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퍼플레이가 만난 사람들
진실이라는 큰 산을 넘는 한 여자의 이야기
<빛과 철> 김시은 배우
퍼플레이 / 2021-02-11
#세상을_바꾸는_여자들 2021.2.4|김시은 배우를 만나다 |
김시은 배우 필모그래피 2020 <마음 울적한 날엔> 조연 <빛과 철> 주연 2019 <사자> 조연 2018 <행복의 나라> 주연 <내가 사는 세상> 주연 <그녀의 속도> 주연 2017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 주연 <1987> 단역 <골든슬럼버> 단역 <너와 극장에서> 조연 <여름에> 주연 <당신도 주성치를 좋아하시나요?> 주연
<어바웃 웨딩> 주연 <백 프롬 더 비트> 주연 <김녕회관> 주연 2016 <아가씨> 단역 <마이 스윗 레코드> 주연 2015 <뷰티 인사이드> 조연 <서부전선> 단역 <검사외전> 단역 <귀향> 조연 <배우의 탄생> 주연 <위로> 주연 2014 <군도:민란의 시대> 단역 <허삼관> 단역 <수색역> 조연 |
늦은 밤 인적 드문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두 대의 차량이 부서져 있고, 한 남자는 사망, 한 남자는 2년째 의식불명이다. 사고 가해자의 아내 ‘희주’(김시은)는 고향을 떠났다가 2년 만에 돌아오지만, 다시 시작해보려는 다짐을 누군가 비웃듯 상황은 곧 혼란스러워진다. 의식불명이 된 남자의 아내 ‘영남’(염혜란)을 맞닥뜨린 희주는 또다시 깊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그런 희주의 주위를 영남의 딸 ‘은영’(박지후)이 계속해서 맴돈다.
〈빛과 철〉 포스터
<빛과 철>(배종대, 2021)은 세 여성 캐릭터의 복잡한 감정을 기반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미스터리 드라마다. 하나의 사건 아래 묻어두었던 비밀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인물들 간에 일어나는 묘한 스파크는 극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진실을 좇는 희주를 따라가던 영화는 예상치 못한 결말을 맞는다. 비밀이 드러날수록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는 마구 흐트러지는데,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 진실이 맞는 것일까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외에도 영화는 산업재해, 파견직 근로자에 대한 부당 대우 등 사회적 문제를 다루며 여러 갈래로 생각을 뻗어나가게 한다.
김시은 배우가 분한 희주는 가해자의 아내로서 죄책감, 원망, 공포, 미움, 불안 등 여러 복합적인 감정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복잡다단한 내면을 지닌 캐릭터를 보여주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터. 실제로 배우는 촬영 당시 어려움을 많이 느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 그는 단단하면서도 강렬한 폭발력을 뿜어내며 희주를 탁월하게 표현해냈다. 그가 “<빛과 철>은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이라고 말한 데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지난 4일, 김시은 배우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사진제공 찬란.
-처음에 시나리오를 받고 희주라는 인물에게서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굉장히 묵직하고 강렬하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처음엔 아픈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뒷부분까지 다 읽고 나서는 참 복잡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희주와 남편 사이에 드러나지 않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그게 궁금했고 감독님과 얘기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감독님과 얘기하고 난 후엔 궁금했던 지점이 풀렸나요?
감독님도 구체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놓으신 게 아니더라고요. 제 생각을 들어보고 싶어 하셨고,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희주의 이야기를 같이 만들어갔어요.
-희주를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해준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해요.
시나리오가 제게 먼저 왔어요. 미팅을 하거나 오디션을 본 게 아니라 처음부터 제의가 들어왔죠. 감독님은 저와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는데 제 전작들을 보고 캐스팅하신 거예요. 그 부분에 마음이 많이 갔고, 시나리오도 정말 탄탄하다고 생각했어요.
-이번 영화에서 배우님이 보여주신 얼굴들은 전작에서의 그것들과 완전히 달랐어요. 감독님도 배우님의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캐스팅했다는 말씀을 하신 바 있는데, 이번 작품을 통해 배우님은 어떤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나요?
내가 맡은 인물이 극의 주된 흐름을 끌고 나가는 걸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근데 희주를 통해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은 못 해본 것 같아요. 시나리오에 나와 있는 걸 고스란히 소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죠. 그게 어떤 모습일진 모르겠지만 시나리오 대로만 나와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쉽지 않은 과정이었죠.
사진제공 찬란.
-이 작품을 하면서 어려웠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더라고요.
촬영 당시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희주가 갖고 있는 마음이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이잖아요. 특히 영남의 가족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을 때의 심리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처음에는 그게 뭔지 정확하게 알고 싶었죠. 근데 시간이 지나고서는 모르는 게 맞는 것 같더라고요. ‘하나의 감정이 아니라 여러 감정이 드는 게 맞지. 내가 왜 감정을 단순화시키려고 했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잘 나온 것 같아요. 근데 그때는 그걸 몰라서 너무 힘들었죠.
