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일기장

영화 속 그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쥰, 윤희의 일기

<윤희에게>

정다희 / 2019-12-16


영화가 끝난 후 영화 속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혹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한 적 없으셨나요. <우리들>의 선이와 지아는 화해한 뒤 예전처럼 친한 친구 사이로 돌아갔을까요? <캐롤>의 테레즈와 캐롤은 한집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겠지요? 그들은 자신의 삶을 어떤 색깔로 채워가고 있을까요. 퍼줌이 상상력을 발휘해 쓴 그들의 뒷이야기, ‘그들의 일기’를 보여드립니다.


쥰의 일기

1996년 11월 25일 월요일 / 눈

오늘 3학년 마지막 기말고사가 끝났다. 윤희가 또 담배를 피웠다. 나보고 망을 봐달라고 해서 따라갔다. 망을 봐달라고 하지 않아도 같이 갔을 텐데. 날씨가 추워서 윤희 손도 코도 빨갰다. 손을 잡아주고 싶었지만, 누가 올까 봐 보기만 했다. 보고만 있어도 좋았다. 망은 열심히 안 보고 윤희를 봤다. 윤희는 사실 나랑 있고 싶어서 부른 거라고 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떤 기분인지도 모르면서 참을 수 없는 기분이다.

눈이 내렸다. 먼지 같은 싸락눈이었다. 하늘이 너무 희어서 누가 하늘이라고 하지 않으면 모를 것 같았다. 윤희는 담배를 쥐지 않은 손으로 카메라 프레임 귀퉁이를 그렸다. 윤희가 가리키는 곳을 보자 모든 게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누구 온다.”

골목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내가 신호를 보내자 윤희는 담배를 재빨리 끄고 나에게 달려와 한 팔로 내 목을 안았다. 옅은 담배 냄새가 확 끼쳤다. 가슴이 팔딱거렸다. 윤희는 오른쪽 볼을 내 왼쪽 볼에 붙였다. 차갑고 뜨거웠다.

  “지금부터 떨어지는 사람이 떡볶이 사주기 하자.”

나는 싫은 체 했지만 사실 너무 좋았다. 잠도 못 잘 것 같았다.



윤희의 일기

1996년 11월 25일

오늘 쥰이 떡볶이를 사줬다. 진짜 속상했는데 이제 좀 낫다. 어제 아빠가 나보고 대학 가지 말라고 했다. 아니, 대학 보낼 생각도 없었다고 했다. 오빠는 대학 갔는데 나는 왜 못 가지? 아빠는 딸년이 꿈도 크다며 코웃음을 치고 집에서 나가버렸다. 아빠는 내가 성질이 더럽다고 하지만 나는 성질이 더럽지 않아. 성질이 더러운 건 아빠다. 짜증 나. 엄마가 달래줬지만 그래도 계속 기분이 나빴다.

이렇게 속상한 날은 담배를 펴야 해. 오늘 담배를 핀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른들은 다 마음대로 하면서 나는 왜 아무것도 못 할까. 어른이 되면 다 마음대로 할 거다. 담배도 한 보루씩 사서 피워야지.

쥰은 대학에 갈 건가 보다. 나한테도 대학에 갈 거냐고 묻는데 말하기 싫어서 떡볶이만 먹었다. 쥰은 공부를 잘한다. 집도 되게 좋았다. 가끔 쥰은 다른 세계 사람 같다. 쥰은 말을 많이 안 한다.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한다. 쥰의 아빠가 일본 사람이라서, 쥰은 일본어도 한다. 쥰은 말을 꼭 너무 이렇게… 반듯하게 해. 목소리가 눈 위 발자국처럼 나한테 찍힌다. 나는 쥰에게서 일본어도 배운다. 쥰과 있으면 재밌다. 쥰과 있을 때만 세상이 올 컬러 사진이다. 오빠가 여행 가서 찍은 컬러 사진이 너무 예뻐서 주머니에 한 장 슬쩍 가져왔는데, 쥰과 있으면 세상이 꼭 그런 사진 같다.

