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磨斧作針)
<바느질 하는 여자>
김승희|영화감독 / 2020-04-23
<바느질 하는 여자> 스틸컷
연초 SNS 타임라인에 미국의 골든글로브 시상식 클립이 하나쯤은 올라온 날이 있었다. 바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날이다. 그런 경우 보통 해당 감독의 전작이 수상 후보에 오르거나 상을 받았던 영화제에서 축하 게시물을 SNS에 올린다. 그렇다면 어느 영화제에서 봉준호 감독의 수상 소식을 특히 더 축하했을까? 바로 미국의 슬램댄스영화제다.
슬램댄스영화제는 그 유명한 선댄스영화제의 대항마로 출발했다. 선댄스와 같은 시기, 같은 동네에서 열리니 보통 배짱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슬램댄스도 선댄스처럼 아카데미 인증 영화제다. 슬램댄스 출신 감독으로는 봉준호 감독을 비롯해 레나 던햄 감독 겸 PD,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아리 애스터 감독 등이 있다.
2020년 슬램댄스에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이름을 올린 두 명의 한국 여성 감독이 있다. 바로 <산>의 우진 감독과
<바느질 하는 여자> 스틸컷
첫 번째로 소개할 작품은 우진 감독의 2012년 데뷔작 <바느질 하는 여자>다. 제작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그의 작품 활동 기간은 이제 거의 10년에 달한다. 그 기간 동안 우진 감독은 같은 주제를 다뤄오고 있다. 이는 마부작침(磨斧作針)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마부작침의 도끼와 같은 것이 바로 <바느질 하는 여자>다. 이미 시작부터 도끼를 들고 나왔으니 영화에는 그만큼 날카로운 시선이 담겨있다 하겠다. 그도 그럴 것이 <바느질 하는 여자>는 2013년, 애니메이션 영화제로 손꼽히는 캐나다 오타와와 프랑스 안시의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선정된 바 있다.
그가 꾸준히 다뤄온 주제는 벗어날 수 없는 반복성, 규칙성, 보이지 않는 통제에 관한 것이다. 그의 애니메이션은 사회 시스템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바느질 하는 여자>를 보면, 하늘에서 계속 무언가가 떨어진다. 화면 중심에 자리한 인물은 떨어진 것의 속을 비우고 무언가로 그 안을 채운다. 그리고 바느질해 꿰맨 후 그것을 다시 위로 올려보낸다. 이 흐름은 계속된다. 이걸 본 사람들은 ‘저게 뭐 하는 거지? 왜 저런 행위를 하는 거지?’와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된다. 우진 감독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하던 행동, 당연하게 반복하던 습관들이 갑자기 낯설어질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 당연한, 혹은 남들이 다 하니까 의구심을 갖지 않는 행동들을 따로 떼어내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관객들이 그 행동을 낯설게 느끼도록 만들고 싶었어요. 저를 포함한 모두가 ‘그냥’ 하는 행동에 의구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바느질 하는 여자> 스틸컷
<바느질 하는 여자>에서는 시각적인 특징이 하나 있다. 캐릭터의 행위는 규칙적이나 그 행위를 표현하는 애니메이션은 불규칙적이라는 점이다. 우진 감독은 그러한 대조성이 바로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부분이었다며 조금 더 살을 덧붙였다.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캐릭터들이 규칙에 맞게 움직이는 것이 제가 작품을 통해 나누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규칙과 규범을 만들어 같은 행동을 반복하게 하는 건 사회의 안전 유지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구성원 모두에게 같은 것을 요구하여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행동하고 살아간다면 통제하기 정말 좋은 사회가 될 테니까요. 그리고 그게 사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틀이고, 우리는 그걸 강요받고 강요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그 틀을 최대한 날 것으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바느질 하는 여자> 스틸컷
화면 중심에 앉아 바느질하는 사람은 심판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사회적 심판자의 비유일까? 어떤 종류건 간에 그의 행위는 상당히 폭력적이지만, 그 반복적인 행동을 지켜보다 보면 시각적으로 무뎌지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폭력성에 무뎌짐을 깨닫는 순간을 감독은 관객에게 선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우진 감독은 그가 추구한 시각언어와 주제가 관객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어렵다고 생각해 10년이라는 작품 활동 기간 동안 연출을 부드럽게 다듬고 타협한 것이 어려운 작업이었다고 한다. 또 작품 활동으로 생계를 지속할 수 없을 때 오는 우울감과 불안감이 인간적으로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이 그저 좋으니 왠지 모를 희망이 생기고 포기했다가도 다시 작업하게 된다고 전했다.
<바느질 하는 여자> 스틸컷
같은 애니메이션 작업자로서 그의 고백이 마음에 내리꽂힌다. 생계가 걸린 작품 활동은 생존의 문제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작업을 하나씩 완성할수록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라고 느끼는 때가 적지 않다. 그렇기에 10년이라는 활동 기간은 더욱 의미가 깊다.
감독이 2012년 꺼내든 도끼 <바느질 하는 여자>는 이제 2019년 <산>이라는 작품을 통해 바늘이 되었다. 그는 작업을 잠시 멈추려던 마음을 접고 현재 운영하고 있는 개인 스튜디오 인스타그램 계정(@sewingbug_)에서 연재하는 루프 애니메이션들을 모아 단편을 만들기 위해 구상 중이라고 한다.
바늘은 천과 천을 이어준다. 영화는 세상과 세상, 마음과 마음을 이어준다. 우진 감독이 그의 작품들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나갈 작품들을 통해 시대와 시대를 이어주는 실과 바늘이 되어주길 바란다. 그가 깁는 한땀 한땀을 앞으로도 기대한다.
PURZOOMER
애니메이션 <심심> <심경> 등 연출, <피의 연대기> 애니메이션 작업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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