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퍼플레이가 만난 사람들
그 누구의 연인도 아니었던,
<만인의 연인> 한인미 감독
퍼플레이 / 2022-12-07
#세상을_바꾸는_여자들 2022.11.29.|한인미 감독을 만나다 |
한인미 감독 필모그래피 2022 <말이야 바른 말이지> 감독 2022 <만인의 연인> 감독 2015 <만년설> 감독, 각본, 편집 2015 <토끼의 뿔> 감독 2015 <대세는 백합> 감독(공동 연출) 2013 <마침내 날이 샌다> 감독 |
<만인의 연인> 스틸컷
열여덟 소녀 유진(황보운)은 쉽게 웃지 않는다. 자신을 향한 부당한 비난에는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운다. 큰 키에 다부진 얼굴은 인물의 꼿꼿한 성정을 보여주는 듯도 하다. 지방의 소도시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는 언뜻 보기에도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또래 무리와 어울리지 못하고 어디에도 적을 두지 못한 채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다니는 모습에선 어떤 체념의 태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도 주변인이 하나 둘 생기고 욕망을 느끼는 대상이 나타나면서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진다. 그로 인해 유진이 맞이하게 될 결말은 과연 해피 엔딩일까 새드 엔딩일까?
한인미 감독의 장편 데뷔작 <만인의 연인>(2022)은 여성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부모로서 자식을 돌보는 ‘본분’을 개의치 않는 엄마 때문에 유진은 일찍이 홀로 서는 법을 배웠다. 자식보다는 자신의 사랑이 먼저인 엄마를 보며 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자신에게 찾아오는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까. 여러 단편을 통해 여자아이의 세계를 그려왔던 한인미 감독은 “이제 10대의 시절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 됐다”며 열여덟 소녀의 삶과 욕망을 영화에 담아냈다. 유진의 서툰 사랑은 때론 벅차고 때론 신비롭고 때론 잔인하다. ‘그 누구의 연인도 아니었던’ 만인의 연인을 탄생시킨 한인미 감독을 온라인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개봉 소감이 어떠신지요.
시나리오 쓰고 영화 찍고 개봉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그 과정에서 도움받을 일이 정말 많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요. ‘운이 좋아서 좋은 분들을 만나 개봉까지 하는구나’ 싶습니다. 여러 분들에게 감사해요.
많이 반가워해주시고 응원해주셨어요. 제 단편들을 봐주고 오래 알고 지낸 분들은 ‘너의 색과 인장이 묻어있는 작품’이라는 말씀을 공통적으로 해주시더라고요.
여러 학교와 엔터테인먼트의 배우 프로필을 보면서 신인을 물색했어요. 그러다 황보운 배우를 발견했죠. 눈빛과 표정이 정말 좋았어요. 그래서 이분의 필모그래피를 찾아봤는데 아직 작품이 없어 빨리 만나봐야겠다 싶었습니다. 처음 봤을 때 걸음걸이도 씩씩하고 훤칠해서 매력적이고 멋있었어요. 당당한 아우라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만인의 연인> 시나리오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유진과 자신을 어떻게 연결시켰는지에 대해 대화를 나눴는데, 본인도 어릴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많이 해서 사회생활과 연애 경험이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유진에게 공감했고 그만큼 아팠다면서 자신의 이야기도 나눠줬죠. 그때 보여준 표정과 말투가 유진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러고도 바로 캐스팅하지는 못했어요. 배우에게 이 작품이 첫 장편 영화라는 게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였죠. 하지만 유진이라는 인물은 꾸밈없이 소화해내야 하는 캐릭터였고, 황보운 배우가 순수하고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끝에 함께하게 됐습니다.
캐스팅이 확정되고 나서 거의 매일 사무실에 놀러왔어요. 같이 밥을 먹거나 시나리오 얘기를 했죠. 제가 시나리오를 쓸 때 참고했던 영화들을 추천해줬는데 그걸 보다 가기도 하고요. 그렇게 스태프들과 친해지는 시간을 가지면서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되었고, 덕분에 현장에서 편하게 작업할 수 있었어요.
한인미 감독 ⓒ시네마달
-시나리오를 쓰면서 어떤 영화를 보셨나요?
카트린느 브레야의 <팻 걸>과 아녜스 바르다의 <방랑자>를 봤어요. 굉장히 좋아하는 영화예요. 두 영화를 봤을 때의 충격이 제게 감각적으로 배어있거든요. 그래서 단편 작업을 했을 때도 그렇고 이번 작품 시나리오를 쓸 때도 영향을 받은 게 있어요.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꺾이지만 굉장히 날 서 있는 느낌이나 주인공들의 눈빛과 당당한 태도를 참고했죠.
이전에는 제가 소녀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이유를 몰랐어요. 그런데 작품들을 모아놓고 보니, 전부 어떤 시기에 주인공의 세계관이나 가치관이 변하는 순간을 포착하는 영화들이더라고요. 이제 어느 정도 나이를 먹어서 10대의 이야기도 다룰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거리를 두고 그 시기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거죠.
