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일기장

제스의 일기

2016년 7월 

케일라가 뭔가 말하려 했다. ‘2층’에 다녀온 직후였다. 내가 아무리 지하에만 있어도 그 정도는 안다. 2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날 엮지 않는 게 너한테 좋을 거야. 우리가 친구란 걸 다들 알잖아. 여긴 정상이 아니잖아.”

케일라는 입을 다물었다. 늪에 빠진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다. 나는 이제껏 다정한 친구들을 잃었다. 여기서 하나 더 추가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그녀들은 똑똑하고, 열정 넘쳤다. 그러다 2층에 다녀와서 멍한 얼굴로 지내다 곧 퇴사했다. 소수는 더 좋은 자리로 이동했다. 그들은 뭔가 잃어버렸다. 마치 호의가 불결한 것이라도 되는 양, 조금씩 그것을 마음에서 덜어내 없앤 것 같았다. 웃으며 대화하다가 어느 날부턴 “응”, “좋은데?” 같은 텅 빈 대답만 하고 바쁘게 사라져버렸다. 언제나 더 중요한 사안이 있는 것처럼, 눈앞의 일을 잊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처럼. 나는 케일라에게서 그 전조를 보았다.

입사 수년째 나는 언제나 이곳에 있었다. 자리가 썩 좋진 않다. 그래, 4개월 동안이나 쥐가 나오지 않은 점, 자랑스럽다. 그 이상의 자랑스러움이라면, 꼬박 월급이 나오는 점과 세상에서 가장 소문이 빠른 인간들 사이에서 온갖 루머를 있어보이게 만들고자 노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곳 직원들은 멍청한 척 하는 똑똑한 사람들이다. 절대 내 정체를 들키면 안 된다! 정체를 들키는 날에는 “제스가 AIDS에 걸려 사무실에 불치병을 전염시켰으며 곧 사망한다”는 속보까지 전해질 것이다. 모두 진짜 정보보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보만 좋아한다. 게다가 이곳 사람들은 입맛에 안 맞으면 맞게 뜯어 고칠 능력까지 있다.

대학에서 나는 이정도 겁쟁이는 아니었다. 나는 꿈과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언론사에 입사해 정의를 실현하고 싶었다. 열심히 공부했다. 인생이 다는 아니더라도 약간은 풀릴 줄 알았다. 여자 친구도 있었다. (케일라에겐 없다고 거짓말했지만) 취업준비가 길어지자 자신감이 꺾였다. 애인과 싸우는 날이 많아졌다. 소위 진보라고 불리는 언론사 외에도 조금씩 이력서 넣는 범위를 넓혔다.

폭스 뉴스 면접 전날까지 나는 면접에 갈지 말지 고민했다. 애인은 내게 면접장에 가지 말라 애원했다. 달콤한 목소리로, 그런 곳에 가면 우리 혼인신고는 어떻게 하냐고 내 등을 쓰다듬었다. 나는 애꿎은 머리칼만 매만졌다. 그때 엄마에게서 문자가 왔다.

  「언제까지 친구랑 살 거냐? 올해도 취직 못하면 그냥 집으로 들어와라. 여기서 엄마가 일자리 정도는 구해줄 수 있어.」

아, 다시 지옥 같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결국 애인과 크게 싸웠다. 그래, 입사하면 혼인신고도, 결혼식도 못 하겠지. 그런데 그거 알아? 취직 못하면 우리 이렇게 같이 사는 것도 끝이야. 우리 가족은 ‘여자랑 동거’하는 건 그냥 ‘룸메이트’라고 생각한다고. 나는 내 옷장에서 가장 ‘여자다워 보이는’ 옷을 골라 면접장으로 향했고, 애인은 현관문 뒤에서 울었다.

  “원래 금발인가?”

면접 담당관이 머리카락을 가리키는 시늉을 했다. 내가 놀라자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어이쿠, 차별 발언은 아니야. 잘 어울리는군. 칭찬이야. 우리 회사에도 금발 직원들이 많아. 거의 업계 최고지.”

나는 다음날 합격 통보를 받았다. 기뻐서 탭댄스라도 출 줄 알았건만, “축하드립니다” 글자에도 불쾌한 느낌이 있었다. 애인은 당분간 친구 집에서 지내겠다는 쪽지만 남겨둔 채 사라졌다. 우리는 얼마 후 헤어졌다.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이거였다. “너는 관계보다 돈이 중요한 것 같아서.”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내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 노력이 단지 돈으로만 비춰질 수도 있겠다. 뉴욕에서 빌어먹을 남부 출신 20대 후반 레즈비언으로 살아남는 것에 돈을 빼고 사랑만 넣으면 어떻게 되나 보자. 나는 술에 취한 채 애인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차단당하고 출근 전날까지 아이스크림을 퍼먹었다. <브리짓 OO의 일기> 전 시리즈를 정주행했다. 극단적인 이성애 영화를 보면서 실컷 울고 마지막이 해피엔딩이어서 너무 비현실적이라 한 번 더 울었다.

