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일기장
영화 속 그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캐롤, 테레즈의 일기
<캐롤>
정다희 / 2020-01-16
영화가 끝난 후 영화 속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혹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한 적 없으셨나요. <우리들>의 선이와 지아는 화해한 뒤 예전처럼 친한 친구 사이로 돌아갔을까요? <캐롤>의 테레즈와 캐롤은 한집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겠지요? 그들은 자신의 삶을 어떤 색깔로 채워가고 있을까요. 퍼줌이 상상력을 발휘해 쓴 그들의 뒷이야기, ‘그들의 일기’를 보여드립니다. |
캐롤 에어드의 일기
1953년 2월 14일
그녀의 사랑을 바란다. 내가 초라해지는 한이 있어도, 내 마음을 거절당해도 괜찮다. 사실은 견디지 못했겠지. 나는 나를 부정하며 내 속에 큰 공허를 만들어냈다. 이건 쉽게 메울 수 없다. 테레즈를 떠나 변호사 옆에 앉았을 때 깨달았다. 테레즈를 밀어내 만든 공허를 다시 린디로 채울 수는 없을 거라고. 그건 린디가 사라진 공허를 토마토 젤리로 채우려는 거나 같았다.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내 아파트로 와서 같이 살겠냐고 말했을 때, 테레즈의 표정을 보며 알았다. 나는 쉽게 용서받지 못할 거라고. 나는 이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지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고 그렇게 말했다. 평생 나는 내가 이러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 초라함을 모조리 드러내며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를 거절하는 얼굴 앞에서 사랑을 구걸하며 말하게 될 줄은. 하지만 했다.
테레즈는 내 사랑 고백을 듣고서 낯선 남자와 떠났다. 나는 바쁜 척 나왔지만 실은 바쁘지 않았다. 전화 부스에 들어갔다. 혹시나 린디가 받을까 기대하며 다시 하지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교환원이 받기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흐느꼈다. 혹시나 테레즈의 마음이 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얼굴은, 작고 단단한 보석처럼 결연했다. 나는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나타날 때까지.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내가 평생 기대하지 않았던 것들이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다. 나는 테이블에 양해를 구하고 일어나 테레즈에게로 갔다. 테레즈는 다가와 귓속말로 내게 말했다.
“나도 사랑해요.”
천사는 내 곁에 있다.
테레즈 벨리벳의 일기
1953년 2월 14일
캐롤과 같이 살기로 한 결정이 과연 맞는 걸까?
조용한 분노가 타들어가 나를 먹어버릴 때까지 내버려두면서, 나는 다시는 감정을 느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전에는 의식하지 못했다. 캐롤에게 하지가 윽박지르는 걸 무력하게 듣거나, 아침에 일어나 애비가 나를 바라보고 있을 때 몸을 가리면서 나는 그게 슬픔이라고도 여겼고 수치라고도 여겼다. 내 안에 소화되지 않은 감정은 음식을 게워내게 했다.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건 좋았다. 손을 움직이면 모든 걸 잊었다. 그러다가도 캐롤을 찍은 사진을 보거나 캐롤이 준 카메라를 만지면 다시 감정이 요동쳤다. 캐롤이 그리우면서도 그리워하고 싶지 않았다. 캐롤의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면서 ‘연락하지 말자’ 되뇌었다. 매일 시소처럼 기분이 오르내렸다. 전화기가 울릴 때마다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았다. 겉으로는 더 단단해져갔다. 새 직장인 뉴욕 타임즈의 남자 직장 동료들(대부분 남자다)은 내가 잘 웃지 않는다며 웃으라고 놀렸다. 나에게 감정은 불필요했다. 괴롭기만 했으므로.
