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일기장

영화 속 그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옥주, 동주의 일기

<남매의 여름밤>

윤혜은 / 2020-09-24


영화가 끝난 후 영화 속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혹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한 적 없으셨나요. <우리들>의 선이와 지아는 화해한 뒤 예전처럼 친한 친구 사이로 돌아갔을까요? <캐롤>의 테레즈와 캐롤은 한집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겠지요? 그들은 자신의 삶을 어떤 색깔로 채워가고 있을까요. 퍼줌이 상상력을 발휘해 쓴 그들의 뒷이야기, ‘그들의 일기’를 보여드립니다.

〈남매의 여름밤〉 스틸컷

옥주의 일기

2029년 8월 5일

  “에쎄 체인지 프로즌 일미리요.”

근데 보통 담배 살 때 이렇게 풀 네임으로 부르는 게 맞나. 뭐 담배를 사봤어야 알지…. 

무언가를 도통 지겨워할 줄 모르는 나는 맥주와 과자 외의 제품을 편의점에서 사본 역사가 없었다. 마치 스낵과 주류 코너만 도는 컨베이어 벨트처럼 내 동선은 한결 같고, 그 안에서 나라는 인간이 감행하는 변주란 세계맥주의 새로운 라인업에 망설이지 않고 도전하거나 포카칩 오리지널과 어니언맛이 모두 질릴 때쯤 스윙칩이나 썬칩을 사는 정도다. 와중에 3년 전 집 앞에 편의점이 들어선 이래 한 번도 바뀐 적 없는 알바생은 길에서 마주치면 나도 몰래 알은체를 할까 봐 걱정이 될 정도로 이미 안면이 깊다.

그런 그에게 별안간 담배를 주문하는 게 나로서는 ‘나 지금 담배 처음 펴보는 거예요’라고 광고하는 것 같아 괜히 민망스러웠다. 미성년자도 아닌데, 오랜 흡연자처럼 능숙하게 보이고 싶어서 검색결과에 뜬 담배 이름을 몇 번이나 속으로 곱씹었는지 모른다. 나도 한번 남들처럼 담배에 기대어 번잡스런 일상을 좀 잊어볼까 싶었는데, 담배 한 갑 사는 데에도 이렇게 속이 시끄러워서야.

톡. 손톱으로 캡슐을 터트리려다 힘 조절을 잘못하는 바람에 담배가 한번 꺾이고 말았다. 아잇…. 제대로 펴보기도 전에 자꾸 김만 새냐. 빳빳했던 천공 부분에 주름이 잡힌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훅, 진한 멘솔 향이 입안으로 번졌다. 내가 담배를 다 피고 있네…. 막무가내로 흩어지는 연기를 바라보며 한 번 더 빨아들이니 이번에는 블루베리 향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무작정 ‘얇은 담배’를 검색하다 달콤한 맛이 가미되어 있다기에 사봤는데, 싸구려 인공향이 오히려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남매의 여름밤〉 스틸컷

이내 따라오는 묘한 기시감. 아 이거 그거잖아, 풍선껌 맛. 껌이 도톰하고 질겨서 큰 풍선을 불기에 참 좋았던, 인공과즙이 다른 껌보다 풍부하게 배어나 침이 가득 고이던 껌이었지. 사실 나보다는 동주가 좋아했던 껌. 껌보다는 풍선 부는 걸 좋아했던 동주. 걔는… 요즘도 가끔 씹나? 요즘도 껌 뱉을 타이밍을 놓치다 귀찮아서 막 꿀꺽 삼키고 그러나? 단물이 다 빠져버린 껌, 고무처럼 질긴 껌. 껌처럼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동주가 껌을 삼키면 과장되게 호들갑을 떨며 작은 등을 쓸어줬었지. 흐릿하게 떠오르는 인영과 달리 목소리는 비교적 선명하게 재생됐다.

  “동주야, 너 껌 막 삼키고 그러면 껌이 등에 딱! 달라붙어서 평~생 안 떨어진다? 그래도 자꾸 삼키고 그걸 거야?”
  
그러면 동주는 매번 겁을 먹고선 울상으로 말했지. 거짓말이지? 빨리 거짓말이라고 말해 엄마아. 

말하자면 이건 엄마와 동주가 공유하는 장난 루틴. 나는 뭘 했더라? 쟤는 왜 저렇게 껌을 씹는지 몰라 턱 아프게, 따위의 추임새를 넣었나? 한심하다는 듯 동주를 쳐다보면서도 속으로는 은근히 엄마의 동의를 기다렸던가. 그러나 엄마는 짐짓 무서운 말투와 달리 내내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어느새 동주의 등이 아닌 뒤통수를 쓰다듬곤 했지. 

