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뉴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덕후였다

그대는 빛, 변영주

이도희 / 2019-12-16


내가 사랑하는 그 영화, 그 감독, 그 배우의 모든 것! ‘덕후’의 눈으로 본 그들에 대해 A부터 Z까지 이야기합니다. ‘애정 뿜뿜’ 덕후들의 다채로운 주접이 궁금하신가요? 그렇다면 <덕후뉴스>입니다! 


영주 감독 ©다음

보통 내가 누군가에게 ‘입덕’할 때는 이런 경우다. 영화를 본 후 감독이나 배우가 궁금해져서 인터뷰를 찾아보는 것. 인터뷰를 읽으면 이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사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사람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사랑에 빠지게 된다. 변영주 감독님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감독님의 영화들은 그 시절 내가 접할 수 없는 세계에 있었다. 그런데 4년 전 어느 날, 영화감독을 꿈꾸던 열여덟 살의 나는 17인의 영화감독이 쓴 책 『데뷔의 순간』(푸른숲, 2014)을 읽게 됐다. 17명의 감독 중 여성 감독은 3명, 그 가운데 변영주 감독님이 계셨다. 막내로 태어나 엄격한 가정에서 성장하신 감독님은 신기하게도 맏이로 태어난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았고, 배우고 싶은 점은 더 많았다.

감독님은 어려서부터 영화를 좋아했지만, 부모님께 전공으로 하고 싶다는 말을 할 용기가 없으셨단다. 재수하지 않는 것이 중요해서 법학과를 선택하셨는데, 2학년 즈음 재미없다는 것을 깨달으셨다. 4학년 즈음에 ‘여성학 연구’라는 수업에서 단편 영화를 만들게 됐고 이것을 계기로 영화 일을 하기로 결심하셨다. 감독님의 삶에 영화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대학교 시절 ‘장산곶매’에 들어간 후부터다. ‘장산곶매’는 1987년 소형 영화인들이 모여 민족영화를 제작, 상영, 배급해 사회운동을 실천하기 위해 결성한 영화단체로 1993년 해체했다. 감독님은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곳에 이끌리셨고, 선배들로부터 받는 귀여움이 좋았고, 작품 회의가 재미있었다고 하셨다. 

이 이야기를 읽고 영화 일을 하고 싶다는 나의 꿈은 더욱 커졌다. 15살 즈음 장래 희망란에 영화감독을 적어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결정한 꿈이지만 부모님은 내 진심을 믿어주지 않으셨다. 그래서 영상 고등학교가 아닌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결국 재수까지 하면서 돌고 돌아 영화를 전공하게 됐다. 그런데 이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릴 때부터 하게 됐다면 지금쯤 영화를 싫어할 수도 있고, 사고방식도 달랐을 것 같다.

변영주 감독(가운데)과 이도희님 ©이도희


이도희님이 변영주 감독에게 받은 사인 ©이도희

책을 읽은 후 4년이 흐르고 바쁘게 살아가던 중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감독님을 처음으로 직접 뵈었다. 방구석 1열이 아니라 발대식 1열이었다. 자원활동가들을 응원하기 위해 오신 감독님은 글로만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멋진, 내면이 꽉 찬 분이셨다. 영화인을 꿈꾸는 사람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인 내게 큰 용기와 희망이 되어주셨다.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소중한 말씀들을 간직하고 옆에서 사진을 찍을 때는 ‘내가 드디어 무언가 할 수 있는 사람이 됐구나’라는 뿌듯함도 느끼게 해주셨다. 영화제 중에도 자주 뵐 수 있었는데, 로비 한쪽에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들여다보게 됐다. 수십 명의 덕후들 틈에 계신 감독님이 보였다. GV를 하고 나와 지치셨을 텐데 한 명도 빠짐없이 사인을 해주고, 사진을 찍어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더 깊이 빠져들었다. 감독님과 덕후들의 에너지를 지켜보며 언젠가 나도 변영주 감독님처럼 수많은 여성에게 힘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한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 영화 티켓 ©이도희