케일라를 무시한 뒤 나는 집에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샀다. 의도한 행동은 아니었다. 단지 발걸음이 나를 인도했을 뿐이다. 6번째 맛을 고를 때 정신이 조금 들었다. 나 지금 힘들구나. 나도 무언가 잃어버렸구나. 현실에 무감각해지기 위해서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나를 속였구나. 내 자리, 직업을 지키려고, 앞에 있는 사람을 마음에서 덜어냈구나.

  “릴리!”

나는 출근하자마자 릴리를 찾아가 말을 걸었다. 입사 후에 개인적으로 말을 건 적은 처음이었다. 임신한 몸이 드러나고서부터 “그만둘 거냐”, “언제까지 나올 거냐” 말을 들어도 꿋꿋하던 릴리. 소문에 따르면, 릴리는 얼마 전 로저를 지지하는 성명 방송에도 출연을 거절했다고 한다. 난 한 번도 릴리를 지지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너무 기회주의자 같겠지만, 릴리라면 말해도 될 것 같았다. 온통 로저를 지지하는 티셔츠 사이에서 누구를 믿어도 될지 모르겠지만, 릴리라면. 내가 외면했던 그 올곧음이라면.

  “저, 케일라 말인데…”

  “케일라? 네 옆자리?”

  “어, 요즘 조사하는 그거 있잖아, 로저 건 말이야…. 내 추측인데, 케일라가 아마 로저한테… 당한 것 같아.”

  “추측이라니?”

  “나한테 직접 말하진 않았거든.”

나를 엮지 말라 했다고도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말을 삼키자 릴리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릴리는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네가 그걸 왜 신경 쓰는데?”

  “그냥, 걱정돼서.”

  “그럼 네가 조사위원에게 말하면 되잖아.”

릴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릴리의 뒤를 쫓았다.

  “아니, 한 번만 들어봐. 사실 케일라가 나한테 뭔가 말하려고 했었어. 나는 안 들었고.”

  “설마 너 2차 가해한 건 아니지?”

  “그럴지도 몰라. 지금은 반성하고 있어. 제발. 아무도 못 믿겠어. 너 메긴 스태프잖아. 메긴도 로저를 지지하는 것 같지 않던데? 또… 너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어.”

릴리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한숨을 크게 쉬더니, 알아보겠다고 했다. 나는 지하에 있는 케일라라고, 릴리 뒤에 대고 말했다. 얼마 뒤 메긴이 지하로 내려왔다. 언제나처럼 당당한 걸음이었다. 릴리에게서 문자가 왔다.

  「메긴이 짚이는 데가 있다는데? 간곡히 얘기한 보람이 있겠네. 메긴이 얘기할 거야.」

속이 쓰렸다. 직급도 천지차이인 메긴에게 짚이는 구석이 있을 정도인데, 나는 동료랍시고 무시하려고만 했다니. 메긴과 마주한 케일라를 멀리서 보면서 나는 자리를 떴다. 퇴근길에 아이스크림을 또 샀다. 이번에는 무슨 영화를 보면서 먹을까? 못난 나를 감당할 수 없어 괴로웠다.

집에 도착해 영화를 켜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빌 오라일리였다. 손이 떨렸다. 내가 결국 잘못된 선택을 했나보다. 상층부에서 나를 자르기로 드디어 결심했나보다. 메긴도 썩은 동아줄이었나.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여보세요?”

  “나야, 케일라. 아, 미안해. 내 번호를 빌 이름으로 저장했어. 장난친 건데 깜박했네.”

케일라였다.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사과하고 싶었는데, 다시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모든 힘을 다해 이야기를 빠짐없이 듣고 싶었는데.

  “내가 아마 널 걱정하다 말이 나왔나봐. 한두 번 정도.”

공공연한 폭력임에도 중요하지 않다고 감춰온 것들. 모두 드러내 부숴야만 우리가 살 수 있을 텐데. 이제껏 나는 폭력을 감추는 껍데기 역할을 자처했다. 이렇게 간단한 다정함을 나는 왜 내버렸을까. 단지 들으면 되는 걸. 나는 케일라가 우는 소리를 수화기로 들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