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일기장

영화 속 그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엘로이즈, 마리안느의 일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정다희 / 2020-02-06


영화가 끝난 후 영화 속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혹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한 적 없으셨나요. <우리들>의 선이와 지아는 화해한 뒤 예전처럼 친한 친구 사이로 돌아갔을까요? <캐롤>의 테레즈와 캐롤은 한집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겠지요? 그들은 자신의 삶을 어떤 색깔로 채워가고 있을까요. 퍼줌이 상상력을 발휘해 쓴 그들의 뒷이야기, ‘그들의 일기’를 보여드립니다.


엘로이즈의 일기

177X년 X월 X일

28쪽. 초상화에 남겨서 다행이지만 책이 낡아 종이 귀퉁이가 떨어졌다. 숫자 부분을 이제 알아볼 수 없다. 그림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낡아 해졌지만 그 페이지는 눈감고도 펼칠 수 있다. 그림이 더 상하기 전에 다른 곳에 옮겨 그려야 할까? 마리안느가 아니라면 옮길 수 없을 테니 포기해야겠지. 책을 상자에 담아 봉해두었지만 자주 꺼내게 된다. 오늘 28쪽을 보고 있는데 방에 아이가 뛰어 들어와 책을 떨어트릴 뻔했다. 방에 들어오기 전에는 노크를 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는데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출산 직후 미끌거리고 얼룩덜룩했던 그 작은 덩어리를 마리안느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을 때, 그렇게 이름을 정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다시 생각해봐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사랑으로 창조하려 한 건 이게 아니었다. 이곳에서도 수소문하면 그녀를 다시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찾지 않았다. 기억은 기억에 머물러 있다.

밀라노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클라브생을 주문하는 일이었다. 남편은 내가 사는 물건이 무엇인지 제대로 묻지도 않고 무조건 사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는 자신의 부유함을 증명하고 싶어 안달 난 땅딸막한 남자였다. 그가 처음 내 손을 잡고 입을 맞췄을 때 꺼끌하고 찬 감촉에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야만 했다. 침실에서 그는 난폭하게 몇 번 허리를 흔들어대다 혼자 잠들었다. 나는 밤새 뜬눈으로 천장의 무늬를 세다 잠들곤 했다. 아이가 생긴 이후에는 그 핑계로 다른 방에서 잘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눈앞에 거울이 있었다. 나는 가끔 거울 앞에서 포즈를 잡았다. 그곳에서 나를 응시하는 건 나였지만 때로 마리안느의 얼굴이 보였다. 언젠가 내가 이마를 만지고 있는 걸 누가 지적해준 후 그 상상은 점점 강해졌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과 마주치면 그가 돌아보는 순간을 기다린다. 마리안느가 한 번 더 돌아본다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아직 마리안느를 보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하면서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를 불렀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에우리디케가 죽음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 속에서 시인을 사랑한 이야기여야만 한다. 하데스의 땅에 떨어지기 전 그와의 마지막 기억을 남기기 위한 작별 이야기.

아이를 위해 클라브생 선생을 부르기로 했다. 몇 번 내가 쳐보려고 했지만 마리안느가 치던 부분에서 늘 멈췄다. 오늘은 오랜만에 그 음악을 들으러 갔다. 운명이란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사람을 속이고, 다시 폭풍처럼 일어나 인생을 삼킨다. 삶은, 그 속에 휩쓸려서도 때로 빛나는 기억의 조각을 보며 일어나는 일이다.


마리안느의 일기

177X년 X월 X일

관현악단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이 출구로 쏟아져 나갔다. 나는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엘로이즈가 앉아있던 자리 근처 출구로 향했다. 비슷한 색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을 몇이나 봤지만 엘로이즈는 아니었다. 나는 모두가 빠져나간 자리에 섰다. 파도 소리가 듣고 싶었다. 파도 소리가 듣고 싶었던 건지, 엘로이즈가 보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아마 둘 다였다.

밀라노에서 제노바까지는 거리가 있었지만 프랑스로 돌아가기 전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바다를 보고 싶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해변에서 달리고 싶었다. 이제 쫓아갈 사람은 없지만, 그렇게 달린 지 몇 년이나 되었으니.

잠시 머무르고 있는 파르네세가 저택으로 들어가자 방에 쪽지가 있었다. 초상화를 의뢰하는 분이 있으니 내일 오후에 만나 달라는 내용이었다. 일정을 조금 미뤄야겠다. 코르셋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로켓을 꺼내 열자 그곳에는 늘 같은 표정의 엘로이즈가 있었다. 배가 고팠다. 로켓을 닫아 꽉 쥐었다. 손에 익숙한 무게와 형태가 느껴졌다. 언젠가부터 촉감으로 엘로이즈를 기억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로켓을 쥘 때, 타오르는 촛불 옆에 놓인 종이에 선을 그을 때, 드레스를 쓸어내릴 때. 모든 순간에 엘로이즈를 불러들일 수 있었다. 화실에서 내가 슬퍼 보였다고 한 학생은 무엇을 본 것일까. 기억 속에 살고 있는 건 슬픈 일일까.

