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없는 존재가 있는 존재가 되기까지
<있는 존재>
최민아 / 2020-12-17
〈있는 존재〉 ▶ GO 퍼플레이 박시우|2017|다큐멘터리|한국|17분 |
세상의 모든 것에는 저마다의 이름이 있다. 사물에도, 현상에도, 모든 개별의 것들은 무언가로 호명되고 사회는 이를 존재로서 규정한다. 이름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누군가로부터 부여받는 속성을 갖는다. 무명(無名)의 ‘상태’였던 것이 어떠한 의미에 따라 저마다의 이름을 받고 ‘존재’가 되기 마련이지만, 모두가 그대로 존재할 수만은 없다. ‘나’로서의 자신이 아닌 누군가로부터 주어지고 사회로부터 규정된 ‘이름’으로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를 스스로 재정의함으로써 본디의 ‘존재’로 살아가기를 택한다.
〈있는 존재〉 스틸컷
“아- 아-” 어둠 속 외마디가 조용히 울려 퍼진다. 어떻게 첫 마디를 떼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여기, 말을 시작하려는 이가 있다. 영화 <있는 존재>(박시우, 2017)는 FTM 트랜스젠더(FTM-female to male-transgender) 김도현의 말하기로 한 걸음씩을 내딛는다. 자연히 ‘없는 존재’로 살아왔지만, 순연히 ‘있는 존재’가 되기를 선택한 사람. 더는 숨어 살 수 없고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고 싶지 않았던 이의 당연한 선택, 그러나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것은 아닌 필연적 선택. <있는 존재>는 도현과 도현의 주변인들이 그 선택에 대해 말하는 영화이다. 그 말들은 도현의 이야기이기도, 각자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있는 존재〉 스틸컷
도현에게 성별이란 늘 물음표였다. ‘여성’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지만 스스로는 여성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남성을 좋아하는 것은 오히려 ‘여성’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기에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 이 모든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기엔 너무나 큰 의문이었다. 나는 무엇이고 나는 어떤 존재인지, 도현의 삶에 떨쳐낼 수 없었던 하지만 떨쳐내야만 했던 물음이었다. 도현은 그렇게 청소년기를 지나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계속되었고, 10대 후반 무렵 부모에게 커밍아웃했다.
어떤 감각으로만 느끼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고 싶었던 도현은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서고자 했고, 마침내 ‘FTM 트랜스젠더’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 ‘이름’을 알게 되었을 때 도현은 비로소 자신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그동안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나’와 만나는 경험이었다.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갖는 것은 곧 나의 존재를 찾는 것이었고, 이름이 있다는 것은 존재를 인정받는 것이었다.
〈있는 존재〉 스틸컷
카메라는 도현에게 줄곧 묻는다. 정체성에 대한 자각은 언제부터였는지, 정체성을 드러내는 게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그러면 도현은 카메라를 향해 답하기도, 마이크 앞에서 독백하기도 한다. 이처럼 이 영화에서의 발언은 기본적 질답의 인터뷰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물이 스스로 말할 수 있게끔 독백 형태를 빌리고 이를 감독과 주고받는 녹음 장면을 보여주며 다중적으로 나타낸다. 도현이 직접 쓴 글을 읽는 것은 자신에 대한 주체적 말하기가 되고, 영화의 내레이션으로 기능하며 영화적 말하기가 되기도 한다. 감독은 매개자로서 도현에게 말을 이끌어 내거나 스스로 목소리를 내게 하며 자신의 위치 또한 넘나든다. 이는 보다 적극적인 ‘말하기’가 되어 카메라-인물-관객 간 거리를 좁혀나가고 이해를 확장시킨다.
〈있는 존재〉 스틸컷
‘말하기’는 도현의 인생이기도 할 것이다. 자신을 인식하고 지금을 살아오는 과정 모두에 스스로 말하기가 있었으며, 이는 도현을 한 걸음씩 더 나아가게 하였다. ‘이름’을 가짐으로써 정체성을 찾고 혼란스럽던 지난날의 나도 ‘나’임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도현은 나는 퀴어라고, 나는 FTM 트랜스젠더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나를 찾고 스스로를 인정해나가는 과정이었다. ‘없는 존재’이고 싶지 않은 ‘있는 존재’의 당연한 이름 찾기. 도현은 ‘도현’이라는 이름을 가지며 전에 없던 나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본연의 ‘나’로서 그동안의 세계에 다시 다가서고 온전한 ‘나’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있는 존재〉 스틸컷
도현이 말하듯 세상에는 불편해도 알아야 하는 것이, 불편함을 느껴야 변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불편한 존재로서 세상이 이름 붙이고 규정한 무언가가 멀리 있지 않음을, 서로 다르지 않음을, 자신일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도현이, 그리고 영화가 말한다. 영화 <있는 존재>는 도현을 포함한 저마다가 ‘도현’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들, 그리고 도현과 함께 살아갈 앞으로의 시간들을 그리는 희망의 말하기이다. “나오고 싶은 대로 나와”라며 무심한 듯 내뱉는 카메라의 다정함과 이내 곧 스튜디오를 빠져나가는 도현의 모습에서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이들이 겹쳐 보인다. 영화 <있는 존재>라는 ‘말하기’를 통해 우리 모두는 한 걸음씩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PURZOOMER
인디다큐페스티발 사무국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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