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이미화의 영화처방] 내가 걷는 길만 유독 길고 험하다고 생각하는 당신에게
<와일드>
이미화|에세이 작가 / 2020-10-15
누군가 나의 기분을 이해해주기를 바란 적 있나요? 나와 꼭 닮은 영화 속 주인공에게 공감했던 적 없나요? 영화를 통해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고 또 위로와 공감의 말을 건네고자 합니다. 위안이 필요한 순간, 이미화 작가의 ‘영화처방’을 찾아주세요. |
〈와일드〉 스틸컷
걷는 걸 좋아하시나요? 나는 오래 걸을 수 있는 튼튼한 다리를 가진 덕에 자주 걷습니다. 엉켜버린 고민의 실타래를 풀고 싶을 때면, 그곳이 여행지이든 집 앞이든 일단 걷고 보는 인간이지요. 걷고 걸어 고민의 끝까지 도착하고 난 후에야 집으로 돌아오는, 그래서 산책이라기엔 어딘가 과격한 구석이 있는 나의 오래된 습관입니다.
내게 무턱대고 걷는 습관이 생긴 건, 밤이 눈처럼 내려앉던 베를린의 겨울을 겪고 난 후였습니다. 세시부터 해가 지는 독일의 겨울은 몸과 마음을 척박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해를 보지 못하면 비타민 부족으로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독일 사람들이 왜 이가 딱딱 부딪히는 추운 날에도 해만 나면 코트를 껴입고 밖으로 나가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습니다. 해만 나면 밖으로 나가 길을 걸었습니다. 약속시간보다 한두 시간 먼저 집을 나서기도 했고, 약속이 없는 날에도 부러 운동화를 꺼내 신었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걷는 길이 어색했지만 곧 나 자신과 대화를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성격을 형성한 결정적인 사건들, 지금은 연락하지 않게 된 사람들과의 관계, 현재 나를 둘러싸고 있는 크고 작은 사건과 상황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옛 기억을 더듬어가듯 나를 떠올려보았습니다. 그렇게 나 자신에 집중하며 길을 걷다보면 고민이나 문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습니다.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건 문제 자체일 때보다 문제를 대하는 나 자신일 때가 많다는 것을요.
〈와일드〉 스틸컷
“왜 여기 왔어요?”
“잘 모르겠어요. 단지 제 자신 속에서 무언가를 찾고 싶어 왔어요. 그런 거 있잖아요. 제 생각엔 이 길이 그런 점에서 좋은 것 같아요.”
걷는 존재라면 한번쯤 꿈꾸어보았을 산티아고 순례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PCT라고 불리는 태평양 종주길을 걷는 사람이 있다는 건 영화 <와일드>(장 마크 발레, 2014)로 알게 된 사실입니다. 주인공 셰릴은 PCT를 걷는 많은 사람들과 비슷한 이유로 길 위에 섭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고통을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마주하기 위해 수천 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걷는다는 점입니다. 2분마다 그만두고 싶어지는 사막과 암반, 가파른 산길과 무릎까지 쌓인 눈밭을, 제 몸만 한 배낭을 메고 걸으며 셰릴은 과거의 고통과 기억을 마주합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엄마의 죽음을요.
셰릴은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의 삶을 완전히 놓아버립니다. 마약을 하고 남편 이외의 남자들과 잠자리를 가지면서 엄마와의 기억까지 모두 잊어버리는 것. 그것이 셰릴이 선택한 고통을 잊는 방법이었지요. 다정한 남편과도 헤어지고 누군가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셰릴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보통의 좋은 사람으로 돌아가기 위해 PCT에 오릅니다.
〈와일드〉 스틸컷
‘단지 원치 않는 임신을 해서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다 서러워서, 그래서 울었다. 엄마가 죽고 난 뒤 내 스스로를 망쳐버린 이 더러운 시궁창이 싫어서, 어느새 내 자신의 모습이 되어버린 이 바보 같은 몰골이 싫어서 울었다. 나는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이렇게 처참하게 망가진 모습으로 살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그러다 문득 REI의 진열대에 놓여 있던 여행안내서가 떠올랐다. 표지에 박혀 있던,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거대한 바위산들에 둘러싸인 호수의 사진이 떠오르자 마치 주먹으로 얼굴을 강타당한 듯 무엇인가가 확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 <와일드> 셰릴 스트레이드
셰릴이 자신을 포기해버리는 방식으로 문제에서 도망가려 한다면, 나는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와의 관계가 틀어졌을 때, 노력해 온 일에 원하는 성과가 나지 않았을 때, 심지어 나의 잘못이 아닌 일에도 나는 ‘다 내 탓이야’라고 자책했습니다. 나만 한심한 사람이 되면 끝나는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지요. 그러다보니 문제는 그대로인데 나 자신에 대한 혐오만 쌓여갔습니다. 지금의 나를 만든 건, 그러니까 내가 나를 믿어주지 못하는 성격으로 자란 건 문제 자체가 아니라 문제를 대하는 방식 때문이었던 것이죠.
〈와일드〉 스틸컷
셰릴은 PCT를 걷는 내내 고통과 마주합니다. 아버지의 학대와 엄마의 죽음, 뿔뿔이 흩어진 가족과 이혼. 젊은 나이에 겪어야만 했던 인생 밑바닥의 경험들을. 9개의 산맥과 사막과 황무지와 암벽을 넘으며 깨닫게 됩니다. 문제 속에 빠져 발버둥 칠 것이 아니라, 실패의 고리 속에 갇혀 자신을 혐오하며 살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나은 자신을 찾기 위해 앞으로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요.
“대체 뭐가 문제야?”
“넌 뭐가 문젠데? 난 행복해. 행복한 사람들은 모두 노래를 불러.”
“엄만 왜 행복해? 우린 아무것도 없어, 엄마. 아무것도 없다고.”
“우린 사랑이 많잖아.”
“제발 그만해. 제발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 우린 둘 다 풀타임 식당 종업원으로 일한다고. 남은 날 동안 갚아야 할 융자도 있어. 가정폭력이나 휘두르는 술주정뱅이 개자식이랑 결혼해서. 그런데도 노래를 부르고 있어? 엄마가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대체 뭐야?”
“난 이해 못한 거 없어. 그렇다 쳐도 뭐가 문젠데? 셰릴,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어떻게든 가장 나은 너 자신을 찾는 가야. 쉽지 않아. 하지만 그만큼의 가치가 있어. 앞으로 지금보다 더 안 좋은 날들이 많을 거야. 그리고 넌 그 날들이 널 죽이게 내버려 둘 거고. 근데 난 모르겠어. 난 살고 싶거든.”
〈와일드〉 스틸컷
당연한 말이지만 걷기만으로 셰릴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떠나버린 엄마가 다시 살아나지도, 이혼한 남편과 다시 만나는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PCT를 완주한 후 보통의 삶으로 돌아갈 뿐이지요.
다만 이 한마디,
“문제는 영원히 문제로 남아있지 않아. 다른 것으로 바뀐단다.”
이 말이 있는 한, 셰릴은 또 다른 문제 속에 갇히더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을 겁니다. 내가 걷는 길만 유독 길고 험하다고 생각하는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 밤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조금 걸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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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을 잇는 공간 <영화책방35mm> 운영. 영화 에세이 『삶의 어느 순간은 영화 같아서』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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