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일기장
영화 속 그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아델, 엠마의 일기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윤혜은 / 2020-07-02
영화가 끝난 후 영화 속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혹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한 적 없으셨나요. <우리들>의 선이와 지아는 화해한 뒤 예전처럼 친한 친구 사이로 돌아갔을까요? <캐롤>의 테레즈와 캐롤은 한집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겠지요? 그들은 자신의 삶을 어떤 색깔로 채워가고 있을까요. 퍼줌이 상상력을 발휘해 쓴 그들의 뒷이야기, ‘그들의 일기’를 보여드립니다. |
아델의 일기
2013년 12월 7일
웃는 엠마를 보고 싶다. 아무리 스트레스받은 하루였어도 엠마가 웃으면 나도 한순간에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는데. 웃을 때마다 유난히 도드라지는 그 넓은 쌍꺼풀에 입 맞추고 싶다. 어디까지 길어질 수 있는지 자로 재어볼 만큼 길게 늘어나는 부드러운 입꼬리도, 한 번만 더 손으로 더듬어보고 싶다. 그리고 살짝 벌어져 은근히 음흉해 보이는 앞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를 이상한 기분으로 몰아넣었던 앞니도 그립다. 어떤 사람들은 엠마를 푸른 머리 시절로만 기억하지만, 난 틈이 있는 앞니만큼 엠마를 엠마로 남게 하는 건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엠마의 인생에 남긴 균열도 꼭 그만큼이었을까? 지금은 이런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2015년 7월 22일
우리(아직까지도 엠마와 나를 ‘우리’로 묶어서 떠올리다니?)가 처음 만난 날, 엠마가 내 이름을 태양으로 잘못 짐작했을 때부터 나는 이미 알아챈 것 같다. 태양은 내가 아니라 엠마라는 걸. 그리하여 이제부터 나의 세계에는 파란 해가 뜨겠구나, 하고.
아직도 난 파란 태양이야말로 이 지구와 꼭 어울리는 색깔이라고 생각한다. 태양이 파란색이라면 눈이 멀지 않고도 해를 바라볼 수 있겠지. 우리가 좋아했던 그 공원에, 우리가 없이도 사방으로 쏟아져 내리는 밝고 푸른빛을 상상한다.
오늘은 내 서른 번째 생일이다. 엠마에게서도 축하 문자가 왔다. 스물일곱이나 스물여덟에는 없던 축하였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어릴 때 엠마가 내 세상이 되어버린 것 같다. 아직도 생각에 잠기곤 한다. 우리가 조금 더 늦게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내가 처음 사랑한 게 엠마가 아니었다면. 엠마를 두 번, 세 번째에 사랑했다면. 내가 써야 할 글을 알고 있었다면. 이미 쓰고 있었다면. 그래서 나도 가끔은 엠마를 외롭게 만들 수 있었다면.
2025년 4월 12일
모처럼 굴을 먹을 일이 생겼다. 평론가들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였다. 이제 곧 5월이니까 늦기 전에 많이 먹어둬야 해요.1) 모두들 인사처럼 그 말을 주고받았다. 양식과 자연산이 한데 섞여 서빙된 대형 굴 접시. 모두 조금씩 움찔거리는, 한눈에 봐도 신선한 굴이었다.
십년도 더 된 일이지만 굴 앞에서 엠마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별 후 못 견디게 엠마 생각이 나는 날엔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굴과 화이트 와인을 객기처럼 사다 먹곤 했으니까. 그러다 몇 번은 잔뜩 탈이 났는데, 밤새 구토를 하며 엠마를 찾다가 지쳐 잠이 들기 일쑤였다. 다음날 입가에 말라붙은 토사물 흔적을 떼어내며 비로소 엠마와 헤어졌다는 걸 실감하던 시절이었다.
