상상을 했었는데 그것이 실현되자 어안이 벙벙했다. 꿈을 오래 품다 보면 내가 원했던 일들이 언젠가 이뤄진다. 포기하고 싶다가도 조금씩 희망이라는 것이 보이고, 그것이 다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그녀의 속도> 촬영 현장에서의 한여울 감독 ©한여울 감독
나에게 영화란
영화를 만드는 일은 수많은 산을 넘어야만 하는 것이다. 한고비를 넘겨도 다른 부분에서 고난과 위기를 겪게 된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은가. 과정이 아름다운 순간은 많지 않다. 수많은 의구심과 싸워야 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고, 개인 생활을 유지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창작을 하는 이유는, 영화가 완성됐을 때 내 존재가 살아있음을 실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 영화가 타인의 삶에 작은 영향을 미치길, 내 영화를 본 그날의 하루가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한 응답을 실제로 들었을 때, 그 이상의 행복을 아직까지는 찾지 못했다.
PURZOOMER
<그녀의 속도> <문어를 그리는 아이> 등 연출, 『울면서 걷다』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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