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적대의 가능성 - 영화 <잘돼가? 무엇이든> 리뷰
미디액트 ‘페미니즘 영화비평’ 수료작|<잘돼가? 무엇이든>
임가영 / 2021-03-17
[편집자주] 본 리뷰는 미디액트와 퍼플레이가 진행한 온라인 워크샵 <자기만의 글 - 페미니즘 영화 비평 쓰기> 1, 2차 강좌(주강사 : 김소희, 정지혜)의 수강생이 작성한 비평 수료작입니다. 교육 수료작으로서 수정없이 게재합니다. * 총 8편의 비평 수료작은 매주 2편씩 4주에 걸쳐 진보적 미디어운동 연구 저널 ACT!와 여성영화 온라인 매거진 퍼줌(PURZOOM)에 공동 게재됩니다. |
〈잘돼가? 무엇이든〉 ▶ GO 퍼플레이 이경미|2004|드라마|한국|36분 |
‘적’이란 무엇일까? 언제 우리는 타인을, 또는 심지어 나 자신을 적대하게 될까? 우선 적은 나를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존재일 수 있다. 평화와 안정, 심지어는 생존을 위해 나는 적에 대항해야 한다. 또한 적은 ‘라이벌’에 가까운 것일 때도 있다. 적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는 더 강해진다. 나 자신의 약점과 강점을,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아멜리노통은 자신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적이 ‘파괴력과 창조력’ 둘 다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적은 나를 파괴하는 동시에 창조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잘돼가? 무엇이든>의 두 주인공 역시 이런 양면적인 적대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의 적대는 단순하지 않다. 희진과 지영은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고 안정을 파괴한다. 동시에 이러한 불화의 다이나믹 속에서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욕망은 좀 더 선명히 드러난다.
나는 <잘돼가? 무엇이든>을 희진과 지영의 적대 속에서 읽어보려 한다. 특히 두 인물 각각의, ‘침범’하고 ‘경계짓는’ 특성에 주목해 보고 싶다. 이를 통해 불편하고 오묘하게 꺼끌대는 이들의 관계와 각자의 욕망을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적대가 새로운 관계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지영과 희진 사이의 적대 관계는 영화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둘의 사이가 마냥 좋지만은 않은 것은 확실하다. 더군다나 영화는 이들의 관계를 내내 어떤 긴장감 속에서 지켜보게 만든다. 서로에게 하는 말이 진실일지, 지금은 좋아보이는 사이가 나중에 뒤집히지는 않을지, 소위 ‘뒷통수’를 때리지는 않을지 생각하게 된다. 희진의 파티션에는 ‘적일수록 가까이 두어 배워야한다’는 표어가 붙어있다. 초반부 일찌감치 등장하는 컷이다. 이후 희진의 태도가 아무리 살가워도, 또는 살가울수록, 그가 지영을 ‘적’이기 때문에 가까이 두려는 것일 수 있다는 의심이들게 된다.
함께 하는 일도 순탄하게 진행되진 않는다. 희진은 합의해 나눈 범위를 넘어 지영의 일감에 손을 댄다. 협력해서 해나갈 일을 경쟁처럼 만든다. 항의하는 지영에게 희진은 멍한 표정과 초점이 빗나간 말로 응수한다. 지영 또한 희진에게 쌀쌀맞게 대한다. 희진의 뻔뻔하고 어리숙한 면들을 데면데면 보아 넘겨주지 않는다. 사실 지영은 모든 것에 대해 그런 편이다. 자신의 주관이 뚜렷한 만큼 주변에도 확실히 날을 세우고, 그건 직장 동료인 희진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희진과 지영은 서로를 의도적으로 파괴하려 작정한 이들은 아니다. 다만 이들, 특히 희진은 마치 모기처럼 지영의 경계를 물어뜯듯 거슬리게 침범하는 경향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노통의 작품 <적의 화장법>에서 ‘적’은 연착된 비행기를 기다리는 주인공에게 쉴새없이 성가신 말을 쏟아내는 낯선 행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오후 네 시>에서는 거실 한복판을 매일 오후 4시마다 차지하고 앉아 집주인을 신경쇠약으로 몰고가는 이웃이 바로 ‘적’이다. <잘돼가? 무엇이든>의 희진과 지영 사이의 적대 역시 어쩔 수 없이 마주할 수 밖에 없는 타인이 경계를 침범해 오는 오묘한 순간에 발생한다. 공공장소라는 열린 공간, 이웃 지간의 예의, 회사에서 같은 업무에 배정된 사이와 같이, 어쩔 수 없이 묶인 사람들 사이의 긴장감이 무언가 더 집요하고, 불편한 것이 된다. 그리고 이 적대는 단순한 성가심만 불러일으키고 끝나지 않는다.