유진의 소외를 보여주기 위해서예요. 유진은 예전부터 엄마와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여러 차례 지역을 옮겨 다녔을 거라는 전사를 썼었죠.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3~4년 정도 대구에서 살았어요. 부모님이 대구에 거주하고 계셔서 20대 초반에도 잠깐 살았고요. 덕분에 대구 사투리의 디테일을 살릴 수 있겠다 싶었죠. 대사를 쓸 때 지인들을 모델 삼아 말투를 빌려 썼는데 사투리가 잘 나오더라고요.
<만인의 연인> 스틸컷
-고립돼있던 유진에게도 주변인(피자집 점장, 혜선, 강우, 현욱 등)이 생기며 세계가 점차 확장됩니다. 그런데 그 결말이 비극에 가깝죠. 그럼에도 영화는 어둠에 묻히지 않고 희망을 엿볼 수 있는 밝은 분위기에서 마무리돼요. 그 과정에서 유진은 무엇을 배웠고 또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요?
유진은 혜선과 함께 지내면서 때로는 실망하고 또 서로를 응원하면서 성장해나가지 않을까요.
혜선은 어릴 때 부모님을 사고로 여의면서 스스로를 챙기는 것이 훈련된 사람이에요. 그것이 참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알고요. 그래서 지금 유진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죠. ‘나의 이기적인 면이나 치부를 솔직하게 얘기했을 때 과연 누가 미워하지 않고 받아들여줄까?’라는 궁금증이 있는데, 환상에 가깝지만 영화 안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혜선은 좋은 사람, 멋있는 사람, 그릇이 큰 사람인 거죠.
이해되지 않거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경험의 인과를 찾고 답을 만들어 소화해내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써왔는데, 그중 하나인 것 같아요. 과거에 아르바이트를 할 때 함께 일하던 분이 배달 사고가 난 적이 있어요. 제가 전화를 받았고, 그날 돌아가셔서 장례식을 다녀왔었죠. 매일 보던 사람의 생과 사가 그렇게 갈렸다는 게 참 이상했어요. 또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슬픔을 느끼지 못했고요.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고민도 많이 했는데 그때의 경험이 제 안에 여전히 남아있어 영화를 통해 풀어내게 된 것 같아요.
(여성이) 성적 욕망이나 경험을 발화하는 것을 억누르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전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여성 캐릭터는 대체로 남성 주인공의 화풀이 대상이 되거나 성폭력 피해자로서 고통을 겪는 존재로 표현돼왔죠. 그런 식의 대상화가 항상 아쉬웠고, 여성의 욕망을 부자연스럽게 여기거나 그에 대해 죄책감을 갖게 만드는 게 안타까웠어요. 여성의 욕망에 대해 좀 더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러려면 대중 콘텐츠에서 많이 보여야겠다 싶었죠.
<만인의 연인> 스틸컷
-영선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죠. 영선은 기존의 미디어에서 묘사하는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엄마’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어요. 자신의 사랑을 위해 집을 떠나거나 딸을 돌보지 않는 모습은 낯설기도 했는데요. 영선을 그런 인물로 그리게 된 이유가 있나요?
영선을 무책임하고 사랑의 결핍이 있는 사람으로 볼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영선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영선은 홀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인데, 그 상황에서 자신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충만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가 생긴다면 정말 소중하지 않을까요. 물론 영선이 비판받을 만한 지점이 있긴 하지만, 누군가를 그토록 열렬히 좋아하는 것이 자신의 삶에 충실한 방법 중 하나일 수 있잖아요. 영선은 엄마라고 해서 연애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인 거죠.
비록 집을 떠나지는 않았더라도 사랑에 열정적인 사람이었을 거예요. 이 사회의 기준을 적용했을 때 유진의 눈에 영선은 매번 (결혼에) 실패하는 사람으로 보였겠죠. 하지만 영선은 계속해서 연애를 하는 사람일 뿐이었던 거예요.
인생이란 계속 걸어 나가야 하는 것이잖아요. 그들 나름대로 후회하지 않을 만한 최선의 방법을 씩씩하게 선택해나가면 좋겠어요.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들로 자신의 주변을 채우며 잘 살아가겠다는 다짐이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지금의 저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해요.
스태프분들이 시나리오를 처음 읽고 주신 피드백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2~30대 여성분들은 공감뿐만 아니라 용기가 난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관객분들도 그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10~20대 여성이 욕망을 표현하는 데 있어 보수적인 방향으로 가는 측면이 있는 것 같은데, 유진을 보며 ‘이런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2~30대 남성분들은 ‘그 시절의 소녀들이 그랬구나’라는 반응을 보여주셨고, 강우를 욕하거나 현욱에게 이입을 해주시더라고요. 경험이 많고 이 시기가 어렴풋하신 연령대의 분들은 풋풋하고 좋은 한 때라고 봐주셨고요. 하지만 영화를 어떻게 보든 그건 관객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관객분들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한인미 감독 ⓒ시네마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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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 미래의 여성 그리고 영화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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