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퍼플레이가 만난 사람들
손 놓지 않기
<너와 나 사이에> 김윤겸 감독
퍼플레이 / 2024-04-05
#세상을_바꾸는_여자들 2024.3.28.|김윤겸 감독을 만나다 |
너와 나 사이엔 때로 상상도 못 한 거대한 우주가 존재한다. 그 넓고 넓은 우주를 건너 너와 내가 맞닿을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김윤겸 감독의 다큐멘터리 <너와 나 사이에>는 설령 그 우주를 건너지 못하더라도 너의 손을 놓지 않겠다는 다정한 마음이 중심을 이룬다.
2년간 대학 내 반성폭력 운동을 이끌다 손을 뗀 감독은 우울감과 혼란을 겪다 할머니를 찾아간다. 그에게 할머니는 “시대의 어려움을 몸으로 겪으며 이겨낸 멋진 여성”이었다. 그렇기에 할머니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거라고, 자신을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입에서는 예상치 못한 차별의 언어가 흘러나왔고, 이에 감독 또한 당황하고 놀란다. 하지만 그는 할머니와의 대화를 계속해서 시도하며 결국 자기 마음대로 할머니를 정의 내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너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우주를 인정하고, 단정 지어 생각하는 것을 멈추기로 결심한 김윤겸 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너와 나 사이에> 스틸컷
-이번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구상 단계에서부터 저희 할머니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작품과 별개로 제가 처음에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찍었던 사람도 할머니였어요. 제 삶과 밀접하게 연결돼있는 분이라 항상 많은 영향을 받거든요. 차별에 대해 말한다면 우리 할머니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영화를 만들수록 제가 처음에 생각했던 느낌의 영화와 달라졌어요. 손녀로서 할머니를 단편적으로만 바라보던 관점이 깨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원래 할머니와 친분이 두터운 편이신가요?
네, 할머니 손에서 자라 지금까지 엄청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그래서 누군가를 찍는다면 당연히 할머니가 1순위가 되겠구나 생각했죠.
-이번 영화를 촬영하면서 특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제가 할머니 댁에 가서 뭔가를 찍긴 찍는데 할머니는 그게 정확히 뭘 하는 건지 모르는 상태셨어요. 그래서 카메라에 찍힌다는 감각 없이 계시다가 완성본을 보여드리니까 놀라시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고 할머니는 어떤 의식도 하지 않고 저와의 대화에 충실하셨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럼 영화를 찍기 전에 구체적인 설명을 안 드리셨나요?
네, 저도 이 영화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몰랐거든요. (웃음)
-할머니와의 대화를 찍는다는 게 핵심이었던 건가요?
‘차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당시 이슈였던 여성가족부 폐지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엄청 치밀한 계산을 했던 건 아니었어요.
-감독님이 할머니에게 음성 편지를 보내는 방식으로 내레이션이 진행되는데 그러한 방식을 활용한 이유가 있을까요?
그때 당시 처음으로 할머니와 떨어져서 다른 나라에서 공부하게 된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어떤 말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영화를 기획할 때부터 글을 활용하고 싶었는데, 할머니가 60세 이후에 퇴직하시고 나서 글을 쓰셨거든요. 할머니가 활자랑 친숙하니까 글을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에 편지를 쓰게 됐어요.
김윤겸 감독 ⓒ퍼플레이
-할머니와의 대화가 감독님에게도, 할머니에게도 많은 것을 남겼을 것 같습니다. 작업을 마무리한 후 두 분에게 무엇이 남았을지 궁금합니다.
처음으로 한 사람을 다각도로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을 했어요.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이전의 기억들을 복기해보니, 지금까지 살면서 누군가를 이토록 다각도로 보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물론 여전히 모르는 부분이 많고,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낯선 면들을 보다 보니 이전보다는 더 잘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족분들도 함께 영화를 보셨나요?
제가 할머니에게 보여드릴 때 할머니와 스무 살 차이 나는 막내 여동생, 그러니까 저에게는 막내 이모할머니죠. 그분과 할머니가 영화를 함께 봤는데 이모할머니가 느끼시는 건 또 다르더라고요. 저보다 할머니를 훨씬 오랫동안 지켜보신 분이라 할머니가 가장으로서 멋있고 용감하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할머니가 갖고 있는 차별적인 부분도 몸소 체험하셨기 때문에 그게 영화에 잘 드러났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영화에서 할머님이 하시는 말씀이 차별의 언어와 맞닿아 있잖아요. 그 말들을 들으셨을 때 심정은 어떠셨나요. 발화 주체가 할머니라는 점에서 더 힘들고 당혹스러우셨을 것 같기도 합니다.
솔직히 화가 났어요. ‘왜 이렇게 말씀하시지? 이걸 찍어야 하나?’라고 생각하다가 할머니는 대체 왜 이렇게 이야기하게 됐을까 이유를 찾기 시작했어요. 할머니가 1935년생이시고 일제강점기 때 태어나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오신 분이라, 그 복잡한 사회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강자의 논리에 서는 것이 안전한 길이라는 걸 체득한 것 같아요. 지금은 윤석열이지만 당시에는 박정희였을 거고, 또 지나서는 전두환이 됐겠죠. 그렇게 강자의 논리를 답습하다 보니 지금의 저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할머니는 당연하게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할머니가 미워지지 않더라고요.
-세상을 살다 보면 나와 다른 가치관이나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잖아요. 이들을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존중해 나가면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감독님이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화가 나거나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관계를 끊지 않으면 좋겠어요. 시간이 지나면 그 감정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게 되고 오히려 더 깊은 이야기를 하게 될 수도 있거든요. 우리가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싸우게 되더라도 ‘손절’만 하지 않으면 그 관계는 어떤 방식으로라도 긍정적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히나 가족인 경우에는 더더욱 그럴 수 있지 않나 생각해요. 저도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에 아버지와 마찰이 심했고 대화를 하다가 싸운 적도 많아요. 그런데 계속 이야기하다 보면 결국에는 통하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빠도, 저도 둘 다 화내지 않고 서로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어요.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무엇인가요?
오프닝이요. 할머니가 저 멀리서 천천히 걸어온 뒤에 아파트로 들어가는 장면이에요. 인터뷰할 때는 항상 바스트샷이나 풀샷으로 찍어서 할머니가 그렇게 작은 존재로 보인 적이 없어요. 어느 날 할머니를 기다리다가 걸어오시는 걸 우연히 발견하고 촬영한 장면인데 저에겐 아주 큰 존재인 할머니를 그토록 작게 보는 경험이 처음이라 좋았습니다.
-앞으로 보여줄 작품들을 통해서는 어떤 이야기들을 해나가고 싶으신가요?
지금 작업 중인 작품은 ‘마이크로스코픽 월드’입니다. 저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예요. 어머니가 연구원이셔서 현미경 보는 일을 하는데, 현미경으로 보는 것처럼 모녀 관계를 세세하게 들여다보고 싶어요. 어머니와 어렸을 때부터 떨어져 살아서 그런지 서로에 대한 갈등이 쌓여 있고 애착 관계도 건강하지 못해요. 제 서사를 통해 여태 그려지지 않았던 모녀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올해 12월에 완성해서 내년부터 상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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