미워했으면 바랐다. 나는 캐롤을 온전히 미워할 수 없었다. 아니, 전혀 미워할 수 없었다. 애비에게 ‘왜 나를 미워하냐’ 물을 때 나는 ‘내가 왜 애비를 미워하냐’고 물었어야 했다. 애비와 통화하는 캐롤 옆에 가만있을 때, 캐롤 옆이 당연히 제 자리인양 서 있는 하지의 모습을 볼 때, 속에서 시커멓게 무언가 타올랐다. 나는 1952년 12월 16일까지 어린 아이였다. 캐롤을 처음 보고 무언가 타올랐을 때 나는 그게 나를 태울지 나를 데울지는 선택할 수 없었다. 사랑은 붉다가 검었고 한없이 밝고도 어두웠다. 이전까지 알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나를 변하게 했다.
“정말 좋아 보여요. 갑자기 만개한 꽃처럼. 나와 멀어지면 그런 건가요?”
“아뇨.”
오랜만에 만난 캐롤은 애쓰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안부를 묻고 이전까지의 삶을 살고 있던 사람처럼 굴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던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사랑도, 내팽개쳐짐도, 슬픔도, 수치도, 분노도,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 모든 게 소용돌이치는 가운데서도 이 사람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소용돌이는 나를 집어삼켰다. 그곳은 너무나도 시끄럽고 너무나도 고독하며 너무나도 고요했다. 나는 평생 이 사람 혹은 이 사람과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란 걸 알았다. 절박하게 벗어나려 애쓰고 있어서, 그건 도리어 내가 이 사람을 너무나도 깊게 ____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그 빈칸에 원하는 단어를 넣을 수 있는 기회는 찰나였다. 그랬기에 캐롤의 고백을 듣고 나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둘이 좋은 시간 보내요.”
캐롤은 잭의 등장에 황급히 자리를 떠나려는 것처럼 보였다. 캐롤은 내 어깨를 살짝 잡았다가 천천히 놓았다. 순간 내 모든 감각이 그곳에 있었다. 캐롤의 향기가 아주 가까운 곳까지 왔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나는 자리를 떠나면 이 요동치는 마음이 가라앉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캐롤은 모든 것이 큰 원을 그리며 돌아간다고 했다. 나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돌아가야 하는 곳을 더듬어보아도, 다들 어디로 갈지 아는데 나만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것 같았다. 그 표지는 나에게는 캐롤밖에 없는 것 같았다. 이전까지 없었고 다시는 지워지지 않으며, 언제나 돌아갈 곳. 인생이 그런 곳을 두고 커다란 원을 그리고 있다면 그곳은 그녀가 있는 곳이었다. 나는 택시를 탔다. 캐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나는 캐롤을 보았고, 캐롤은 나를 보았다. 내가 이 소용돌이를 무슨 단어로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했던 게 멍청하게 느껴졌다. 나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다른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나도 사랑해요.”
나는 캐롤의 귀에 바짝 입을 대고 속삭였다. 숨을 들이마시자 캐롤의 향기가 코와 목을 간지럽혔다. 캐롤은 작게 웃으며 나를 살짝 안았다가 놓았다. 나는 하늘에서 떠돌다 착륙한 기분이었다. 내가 천사는 아니겠지만, 이곳이 내가 떨어져야 하는 곳임은 맞았다.
캐롤의 일기
1953년 2월 15일
참을 수 없어서 테레즈에게 이사를 서두르자고 말했다. 짐 몇 가지가 없어도 사는 데엔 문제가 없을 것이다. 어제도 테레즈는 내 아파트에서 묵었고, 아침에 일어나 같이 이불을 덮고 얼굴을 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상상한 ‘영원한 일출’은 나에게 오늘 아침 같았다. 테레즈의 몸 위로 햇빛이 떨어지는 걸 보았고, 꼭 보지 않아도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일어나 커피를 내렸다. 테레즈는 세수를 하고 내 앞에 앉아 커피를 홀짝였다. 새처럼 귀여웠다. 볼을 만졌다. 테레즈는 웃고 잠깐 고개를 숙이더니 뭔가 결심한 얼굴로 나에게 입을 맞췄다.
“늘 거절하지 못한다고만 생각했거든요.”