적대는 다른 무엇으로 이어진다. 노통의 ‘적’은 상대에게 침범하여 그의 내면적 문제를 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잘돼가? 무엇이든>의 적대는 두 인물의 관계와 각각의 캐릭터성을 더욱 뚜렷하게 형성한다. 침범하는 희진과 경계짓는 지영, 이 대립에 주목해 보자. 무심히도 지영을 괴롭히는 희진의 침범 행위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그리고 스스로를 상처 입힐 정도로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운 채 희진을 밀어내는 지영의 욕망은 무엇일까? 우선 희진은 자신만의 공간이 없는 존재이다. 그에게는 일을 마치고 퇴근할 곳도 없다. 한 편에 간이 침대가 놓인 사무실에서 희진은 요가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며 밤을 보낸다. ‘자기만의 방’이 없는 희진의 처지와는 달리 지영은 안에서 단단히 잠글 수 있는 자신의 공간이 있다. 그는 커튼을 닫아내리고, 자다 일어나 가스 밸브까지 잠근다. 그의 경계심 가득한 태도를 말해주는 것 같다. 침대 머리맡에는 책이 쌓여있다. 주관과 생각이 뚜렷한 지영의 공간답다.
반면 뻥 뚫린 사무실에서 잠도 안오고 무료해진 희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일감을 뒤적인다. 이어지는 다음 날 장면에서 이 때 희진이 한 일이 원래 지영의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어쩌면 희진의 ‘침범’이 자신의 공간, 자리 없음에서 비롯되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진에게는 지영처럼 자기만의 취향이나 생각들로 채워진 공간이 없다. 물질적인 것과 (아마도) 정신적인 의미 둘 다에서 그렇다. 적어도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것만 보면말이다. 때문에 다른 사람의 경계에 파고들어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는 것 아닐까? 한편으로 희진의 침범 행위는 자신의 영역을 더 넓히기 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확장’은 본래의 것이 더 넓어진다는 의미이다. 앞서 말했듯 희진에게는 애초 ‘자기의 공간’이 없다. 따라서 그의 침범은 영역의 확장보다는, 경계를 건드리고 자극하는, 적대를 불러일으키는 것자체에 더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 그 부딪히고 마찰하는 순간 속에서 존재를 입증하고, 실감하는 것처럼 말이다.
경계 짓는 지영에게 희진의 침범은 위협적이다. 희진에게 시달린 그는 옷 속에 칼을 품고 있다가, 지나가던 사람과 부딪혀 품속의 칼에 의해 상처를 입는 꿈을 꾼다. 이는 어쩌면 본인의 경계와 주관을 지키려는 의지가 지나쳐 스스로에게 독이 되는 순간 같다. 혹은 지영이 경계를 지키려 날카롭게 세운 날이 그 자신을 향하게 되었음을, 스스로마저 적대의 대상으로 만들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일 수도 있다. 이처럼 지영을 괴롭히는 것은 희진 뿐만은 아니다. 지영의 안팎에서 원치 않게 그를 옭아매는 크고 작은 힘들이 있다. 야근수당이 새는 걸 알아봐 달라며 ‘로얄 패밀리’ 운운하는 박사장, ‘2년제도 못갈 것’이라고 자신을 폄훼한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여자라서’ 슬쩍 무시한 것인지 잔돈을 내주지 않으려 한 택시기사처럼 말이다. 어쩌면 이런 힘에 의해 지영의 경계짓기가 위협 당하는게 아니라, 이런 압력이 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경계에 대한 강박을 가지게 된 것도 같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희진의 ‘침범’과 지영의 ‘경계짓기’ 모두 나름의 ‘자리 만들기’를 위한 노력일 수 있다. 이러한 공통점이 둘 사이의 적대가 그 이상의 관계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드는지 모른다. 영화의 후반부에 희진은 지영을 위해 흔들리는 울타리를 잡아주고, 지영은 ‘가보겠다’며 돌아서는 희진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끈다. 이제까지 둘 사이에 작동하던 관계의 역학이 뒤바뀐다. 여러모로 비슷한 처지의 두 사람은 서로에게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이미 발견했을 수 있다. 하지만 둘은 앞으로도 이제까지처럼 서로 너무나 다른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적대와 불화 역시 지속될 것인데, 그것은 오히려 이 관계가 지속될 것이라는 약속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끊임없이 각자의 욕망을 비춰내며 서로를 파괴하고 창조하는, 그런 종류의 적대 관계로서 말이다.
PURZOOMER
미술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즘 비평이란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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