-감독님께서 힌트는 안 주셨나요?
감독님도 희주를 규정하고 싶어 하지 않으셨고, 제가 찾아 나가길 바라셨어요. 그래서 희주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 늘 있었죠. 그때는 힘들었지만 돌아보면 그게 맞는 방법이었다고 생각해요. 심적으로 고생은 했지만 배운 게 많고 지금은 좋은 자양분으로 남았어요.
-힘든 만큼 작업을 마쳤을 때 쾌감도 있었을 것 같아요. 희열감을 줬던 장면이나 순간이 있다면요?
당시엔 너무 힘들어서 쾌감을 느끼진 못했어요. 오히려 쾌감은 요즘에 영화를 보면서 느껴요. 희주라는 인물이 잘 완성된 것 같고 영화 자체도 재미와 흡입력이 있더라고요. 처음 관람할 땐 긴장하고 걱정하면서 봤는데, 그럼에도 제가 관객으로서 영화를 따라가는 걸 느꼈을 때 짜릿했고 쾌감을 느꼈어요.
-진실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점차 고조되는 감정을 다른 결로 보여줘야 하는 것도 핵심이었을 것 같은데, 희주를 표현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지점은 무엇인가요?
죄인으로서 영남과 은영을 대할 때 정말 힘들었어요. 그런데 은영에게서 몰랐던 사실을 듣게 된 후 희주의 태도가 180도 바뀌면서 당당해지잖아요. 그 부분은 오히려 어렵지 않았던 것 같아요. 공감을 많이 하면서 연기했어요. 희주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인물인데, 화살을 돌릴 수 있는 타겟이 생긴 거죠. 그게 비록 선한 행동은 아니지만, 인간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판이 뒤집히고 나서는 부스터를 단 것처럼 힘을 받아서 앞으로 쭉쭉 나갔던 것 같아요.
〈빛과 철〉 스틸컷
-희주가 이명을 듣는다는 것도 영화에서 중요한 요소인 것 같아요. 남편의 진실을 알게 된 후 가장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되죠.
이명은 희주 내면의 소리라고 생각했어요. ‘남편이 누구 때문에 죽었을까? 결국 네가 잘못한 거야’라고 화살을 자꾸 스스로에게 던지는 거죠. 발버둥 쳐 나오려고 해도 발목을 놔주지 않는 죄책감으로부터 기인한 심리가 신체적으로 발현된 거라고 생각했어요.
-영화에서 배우님이 가장 애정하는 장면은 무엇인가요?
은영이 희주를 만났다는 걸 알게 된 영남이 희주를 찾아오잖아요. 그때 웅크렸던 희주가 당당하게 “왜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냐”고 하는데 그 대목을 연기하면서 통쾌했어요. 그게 영남과의 첫 신이었는데, 그때 응축된 것들이 튀어나오면서 스파크가 일었던 것 같아요. 현장에도 긴장감이 감돌았었고요.
-염혜란 배우와는 이번 작품이 처음인데 어떠셨어요?
혜란 선배 너무 좋아서 힘들었어요(웃음). 영남을 미워해야 하는데 얘기하면 할수록 선배가 너무 좋고 따뜻한 거예요. 감독님이 배우들을 못 만나게 한 데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나중엔 너무 힘들어서 선배에 대한 마음을 미움으로 승화시켰어요. ‘어쩜 저렇게 사람이 얄미울 정도로 좋고 따뜻하지?’라고. 그 마음을 영남에게 대입했어요. ‘나는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면서 고군분투하는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나를 다 품을 것처럼 저러나. 분명히 내 남편이 잘못한 건데 왜 다 이해한다는 듯이 굴지?’라고 생각한 거죠.
-박지후 배우와의 호흡은 어떠셨나요?
제가 <벌새>를 못 봤었어요. 지후 배우에 대해서도 얘기만 듣다가 현장에서 처음 봤는데 너무 흡수가 잘 돼 있어서 놀랐어요. 나만 잘하면 되는구나, 내가 누굴 걱정하나 싶었죠(웃음). 지후 배우는 은영으로서 그 현장에 있었고, 호흡을 맞춰볼 수 있어서 너무 좋은 경험이었어요.
사진제공 찬란.
-촬영 현장에서 여성 배우들 간의 끈끈함, 연결감도 느끼셨나요?
현장에서는 희주에 몰입할 수 있도록 그런 걸 최대한 끊어냈죠(웃음). 선배님이랑 하하호호 하면 감독님이 얘기 좀 많이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제가 웃으면 또 계속 웃는 타입이라 연기를 하면 티가 나더라고요. 현장에서 깔깔거리면 감독님이 ‘시은씨, 조금만 자제해’ 그러셨죠. 그래서 절제하느라 배우들끼리의 연결감은 잘 못 느꼈어요. 그래도 관객으로서는 뿌듯함을 느껴요.