“?”
“그런데 이제 제가 선택한 거니까.”
“…정말 당신은 만개한 꽃이 되었네요.”
나는 테레즈를 찬찬히 보았다. 테레즈는 추운지 약간 어깨를 웅크리며 커피를 마저 마셨다. 그리고 나를 보고 웃었다.
“꽃은, 곧 질 거잖아요. 꽃보다는 나무가 좋겠네요. 나는 당신 곁에 오래 있고 싶어요. 당신에게 그늘도 만들어주고, 가끔은 피아노 칠 가지도, 이렇게 나오면 좋겠죠.”
테레즈는 긴 소매 속 손을 저어 허공에 피아노 치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 광경이 아름다워서 나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테레즈의 일기
1953년 2월 15일
오늘 직장에서 파티가 있으니 가능하면 모두 참석해달라는 말을 들었다. 저녁에는 캐롤과 이삿짐을 옮기기로 했는데 낭패였다. 이미 근무 시간은 끝났고, 밖에서 캐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눈에 띄지 않게 빠져나가려는데 대니가 나를 불러 세웠다.
“어이, 테레즈! 어디 가? 요새 숨겨둔 남자라도 생겼어?”
대니는 나를 툭 치며 웃었다. 나는 내 얼굴 표정이 굳는 걸 느꼈다. 대니는 약간 어색했던 파티 이후로 지나치게 친한 척 굴고 있었다. 그는 양손에 잔을 들고 와서 하나를 나에게 건넸다. 나는 받지 않았다.
“대니, 재미없어. 나 집에 급한 일이 있어서 가야 해.”
“급한 일? 뭔데?”
재미없는 모임의 특징은 모든 사람이 별 거 아닌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주변이 지나치게 조용해져서 부담스러웠다.
“그런 게 있어. 나 진짜 나가야 해.”
“벨리벳 양? 바쁜가보죠?”
편집국장이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요즘 지면 사진이 아주 좋아졌어요. 벨리벳 양이 들어오고 나서. 한번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리 어울릴 자리가 많지는 않았지만.”
편집국장은 내게 잔을 하나 주었고 그건 거절하지 못했다. 나가고 싶어 조급한 마음과는 별개로 내 사진을 알아보는 이가 있다는 건 기분 좋았다. 나는 잔을 부딪치고 술을 조금 마셨다. 괜찮은 샴페인이었다. 대니와 편집부장은 한국전쟁과 미군 파병에 대해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듣고 있자니 어딘가로 떠나지 않고 이곳에 있는 내가 아직 어리고 미숙하게 느껴졌다.
“테레즈가 사람을 담는 모습에는 무언가가 있어요. 흩어져가는 아름다움이랄까. 언젠가 무거운 주제에 대해 테레즈가 찍은 사진을 보고 싶기도 해요.”
“무슨, 과찬이에요.”
“아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벨리벳 양.”
편집국장은 격려하듯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누군가가 멀리서 내 쪽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캐롤이었다.
“캐롤?”
“테레즈.”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 이쪽은 캐롤 에어드예요.”
“안녕하세요.”
“제 직장 동료. 이쪽은 대니, 이쪽은 저희 편집국장님. 잠깐 저 자리 비울게요. 오늘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
나는 캐롤과 함께 사무실을 나갔다. 뒷통수가 따가웠지만 옆에 캐롤이 있으니 발이 날아갈 듯 점점 가벼워졌다. 옆을 보니 캐롤이 여유롭게 웃으며 걷고 있었다. 바깥은 차가웠다. 사람들에게서 벗어나서인지 찬 공기가 더 없이 상쾌했다.
“캐롤, 어떻게 안까지 들어왔어요?”
“누가 막으면 어쩔 수 없지, 하는 마음으로 들어갔더니 되더군요.”
“겁도 없네요.”
“그러는 당신은?”
