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우리에겐 낭만부인이 필요하다

<미쎄스 로맨스>

유자 / 2020-06-25


<미쎄스 로맨스>   ▶ GO 퍼플레이
한병아|2017|애니메이션, 로맨스/멜로|한국|7분

<미쎄스 로맨스> 스틸컷

소설 『82년생 김지영』(조남주, 2016)의 주인공 지영은 종종 다른 사람이 된다. 언젠가부터 지영은 다른 사람에게 ‘빙의’한 것처럼 말하기 시작한다. 누군가의 아내, 엄마, 며느리가 되어 자신을 잃었던 그는 결국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빌어 자신을 지키고자 한다. 있는 듯 없는 듯 괜찮을 줄만 알았던 지영이 거침없이 말을 쏟아내자 주변 사람들은 기겁한다.

많은 여성 독자는 소설 속 지영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했다. 특히 자기 상실이라는 소설의 장치는, 일을 그만두고 남편과 아이의 뒷바라지를 하며 서서히 희미해져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는 평을 받았다. 소설이 많은 공감을 얻었던 이유는 그만큼 현실의 많은 기혼 여성들이 전통적인 성역할을 맡거나 맡도록 강요받으면서 자신을 잃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 ‘아줌마’라는 단어가 익숙해질 때면 이들은 젊은 날 자신이 무엇을 꿈꾸었는지, 어떤 낭만을 품었는지 종종 잊어버리거나 단념하고 만다.

<미쎄스 로맨스> 스틸컷

한병아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미쎄스 로맨스>(2016)는 이처럼 자신을 잃고 살았던 한 기혼 여성의 꿈과 사랑을 조명한다.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사는 주인공 국희는 소위 말하는 ‘아줌마’다. 그는 비 오던 어느 날, 창밖을 바라보다 깜빡 잠이 들고, 그렇게 꿈속에서 과거 스페인 여행의 추억을 떠올린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났던 연인 제시와의 로맨스를 회상하며 국희는 식어버린 꿈과 사랑에 다시금 불을 지피려 한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국희의 집은 잔뜩 어질러져 있다.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아이의 양말, 소파에 잔뜩 흘린 과자, 개지 않은 이불 등. 아이의 등교 후 덩그러니 남은 정돈되지 않은 공간은 퍽퍽한 현실로서 국희 앞에 버티고 서있다. 산더미 같은 집안일을 시작하기 전, 잠시 여유를 갖던 그는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다 그것이 떠올리는 달콤한 추억으로 빠져든다.

<미쎄스 로맨스> 스틸컷

홀로 여행을 간 스페인에서 그는 우연히 제시를 만난다. 눈을 마주친 국희에게 제시가 말을 건 것을 계기로 그들은 함께 도시를 거닐고 대화를 나누며 점점 친밀한 관계로 발전한다. 낯선 공간에서 서로를 향한 호감을 키워가던 그때의 설레고 농도 짙은 시간은 마치 영화 <비포 선라이즈>(리처드 링클레이터, 1995)의 한 장면 같았다.

국희는 처음엔 자신에게도 이러한 로맨스가 찾아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젊고 잘생긴 남자가 다가오자 경고라도 하려던 것이었을까. 국희는 제시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가장 먼저 자신이 ‘아줌마’임을 밝힌다. 국희의 생각처럼 기혼 여성을 표현하는 ‘아줌마’라는 단어는 실로 많은 가능성을 차단한다. 무한한 성적 가능성을 내포한 ‘아재 파탈’ 따위의 단어와 달리, 그것은 기혼 여성을 극성맞고 무례하며 성적 매력이 제거된 하나의 집단으로 뭉뚱그리기 때문이다. 아내, 엄마, 며느리로서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고립되었던 이들은 ‘아줌마’라는 단어로 여자로서의 욕망 또한 부정당한다.  

‘아줌마’라는 말로 거리를 두려하지만 국희의 예상과 달리 제시는 그 말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아이를 키우고 나이가 있는 여자라는 점은 제시의 사랑에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국희는 그의 기세등등한 사랑 덕분에 어느덧 자신마저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사랑과 꿈에 비로소 눈뜨기 시작한다.

<미쎄스 로맨스> 스틸컷

‘사랑과 낭만이 넘치는’ 카탈루냐 해변에서 서로를 향한 감정을 확인한 국희는 제시에게 고백한다.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아주 오래전부터 꿈을 꾸었는데 마치 한 번도 꿈을 이뤄본 적이 없는 것만 같다”고 말이다. 남편이 부재한 상황에서 홀로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던 국희에게 ‘꿈’이란 어쩌면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만을 위해 살던 그는 자신의 열정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왔을 것이다. 그런 국희가 갑작스레 이런 고백을 한 것은 제시의 사랑이 국희 자신에게도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음을 다시금 기억나게 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시는 국희에게 꿈을 꾸는 일은 꿈을 이루는 것보다 더 값진 것일지 모른다고 얘기한다. 그의 말은 비록 꿈을 이루지 못했더라도 그 상황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꿈을 좇는 것이 더 중요하고 값진 일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모든 것이 멈췄다고 생각한 순간, 제시의 말은 국희에게 다시 시작할 용기를 주었던 것이다.

<미쎄스 로맨스> 스틸컷

내리는 비에 녹음이 짙어질 때쯤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국희의 단잠은 그렇게 끝이 난다. “엄마, 게임해도 돼?” 아이의 질문에 너무나도 꿋꿋한 일상과 방금 전 꿈과의 괴리에 실소가 나오는 듯하지만, 국희는 이제 괜찮다. 꿈속에서 떠올린 그때의 추억을 계기로 그는 차갑게 식었던 사랑, 그리고 자신의 열정에 다시금 불을 지피기로 했기 때문이다.

잔뜩 어질러진 방 안의 벽장을 열어 국희는 오래도록 묵혀둔 자신의 열정과 마주한다. 벽장 안에는 예전에 국희가 쓰던 그림 도구들이 한가득 들어있다. 날이 맑게 갠 어느 날, 그는 미술관에서 그림을 구경한다. 그리고 그 모습 위에는 자신을 그리워하는 국희를 만나기 위해 서울까지 왔다는 제시의 전화 속 목소리가 들린다.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궁금해진다. 그 둘은 과연 재회할까. 그 여부와는 관계없이 제시를 만나러 가는 길과, 꿈으로 향하는 길이 겹쳐 보이면서 우리는 국희의 사랑이 꼭 이뤄지길 바라게 된다.

<미쎄스 로맨스> 스틸컷

한병아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꿈을 잃고 살아가는 수많은 여성들을 위해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희망과 성장의 용기를 전하고 싶다”고 밝혔다.1) 감독의 말처럼 <미쎄스 로맨스>는 국희의 성장을 통해 자기를 상실한 채 고립된 수많은 미쎄스에게 용기를 전하고 있었다. 

영화가 끝난 후, 어느덧 더 많은 ‘김지영’이 자신을 찾기 위한 여행길에 올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작품의 연출의도처럼 우리에겐 더 많은 낭만부인이 필요하다. 새로운 사랑, 새로운 인생을 과감하게 꿈꾸고 도전하는 그런 미쎄스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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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겨털소녀가 시련 속 당신을 응원합니다, 월간 <아이러브캐릭터> 2018년 11월호, 남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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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019 대학 교지편집부에서 활동. 재미있고 가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콘텐츠 제작자 지망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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