-여성영화의 흐름이 최근 몇 년간 계속해서 이어져 오고 있는데 <빛과 철>도 그 안에 속하는 것 같아요. 배우 분들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긍정적인 기운을 느끼셨나요?
혜란 선배도 그런 면에서 좋아하셨고 얘기도 많이 하셨어요. 여자 셋이서 주인공으로 끌어갈 수 있다는 것에 자긍심을 갖고 계시죠.
-아무도 몰랐던 진실을 희주와 영남이 함께 발견하며 끝을 맺는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희주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나가길 바라시나요?
이건 환상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를 짓눌렀던 짐을 조금은 덜어내고 가벼워진 모습을 보고 싶어요. 내가 됐든 타인이 됐든 누군가를 향해 화살을 겨냥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희주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길 바라요.
-배우님 마음에 가장 깊게 남아 있는 대사는 무엇인가요.
“왜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어?”라는 대사요. 영남에게 하는 말인데, 영화 초반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던 희주와 연결되면서 응축된 감정을 잘 전달하는 대사인 것 같아요. 이외에도 희주의 심리를 보여주는 좋은 대사들이 많아요. “저 이제 도망 안 가요”도 그렇고.
-<빛과 철>은 진실과 이면, 의심과 확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인 것 같아요. 영화를 통해 전달되기를 바라는 메시지가 있다면요?
가장 많이 생각났던 단어는 죄책감이었어요.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죠. 희주는 끝을 모르고 달려가는 인물이잖아요. 죄책감에서 해방되고 싶어 몸부림치는 과정을 보는 것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것을 통해 새롭게 느끼는 게 있을 거예요.
〈빛과 철〉 스틸컷
-“작품마다 나도 모르게 어떤 마음들이 담긴다”고 하신 바 있지요. 이번 영화에는 어떤 마음들이 담겼는지 궁금해요.
희주랑 좀 비슷했던 것 같아요. 현장에서 고군분투했어요. 그때는 희주와 닮아있다는 생각을 못 했는데, 지나고 나니까 외로웠던 것 같기도 해요. 잘 해내고 싶었고 그러다 보니 부담이 됐죠. 뭘 해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해내야 돼! 사람들한테 보여줘야 해!’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또 내 맘대로 잘 안 되니까 자책하고. <빛과 철> 이후에 배우로서의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 됐어요. ‘계속 배우를 해도 될까?’라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질문을 던졌죠. 20대의 저는 막 달려왔다면, 30대는 천천히 가자는 마음가짐을 갖게 됐어요.
-그 전에는 열정적으로 달려오셨던 건가요?
의욕이 앞섰고 두려움이 없었어요. 근데 큰 산을 한번 넘어보고 나니까 다음 산을 잘 타기 위해 준비과정을 단단히 해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상을 찍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산길을 한 발짝 한 발짝 잘 올라가고 싶어요. 20대 초반에는 연기가 마냥 재밌었고, 중반 때는 일이 많아지면서 재미가 없어지는 시기가 오더라고요. 내가 가진 재능으로만 하려니까 자꾸 부딪히고 한계가 있는 것 같았죠. 그러다 보니 연기가 갑자기 뿌연 안개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근데 지금은 조금씩 걷히고 있는 것 같아요. 연기가 다시 재밌어졌어요. 그런 과정을 밟고 있는 제가 좋아요.
-처음에 연기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어요?
큰 계기는 없었어요. 재밌어서 시작했죠. 그러니 그 재미가 없어졌을 때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하지만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직업이 늘 재밌을 수는 없는 거지. 취미가 아닌데 뭐가 그렇게 재밌겠어’라고 생각했죠. 그러다 <빛과 철>을 만난 후 좌절의 쓴맛을 보고 그간의 배우 인생을 돌아보게 된 거예요. 연기를 잘한다는 건 무엇이고, 또 인물 안으로 들어가는 건 뭔지 제대로 알고 싶어졌어요. 지금은 찾아가고 있는 과정인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빛과 철>은 제게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이에요.
-올해 계획은 무엇인가요?
작년에 최창환 감독님 작품을 두 개 하고 하반기에는 뭘 안 했어요. 그래서 잘 쉰 만큼 올해는 다양한 작품을 하고 싶어요. 작품 하나하나가 소중하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어요. 작은 역할이든 큰 역할이든 열심히 해볼 생각입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사진제공 찬란.
-여성영화 추천작을 말씀해주세요!
<피아노>(제인 캠피온, 1993) 참 좋아해요. 캐릭터가 마음에 들어요. 손가락이 잘려서 자기가 정말 사랑하는 피아노를 못 치는 지경까지 돼도 ‘네가 내 손가락을 자른다고 해서 내 마음까지 없앨 수는 없어!’라고 말하는 눈빛. 음악도 너무 좋아서 지금도 자주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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