캐롤이 나를 보자 나도 웃음이 났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고 한참 웃었다. 사람들의 놀란 표정도 하찮고 우습게 느껴졌다. 그들은 모르리라. 말해줘도 바로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들의 시선이 이제는 비루한 무언가로 바뀌어 사그라들었다. 이제 아무도 내게 상처를 주지 못할 것 같았다. 캐롤을 제외하고.
캐롤이 자가용에 시동을 걸었다. 손을 비벼가며 데우고 있는데 캐롤이 내 손을 잡아 자신의 허벅지에 올려두었다.
“여기가 따뜻해요. 절대 떨어지지 말아요.”
나는 다시 얼굴이 뜨거워졌다. 이번에는 기분 나쁘지 않은 화끈거림이었다. 손이 곧 따뜻해졌다. 손에 난 땀을 캐롤이 눈치채지 못했으면 했다.
캐롤의 일기장
1953년 2월 16일
아침에 하지가 왔다. 굳이 찾아올 필요도 없는데, 서류를 들고 내 아파트로 왔다. 마침 테레즈가 일찍 출근해서 다행이었다. 나는 서류만 받아 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는 집 잃은 개 같은 표정으로 문 앞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내게 잘 지내냐고 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잠깐 들어오라고 권했다.
서류는 내가 요구한 정기적인 면접권 행사에 대한 내용이다. 기껏 2주에 1회, 그것도 집안 행사가 있을 때는 불가하다고 적혀 있었다. 나는 분통을 터트리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차피 출근 시간이라 나가야 했다. 가방에 라이터, 담배, 지갑을 챙기고 있는데 하지가 뒤에서 물었다.
“그 여자랑 같이 살아?”
“테레즈? 응.”
“행복해?”
“응.”
나는 하지에게 나도 나가야 하니 나가달라고 청했다. 하지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나가지 않고 뭉그적거렸다. 나는 하지를 현관으로 밀었다. 그제야 하지는 따라 나오며 중얼중얼 말을 붙였다.
“린디 말이지.”
“응.”
“당신을 잘 이해할까?”
“응?”
나는 담배를 입에서 떨어뜨릴 뻔했다. 하지는 나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고 했다. 증거 수집 사건 이후에도, 계속해서 생각했다고 했다.
“아직 완전히는 모르겠어. 당신이 왜 내게 돌아올 수 없는지…. 진심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냥 받아들일 뿐이야…. 하지만 린디는 더 빨리 이해할 수도 있겠지.”
하지는 나만 동의한다면 린디가 나와 함께 테레즈를 만날 수 있게 허락한다고 말했다. 나는 정말 당신을 사랑해. 마지막에 쓸데없는 말까지 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린디를 볼 수 있어서 가슴이 벅차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린디, 나의 눈송이. 린디와 테레즈가 모두 잘 지낼 수만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테레즈의 일기
1953년 2월 16일
모든 게 너무 빠르다. 오늘은 집에 왔더니 린디가 있었다. 린디는 거실에서 캐롤과 함께 무언가를 자르고 있었다.
“린디, 테레즈다.”
“안녕하세요.”
캐롤이 등을 토닥이니 린디는 잠깐 일어나 쭈뼛대며 인사를 했다. 린디와 어울린 적은 없어서, 나도 어색하게 말을 걸었다.
“안녕? 린디. 반가워.”
미리 알려줬으면 놀라지 않았을 텐데, 캐롤은 전화도 없었다. 나는 겉옷을 걸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하지가 있었다.
“악!”
“으악!”
내가 놀라 비명을 지르자 하지도 비명을 질렀다. 하지는 방에서 내가 찍은 사진을 구경하다가 내가 들어와 놀란 듯했다. 나는 하지를 노려보았다. 하지는 머쓱해하며 방에서 나갔다.
“죄송합니다. 오늘 린디가 엄마를 보겠다고 너무 떼를 써서….”
“아, 그렇군요.”
이런 말을 하지를 통해서 들어야 한다는 게 약간 짜증스러웠다. 대충 대답하고 방에서 나가려는데 뒤에서 하지가 나를 불렀다.