이번 영화제 활동이 더욱 의미가 컸던 이유는 ‘바리터’의 30주년 기념행사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터는 여성주의의 영화적 실천을 표방하며 1989년 결성된 여성영상창작집단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인 김소영 감독, 서선영 작가, 도성희 베이징연예전수학원 교수, 권은선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부집행위원장, 김소연·김영 프로듀서 등이 함께했다. 바리터라는 이름을 빨래터 혹은 파리떼라고 비아냥거리는 남성 영화인들이 존재했다는 에피소드를 듣고 유치함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또 그 시절 유명한 남성 영화인이 바리터 소속 작가에게 “바리터에서 연구 사업이라도 하려면 재정적 문제가 해결돼야 하지 않냐. 여자들이 모였으니 술집 같은 걸 해보면 어떻겠냐”고 말한 것에 크게 분노했다. 더 독해진 바리터는 민우회로부터 600만 원의 지원을 받아 사무직 여성 노동자들의 교육용 영화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를 제작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몇 번이고 눈물이 터질 뻔했다. 30년 전이지만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가장 마음 아프게 했다. 물론 이런 현실 속에서 바리터처럼 여성의 목소리를 낸 많은 페미니스트가 일군 변화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차별과 혐오가 만연하기 때문에 꾸준하게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이것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영화제를 늘 지원하고 지지하시는 변영주 감독님께 감사한 이유다. 감독님은 책 『데뷔의 순간』을 통해 곁에 소중한 사람들의 순수하고 끈끈한 연대와 우정이 지금을 만들었다고 말씀하셨다. 4년 전 읽었던 바리터와의 연대를 눈으로 직접 보면서 바리터의 삶이 바로 영화 아닐까 생각했다. 또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갑갑함으로 괴로워했던 터라 바리터와의 만남으로 숨구멍을 찾게 된 것 같아 감사히 여기고 있다. 나도 이렇게 누군가의 용기가 될 수 있도록 잘 버티고 싶다.

지금부터는 감독님의 명언 대잔치를 펼쳐보려고 한다. 첫 연출작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1993)의 시사회 날, 부족한 작품을 만들어서 함께한 사람들의 노력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려 슬프게 울었다는 감독님의 다음과 같은 말에 나도 가슴이 벅찼다. 



책 『데뷔의 순간』 중 변영주 감독의 글 ©이도희

책 『데뷔의 순간』 中
“내가 사랑하는 영화를 나도 만들고 싶다.”

늘 어마어마한 사랑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 동력을 잃게 된다. 마침내 완성하고 나면 오래 거리를 두고 싶을 만큼 사랑할 수 없게 된다. 그렇지만 나도 언젠간 내가 사랑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첫 작품을 마치고 새벽에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파리에 간 감독님은 바게트를 살까 영화를 한 편 더 볼까 고민할 정도로 영화에 열렬한 사랑을 뿜어내셨다. 그리고 이런 말을 남기셨다.

책 『데뷔의 순간』 中
“내가 앞으로 영화를 통해 행복을 추구해야겠다고 결정하는 순간, 다른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나 역시도 그렇다. 7년 전 영화감독이 돼야겠다고 다짐했지만, 공부하고 배워갈수록 꿈은 바뀌고 내 마음은 불안정하다. 다양한 영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생각이 많아졌고 사상도 바뀌었다. 영화로 행복을 추구함과 동시에 지금껏 행복하게 누리고 있던 것들과도 멀어지고 있다.


