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퍼플레이가 만난 사람들

고백과 선언, 그리고 위로

<나는 문제라곤 없는 여자> 재원 감독

퍼플레이 / 2024-04-05


#세상을_바꾸는_여자들
2024.3.28.| 재원 감독을 만나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어 덴마크에 갔다. 낯선 공간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상관없었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일하고 파트너와도 같이 살다니. 그녀는 생각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월경을 안 한다는 것만 빼고 말이다. 그녀는 되뇌었다. ‘그럴 리가 없다.’ 

재원 감독의 극영화 <나는 문제라곤 없는 여자>는 임신중단을 이야기한다. 임신중단은 사회의 관점에 따라 여성의 권리가 되거나 죄악이 된다. 한국에서는 2019년 낙태죄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났지만 후속 입법이 진행되지 않았고, 여성에게는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자유와 안전이 보장되지 않고 있다. 임신중단을 하는 여성에 대한 시선도 여전히 따갑다. 이에 영화는 주장한다. ‘여자에겐 어떠한 문제도 없다’고. 감독은 본인의 경험을 말함으로써 일종의 선언을 하는 동시에 다른 여성들에게도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자신의 드라마를 경험하고 있는 여성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하면서 작업하고 있는데 결국 어떤 말을 해주기보다는 안아주고 싶어요. 작품으로 그들을 안아주는 게 저의 목표예요.”

<나는 문제라곤 없는 여자> 스틸컷

-이 영화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처음에 프로젝트 제안을 받고 뭘 해야 할지 막막했어요. 그러다 어떤 시위에서 쓰인 팜플렛 뒷면에 적힌 ‘차별금지 사유 24가지’가 떠올랐어요. 이러이러한 것에 있어 차별하면 안 된다는 내용이었죠. 키워드를 하나씩 보면서 이 단어들 중 나와 연관 있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고 있는데 ‘임신·출산과 관련하여 차별하면 안 된다’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어요. 타지에서의 임신중단 기억을 이제는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혼자였다면 이야기하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 또래 여성 퀴어 페미니스트들과 함께한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 거라는 신호를 받았어요.

-그럼 그때부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하신 건가요?
네, 저에게는 이 작업이 선언의 의미도 갖고 있었어요. 아무한테도 얘기할 수 없었던 것을 이제는 말한다는 게 컸죠. 발화한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주인공을 설정한 뒤 촬영해보면 어떨까 싶어서 시나리오 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실까요?
작년에 성소수자부모모임에서 공동체 상영을 한 적이 있는데, 그분들의 팬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제 작업이 임신중단에 관한 것이라 부모 모임에서 상영한다는 게 너무 두려웠어요. GV에서 어떤 질문을 받을지 떨리고 걱정됐죠. 그런데 제일 걱정했던 그 상영회에서 가장 큰 위로와 힘을 받았어요. 세대별로 임신중단에 대해 여성으로서 느끼는 감각이 다른데, 그 안에서 그런 이야기들이 활발하게 오가고 힘이 되는 말씀들을 많이 해주셔서 그 순간이 이번 작업을 하면서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반응이 있나요?
저희 윗세대는 국가가 임신·출산에 개입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국가 주도하에 그런 일(임신중단)이 있었어”라고 툭 던지듯이 이야기해주시는 것도 재밌었어요. 저희는 낙태죄 헌법불합치 이전까지는 임신중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자유롭진 않았거든요. 같은 나라에 사는 여성인데도 세대별로 느끼는 감각들이 이렇게 다르구나 싶었죠. 그리고 저희의 작품을 보고 “너희 세대는 부모 세대보다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겠구나. 희망을 본 것 같다”고 말씀해주신 게 기억에 많이 남아요.

재원 감독 ⓒ퍼플레이

-영화 제목이 ‘나는 문제라곤 없는 여자’인데 이 안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아요. 
서두에 얘기했던 것처럼 이 작업의 목표는 고백하는 것이었어요. 내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말하면서 내 안에 응어리진 것을 해소한다는 목표가 있었죠. 또 제 영화를 보고 많은 분들이 자신을 움츠러들게 하는 경험들을 말할 수 있으면 좋겠고 위로가 되길 바랐어요. 그래서 저에게 이 제목은 일종의 선언이에요. 우리 사회는 임신중단을 죄악시하거나 임신중단 하는 여자를 문제 있는 사람으로 만들곤 하는데 그것을 가볍게 넘기고 싶었어요. ‘나에게 이런 일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문제 있는 사람은 아니야’라고 선언하고 싶었습니다.

-영화의 처음과 끝이 담배를 피우는 주인공으로 장식됩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다른 곳을 바라보다 정면을 응시하는데요, 그 장면을 통해서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으셨나요?
극영화에서는 배우가 카메라를 보면 안 된다는 일종의 법칙이 있잖아요. 그 룰을 계속 지키다가 마지막에는 깨고 싶었어요. 관객을 직접적으로 바라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남처럼 여겨지던 주인공과 눈을 맞추면서 발생하는 질문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문제라곤 없는 여자’라는 제목과 연결하자면, 관객들이 이 여성에게 과연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런 식의 질문을 하고 싶었어요.

-이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은 무엇인가요?
주인공이 누워서 “여자가 무슨 자웅동체도 아니고”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어요. 고요하게 있던 ‘그녀’가 거의 처음으로 말하는 장면이기도 한데요, 짜증 나는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죠. 제가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미국의 연애 프로그램을 봤는데 거기선 출연자들이 임신중단에 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하더라고요. 그 문제에 어떻게 생각하냐고 질문을 던지고요. 누군가는 여성이 감당해야 하는 징벌인 것처럼 말하기도 했어요. 강간에 의해 임신이 된 경우에는 임신중단에 동의하지만 그게 아닐 경우 자신이 잘못한 것이니 낳아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더군요. 그럼 임신에 함께 책임이 있는 남성들은 어디로 가는 건가요? 그들은 왜 소환되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 들면서 분노했죠. “여자가 무슨 자웅동체도 아니고”라는 대사는 이런 억울함과 분노를 담은 거예요.

-감독님이 영화를 통해 “그녀의 이야기를 드라마라 부르고 싶지는 않다”고 하셨지만, 현실에는 다양한 여성들이 자신만의 드라마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이 작업은 저의 고백이자 선언이기도 했던지라 끝나면 후련할 줄 알았어요. 활동가분들과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괜찮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라는 말들이 머리로는 받아들여지는데 마음은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아요. 이 작업 이후에 GV를 다니면서도 임신중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심장이 너무 떨렸어요. 잔여 감정이 남아있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 끝날 줄 알았던 이야기를 연장해서 새로운 작업을 하고 있어요. 임신중단이 사회의 관점에 따라 괜찮은 것이 되기도 하고, 죄가 되기도 하잖아요. ‘Shout Your Abortion’이라고 해외에서 임신중단 운동을 하는 단체가 있어요. 당사자들이 자신의 임신중단 경험을 말하는데, 괜찮다고 하면서도 느끼는 수치심, 죄의식, 죄책감이 있어요. 그 감정들을 세밀하게 다뤄보고 싶어요. 자신의 드라마를 경험하고 있는 여성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하면서 작업하고 있는데 결국 어떤 말을 해주기보다는 안아주고 싶습니다. 작품으로 그들을 안아주는 게 저의 목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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