하지만, 정말일까? 이런 장면이 진짜로 존재했었나? 오늘처럼 부지불식간에 엄마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저 언젠가의 꿈을 실재했었다 착각한 건 아닐까 하고. 무의식이 데려오는 엄마는 언제나 다정한 모습뿐이라 차라리 나를 의심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입 안에는 어느새 침이 잔뜩 고여 있다. 아, 흡연자들이 왜 그렇게 침을 뱉는지 이제 좀 알겠네.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고 길게 늘어지는 내 침을 바라보며 짜증이 나 허탈하게 웃었다. 담배 한 대를 겨우 다 피울 즘엔 블루베리 향이 섞인 가래를 뱉었다. 아무래도 담배는 좀 별론 거 같아. 다음엔 그냥 껌이나 씹어야지. 이왕이면 동주랑 같이.

〈남매의 여름밤〉 스틸컷

동주의 일기

2035년 9월 15일

엄마의 일기장을 누나에게 보여주면 어떨까?

방 정리를 하다가 재작년에 제대하고 방치했던 박스 하나를 발견했다. 잡스러운 전역물품이 차곡차곡 들어차 있었다. 아영이가 보낸 알록달록한 편지 꾸러미와 나란히 놓인, 낡은 종이 묶음이 눈에 띄었다. 노란 고무줄을 풀어내려 하자 그 사이 삭은 모양인지 기다렸다는 듯 팅, 끊어져버린다.

엄마는 가끔 편지에 제 일기장을 뜯어 한 장씩 끼워 보냈다. 아니, 자신의 일기 낱장에 쪽지처럼 짧은 메모를 덧붙였다고 하는 편이 더 맞겠다. 덕분에 엄마의 편지는 다른 모든 편지와 조금 다른 방식으로 나를 기대하게 만들었는데, 그것은 엄마의 편지가 내 안부를 빙자한 자신의 한 시절에 대한 해명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로서도 참 이상한 것은, 처음 그런(?) 편지를 받았을 때에도 잠깐 당황했을 뿐,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건 누나의 말마따나 내가 엄마라면-정확한 워딩은 이랬다. “하긴, 넌 엄마가 아니라 누구라도”-무한히 호의적인 사람이어서 그런지도 몰랐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엄마의 일기장은 끔찍하게 지루한 군 생활에 신선한 즐거움이 돼 주었다. 이렇게 말해도 되나 싶은데… 꼭 무명작가의 연재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1년 9개월 동안 엄마가 보낸 편지는 열통 남짓이었고, 한 번에 서너 장의 일기 낱장이 도착하곤 했다. 나는 드물게 답장을 했다. 물론 답장을 할 때에도 엄마의 일기를 받아본 것은커녕 엄마가 일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남매의 여름밤〉 스틸컷

다시 읽어본 엄마의 일기는 좀 감상적인 데가 많았다. 너무 많은 고민과 너무 많은 다짐들이 쉽게 번복되었다. 눈물은 애매하게 매달려 있는가 싶더니 새 고무줄로 일기장을 묶어 놓을 때쯤 알아서 말라있었다.

하지만 단 한 문장. 모든 것이 번복되는 가운데 지겹도록 반복적으로 적힌 한 문장 때문에, 나는 일기 묶음을 박스에 도로 집어넣지 않고 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옥주를 만나면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무슨 말부터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이 일기가 처음 쓰이기 시작했을 때부터였을까. 누나가 엄마를 만나는 걸 극도로 꺼려했던 것이. 돌이켜보면 누나의 위악도 참 어설펐는데. 상대적으로 어렸기 때문에 무엇에든 좀 더 무구하게 솔직할 수 있었던 나는 엄마를 그리워하는 데에도 열심일 수 있었다. 나를 둘러싼 세상의 변화에 나름대로의 아쉬움이 없이 투정을 부렸다고 해야 할까. 엄마가 일기장을 나에게 보낸 것도 그 때문인지 몰랐다. 자신을 향한 모종의 앙금 같은 게, 적어도 내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짐작했겠지.

다음 달에 누나는 엄마가 될 예정이다. 누나에게 엄마의 일기장을 보여주면 뭐라고 할까. 아니, 그래도 괜찮을까? 지금 이 마음은 그저 엄마의 욕심을 대행하는 일일까? 혹여 어린 날의 여러 순간처럼 무구한 얼굴로 누나를 상처 주는 일이 되는 걸까 봐 주저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 허심탄회하게 조언을 구할 어른의 얼굴을 찾기 어렵다는 거. 그게 나를 좀 답답하게 만든다. 아무래도 내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건 우리 누나. 누나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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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ZOOMER

프리랜서 인터뷰어이자 14년차 일기인간.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어떤책, 2020)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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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그들의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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