책 『데뷔의 순간』 중 변영주 감독의 글 ©이도희

이화여자대학교 동문 인터뷰 中
“저는 영화를 업으로 선택했을 때 망했다고 생각을 했어요. 저에겐 사법시험을 보고 취직을 해서 남들이 보기에도 안정적인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연봉 400만 원에 내 인생에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영화 일을 할 것인지 두 가지 선택권이 있었죠. 결국 저는 영화를 선택했는데, 결정을 하는데 있어 중요했던 것은 10년이 지나서 35살에도 이 모습이더라도 나는 불행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고민은 저에게 정말 두려운 고민이었고, 가난해지기로 결심하는 고민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모두 그런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에요.(웃음) 하지만 그 고민을 끝낸 이후로는 단 한 순간도 두려워해 본 적이 없어요. 잘 되지 않아도 그것은 이미 결의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미안한 것이, 동창들의 결혼식에 가 본 적이 없어요. 축의금을 낼 돈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그것에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스스로 다짐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그런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하는 것은 무조건 나도 해야만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하고 싶은 일 중에 나를 가장 즐겁고 미치게 만드는 것을 고르세요. 그 외의 것들은 갖고 싶지 않은 것이라고 스스로 결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일 갖고 싶고 해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취직에 대한 걱정만을 하게 되니 재미가 없어지게 된다고 생각해요. 제 말이 무조건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게 제안해보는 거예요. 이처럼 가질 수 없는 것으로부터 마음 정리를 하는 순간, 불행과 맞서는 튼튼한 심장을 갖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처럼 ‘성공이 행복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나의 심장을 튼튼하게 할 것인가가 행복을 좌우하는 것’이라는 뻔한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가질 수 없는 것, 포기한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라 모두 읽어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편집 없이 붙여넣었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고민의 갈림길에 서게 될 것이다. 그때 이 말씀을 잊지 않고 용기를 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말씀도 기억했으면.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中
“영화를 안 만든다고 내가 죽지는 않는다. 나는 영화보다 내가 더 소중하다. 나는 영화보다 내가 세상을 올바르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가 만약 어느 날 영화감독을 더 이상 못하게 되면 불행해질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내가 만약 꿈꾸는 어떤 삶이 있고 내가 세상과 손을 잡고 걸어가려는 어떤 길이 있다면 책 대여점을 하면서 꼬맹이들한테 ‘야 판타지 재밌는데 이 책 죽여~’라며 책을 권하는 걸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화차> 스틸컷

지난 학기는 내게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든 학기였다. 학기 말까지 장편 시나리오를 써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변영주 감독님의 <화차>(2012) 시나리오가 큰 힘이 됐다. 특히 주인공 캐릭터를 그릴 때가 그랬다. <화차>를 처음 보고 좋아했던 이유는 지금껏 봐온 한국 영화 속 여성 캐릭터와는 다른 쾌감을 줬기 때문이다. 스포일러라 자세히 이야기하지는 못하지만, 감독님의 책 『영화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다』에서 영화 <화차>를 통해 자기연민에 빠져 불행한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씀하셨다. 감독님께서 던지신 이 주제를 오래 생각하면서 다시 캐릭터와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게 됐다. 또한 나는 그동안 영화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굳게 믿어왔는데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한 영화 산업과 세상을 보며 슬럼프에 빠진 적이 있다. 그때 감독님의 인터뷰를 읽고 괴로움의 늪에서 서서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화여자대학교 동문 인터뷰 中
“옛날에는 영화가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제게 영화란 세상을 좀 더 바르게, 좋게 만들고 보다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지치고 힘들 때 위로를 얻는 ‘두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위로를 드리기 위해서 애쓰고 싶습니다.”

감독님은 JTBC 예능 프로그램 <방구석 1열>에서 10개월 동안 활약하시다가 영화 <조명가게>를 위해 지난 1월 25일을 마지막으로 떠나셨다. 그러면서 SNS에 글을 남기셨다.

“때때로 너무 한쪽에 치우치고 중립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 학살에 대해 이야기할 때,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혐오와 차별에 대해 말해야 할 때, 전 중립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불편하셨다면 안타깝습니다.”

©변영주 감독 트위터

나는 이 부분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감독님은 영화뿐만 아니라 부당한 사회에 대해서도 앞장서서 목소리 내고 계신다. 그래서 이런 분과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게 축복받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할 수 있는 선에서 혹은 용기를 내 선을 조금 넘더라도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면 좋겠다. 존재만으로도 큰 힘이 되어주시는 감독님께 감사드리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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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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