“저기, 저는 린디를 데려가려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나는 인상을 썼다. 하지도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부엌 쪽으로 슬슬 사라졌다. 나는 거실로 갔다. 린디와 캐롤은 다정해보였다.
“캐롤, 미리 알려주지 그랬어요. 다들 와 있는지 몰랐어요.”
“아, 미안해요. 린디랑 있다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지 모르고….”
나는 근처 벽에 기대 둘을 바라보았다. 캐롤은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잠깐 보더니 린디를 일으켜 세웠다.
“린디, 우리가 만든 거 보여주자.”
린디는 그림을 들어 보였다. 반짝이는 종이옷을 입은 사람들이 서로 손을 잡고 있었다. 사람 위에 서툰 글씨로 이름이 쓰여 있었다. 린디, 엄마, 태래스, 아빠.
“태래스?”
“연습하느라 그래요. 예쁘지 않아요?”
나는 굳이 이 구도에 나를 끼워 넣은 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고맙다고 말했다. 린디는 부끄러워하면서 캐롤의 품에 안겼다. 캐롤은 작은 소리로 속살거리며 린디를 꼭 껴안았다.
“린디, 캐롤, 뭐 먹을래요?”
나는 냉장고로 가 문을 괜히 열었다 닫았다. 별로 먹을만한 건 없었다. 주스를 하나 꺼내자 하지가 옆에서 혹시 맥주를 마셔도 되냐고 물었으나 못 들은 척하고 부엌에서 나왔다.
“엄마는 왜 테레즈랑 살아요? 우리집에도 자리가 많아요!”
“린디, 길 가다가 넘어진 적 있지?”
“네.”
“그때 엄마가 일으켜줬지?”
“네.”
“어땠어?”
“엄청 아팠어요. 그런데 엄마가 안아줘서 괜찮았어요.”
“그렇지? 엄마도 가끔 넘어진단다. 그럴 때 일으켜주는 사람이 테레즈야. 엄마는 이곳에서 테레즈와 있으면 뭐든지 괜찮아진단다.”
캐롤은 린디를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왠지 짜증난 게 미안해져서 주스병을 들고 앉아 가만히 마셨다. 린디가 캐롤의 품에서 얼굴을 쏙 내밀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테레즈, 고마워요. 엄마를 달래줘서요.”
린디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난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말하려다가 말고 그냥 웃으면서 린디를 보았다. 린디는 캐롤에게 한참 안겨 있다가 잠들었다. 나는 린디를 안은 캐롤에게 다가갔다. 캐롤이 나를 보고 웃었다. 행복으로 벅찬 얼굴이었다. 나는 린디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자 내 머리칼에 캐롤이 입을 맞췄다. 나는 역시 어쩔 수 없었다. 모든 게 녹아버리는 순간이었다.
“캐롤? 이제 린디 데려갈게.”
하지는 뒤에서 헛기침을 하면서 캐롤에게 손을 내밀었다. 캐롤은 린디를 조심스럽게 들어 하지의 품으로 보냈다. 하지가 현관으로 가자 캐롤은 문을 열고 함께 나갔다. 나는 현관 안에 머물렀다. 하지는 닫히려는 문틈으로 나를 보았다. 조금 찌푸린, 하지만 애써 웃는 척 하려는 모습이었다.
“안녕히 가세요.”
“다음에 또 봅시다.”
나는 문을 조금 세게 닫았다. 쾅 소리가 났다. 캐롤이 곧 다시 돌아올 것이다. 나는 하지가 말한 ‘다음’들을 잠깐 생각하다가, 캐롤이 돌아오는 발소리에 그런 생각들이 조금씩 사라지는 걸 느꼈다.
PURZOOMER
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수상한 소설 클럽 운영인. 매달 3편 이상 재미있는 소설을 써서 보내주자는 목표로 ‘비밀독자단’을 만들어 운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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