눈을 감자 <여름>을 듣고 있던 엘로이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한참을 누워있었다. 머리카락 한 가닥까지 보이는 듯했고 손가락으로 선을 따라 그릴 수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촛불과 종이를 챙겼다. 그전에도 그녀를 몇 번이나 그렸는데도 선을 그었다 문지르기를 반복해야 했다. 조금씩 형태가 만들어졌다. 그녀의 눈물에 손을 대려 했을 때 어떤 떨림은 종이에 포착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림은 곧 완성되었고, 나는 시간을 잊고 잠이 들었다.


엘로이즈의 일기

177X년 X월 X일

오늘 클라브생 선생이 집으로 찾아왔다. 젊은 여자였다. 악단에서 피아노를 치는 일을 한다고 했다. 그 외에 귀족 자제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는 일도 하고 있었다. 순진하고 어린 인상이었다. 나는 응접실로 그녀를 안내했다.

 “쳄발로를 배우려고 하는 분이 있다고 해서 반가웠어요. 요즘은 피아노를 치는 곳이 많아져서…”
 “쳄발로요?”
 “아, 이탈리아어로는 쳄발로라고 하는데, 프랑스에서 오셨다고요.”
 “네, 온 지는 오래 되었어요. 아이도 있고…. 저는 이 악기 소리가 좋아요. 꼭 아이가 배우면 좋겠어요.”

여자는 장갑을 벗어 무릎에 두고, 맨손으로 클라브생에 덮인 천을 걷었다. 몇 음을 눌러보더니 그 자리에 앉아 한 곡을 연주했다.

 “무슨 노래죠?”
 “바흐예요. 골드베르크 변주곡.”

그는 천천히 마지막 부분을 이어 쳤다.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물결 같았다.

 “쳄발로로 쳤을 때 가장 아름답죠.”
 “좋네요. 오늘부터 수업할 수 있나요?”
 “오늘은 안 되고, 내일부터 가능해요. 오늘은 꼭 만나야 하는 분이 있어서.”
 “그렇군요.”

나는 클라브생을 다시 덮으려고 하다 그녀와 손을 부딪쳤다. 내가 머뭇거리는 동안 선생은 조심스레 악기를 덮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는 놀랍게도 낯을 가려서-조금만 친해지면 천방지축인데도-숨어 있다가 선생이 나가고 나서야 고개를 내밀었다.

 “엄마, 이제 저거 치는 거예요?”
 “그래. 너도 쳐보고 싶다고 했지? 이제 선생님에게 배우면 엄마한테 들려주는 거야.”
 “엄마가 배우면 될걸. 엄마도 칠 수 있잖아요.”

대답하지 않자 아이는 건반 몇 개를 눌러보더니 다시 금방 일어나 방으로 올라갔다. 가기 전에 내 볼에 뽀뽀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내가 왜 못 치는지 말하지 못했다. 시간이 더 많이 지나, 어떤 기억을 떠올려도, 그 기억이 주는 감정에서 자유로워지는 날이면, 그 날이면 엄마도 칠 수 있을 거야, 라고 말할 수 없었다.


마리안느의 일기

177X년 X월 X일

오늘 만나기로 한 분은 특이한 사람이었다. 주로 초상화를 의뢰하는 사람은 귀족이었던지라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가문을 소개하지 않았다. 스스로 피아노 연주자라고만 소개했다. 그녀는 장갑을 끼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제가 연주하는 모습을 그려주실 수 있나 해서요.”
 “물론 가능합니다.”
 “일반적인 초상화 외에 다양한 작품을 하신다고 들어서.”

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버지 이름으로 출품한 작품들이 알려지는 건 좋지만 어떤 사람들은 내가 다양한 그림을 그리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기도 했다.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작업하신 그림을 볼 수 있을까요?”
 “대부분 제 화실에 있어서 여기는 별로 없습니다만….”
 “정해진 포즈 말고, 제가 치는 느낌을 그대로 그려주실 수 있나요?”

나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어제 그린 그림이 나와 있었다. 엘로이즈는 우는지 웃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멀리 있는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두운 배경 속에 눈은 불꽃을 바라보는 듯 빛나고 있었다.

 “물론 형식이 주는 아름다움을 대부분 더 선호하죠. 하지만 저는 이런 식의… 순간의 존재감이 담긴 작품을 그리기도 합니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요.”

나는 이마를 만졌다. 엘로이즈를 그린 그림이 화실에도 있지만, 거의 공개하지 않기에 뭐라 더 설명할지 난감했다.

 “제가 아는 분을 꼭 닮았군요. 아름다워요.”

나는 그 사람이 엘로이즈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묻지 않았다. 엘로이즈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으나,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사라져가는 무언가를 붙잡아가는 일만이 앞으로의 생을 채워가겠지. 나는 웃으며 그녀를 내려보내고, 부엌으로 가 빵 한 덩이와 치즈, 와인을 받아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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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수상한 소설 클럽 운영인. 매달 3편 이상 재미있는 소설을 써서 보내주자는 목표로 ‘비밀독자단’을 만들어 운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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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그들의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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