매일 죽은 굴을 먹는 기분. 아니, 차라리 내가 죽은 굴이 된 것 같았지. 멍청한 생각에 빠지려는 찰나, 동료 하나가 내 굴에다 레몬을 슬쩍 짜줬다. 사람들의 시선이 아주 잠시, 나와 그에게 머물렀다 흩어졌다. 나는 이제 막 문단에 데뷔한 이 남자가 내게 호기심으로라도 반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양성애자라고 소문이 나는 바람에 내게 필요 이상의 호의를 보이며 접근하는 남자들이 많아졌다. 커밍아웃을 한다면 편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일 때. 그때엔 마음도 자연히 동할 것이다. 밝히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이다.
솔직히,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내 정체성을 홍보해야 하는 일에 의문이 든다. 그건 이성애자들은 부러 하지 않고, 애초부터 할 필요가 없는 일이니까. 난, 그냥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여기 있다고, 우리가 사랑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런 날엔 아무래도 굴보다 파스타가 좋겠지.
굴을 마시듯 비우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혼잣말처럼 다음번엔 파스타 먹으러 가요, 라고 말했다. 못 알아들은 사람들이 있길래 어떤 파스타 좋아하세요? 라고 되물으며 웃었다. 곧 양성애자 소문에 ‘교양 없고 이상한’이 붙을지도 모르겠다.
엠마의 일기
2016년 4월 18일
아델은 이제 내가 초대장을 보내도 전시에 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제 낮엔 초대장 봉투 뒷면에 아델 이름을 적어 보았다. 리즈가 참 못된 심보라고 질투하며 이혼 서류2)를 내밀었다. 어제 이혼 서류를 받았어도 오늘 일기의 첫 문장은 아델로 시작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델로 끝이 나)네.
2019년 12월 20일
솔직히 사람들은 내가 그린 그림 속 모델의 외설적인 포즈에만 집중하는 것 같다. 다들 그림에 담긴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척, 나의 정체성을 존중하는 척 다가오지만 실은 내가 모델들과 얼마큼 깊은 관계인지, 얼마나 많은 여자들과 은밀히 사귀고 있는지, 심지어는 동시에 몇 명과 해봤는지 따위를 캐내고 싶어 하는 눈빛을 나는 구별해낼 수 있다. 빛이 어쩌고, 색채가 어쩌고, 재료가 어쩌고 지껄이며 그림을, 아니 작품의 주인공들을 노골적으로 훑는 시선이 불쾌하다. 아직도, 세상은 참 아직도 그런다.
유난히 그런 시선들에 시달린 전시였다. 기꺼이 내 앞에 서준 그녀들에게 내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모조리 갤러리 문밖으로 내보내고 부드러운 천막으로 그림들을 얼마간 가려두고 싶었다. 그중엔 이제 내가 안아줄 수 없는 사람도 있으니까. 전시가 끝난 밤이면 사과하듯 품에 안았던 얼굴이 생각난다. 그러면 걘 참 무해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곤 했는데. 세상에서 가장 무해하지만 나를 제일 위험하게 만드는 눈빛으로 말이다.
이상하게 아델에겐 계속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다. 변명하듯 다른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래도 후회하진 않아. 언젠가 아델도 내 후회 없음을 이해하게 되는 날이 올 거다. 그날에 우린 다시 웃으며 서로를 볼 수 있겠지.
우리의 마지막 날, 아델에겐 단호하게 말했지만 실은 영원히 너를 보지 않고 살 자신이 점점 없어진다.
2020년 2월 19일
언젠가 리즈가 나에게 한 말이 생각난다. “엠마, 넌 초대장이 아니라 편지를 써야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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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양에서는 달력에 ‘r’자가 든 달에 굴을 먹어야 탈 없이 안전하게 즐길 수 있다고 여겨왔다. 즉, ‘r’자가 없는 5~8월(May, June, July, August)에는 생굴 먹기를 꺼린다.
2) 프랑스의 동성 결혼은 전 세계에서 13번째로 합법화되었으며, 2013년 5월 18일부터 시행하고 있다.
PURZOOMER
프리랜서 인터뷰어이자 14년차 일기인간.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어떤책, 2020)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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