  “쥰, 사랑이 일본어로 뭐야?”
  “응? 아이.”
  “아이? 영어 ‘아이’할 때 아이?”
  “응. 비슷.”

물어보자 쥰은 아이, 하고 입을 벌려 발음했다. 나도 아이, 하고 따라 말했다. 쥰은 얼굴이 빨개졌다. 쥰이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내 발가락이 제멋대로 꼼지락거렸다. 발가락, 너 왜 네 맘대로 움직이냐?

일기 다 쓰고 자려고 하는데 엄마가 불러서 가보니 커다란 봉투가 있었다. 백화점 포장지였다. 백화점 가본 적 없는데. 뜯으니까 카메라가 나왔다. 오빠가 지 껀 건들지도 못하게 해서 구경만 했던 카메라가, 진짜 내 카메라가 생겼다. 엄마가 나 대학 못 가는 게 속상해서 샀다고 했다. 엄마는 백화점 간다고, 평소 입지도 않는 코트를 입었다. 엄마가 나 때문에 혼자 몰래 백화점 가서 이거 산 게 속상해서 울었다. 그리고 나는 쥰이랑 대학도 못가고 이것만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속상했다. 어쨌든 다 속상하다. 카메라를 잡으니까 무거웠다. 내가 힘이 없어서 무거웠을 수도 있고. 어쨌든 까맣고 무거웠다.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다.


쥰의 일기

1996년 11월 26일 화요일 / 눈 오다가 그침

오늘은 오전 수업이었다. 학교 끝나고 윤희와 걷는데, 윤희가 나보고 골목에 서보라고 하더니 카메라를 꺼냈다.

  “사진 찍자.”
  “갑자기 웬 카메라?”
  “엄마가 사줬어. 졸업 선물.”

나는 졸업이라는 단어가 무섭다. 이제 윤희를 다시 보지 못하면 어떡하지? 무서워, 떨어지기 싫어. 윤희에게 앞으로 뭐할 건지 물어봐도 잘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그 주제는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다.

  “자자, 이쪽 보세요.”
  “보고 있어.”
  “아니, 좀 표정을, 자연스럽게 해보라고.”
  “이렇게?”

나는 입을 양쪽으로 최대한 벌리고 웃는 표정을 했다. 찰칵, 사진이 찍히는 소리가 났다. 에이, 이게 뭐야. 저쪽 가서 다시 또 찍자. 윤희는 내 소매를 잡고 질질 끌고 갔다.

  “윤희는 졸업하고 뭐 할 거야?”
  “몰라. 일단 좀 이렇게 옆으로 자연스럽게 있어 봐.”

나는 윤희가 시키는 대로 어느 대문 앞에서 다시 웃는 얼굴을 했다. 찰칵. 윤희, 만족스러운 표정.

  “이렇게 좋아하는 거 찍고, 그러고 살래.”

좋아하는, 이라는 말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럼 앞으로는? 어디서, 어떻게, 우리는… 뱉어낼 수 없는 질문들이 입안에 고여서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엉뚱한 질문을 해버렸다. 윤희는 카메라를 든 손을 내렸다. 나는 주먹을 쥐었다. 몸이 파르르 떨렸다.

  “나, 일본 갈지도 몰라. 하지만 윤희가 있는 곳에 있고 싶어.”

그 말에 윤희는 쪼그려 앉아 무릎을 안았다. 나도 너랑 있으면 진짜 좋을 것 같아. 윤희가 작게 말했다. 나도 달려가 윤희 앞에 똑같이 쪼그려 앉았다. 윤희, 울어? 아니. 그냥 다리에 힘이 없어서 앉은 거야. 나는 윤희 이마에 내 이마를 댔다. 윤희의 눈가가 빨갰다. 윤희의 입에 입술을 대자 짠맛이 났다. 윤희가 나에게 좀 더 가까이 왔다. 따뜻했다.


윤희의 일기

1996년 11월 26일

쥰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꽃으로 채운 따뜻한 물속에 잠긴 것 같았다.


쥰의 일기

1996년 12월 3일 화요일 / 흐림

윤희가 인화해준 사진을 보고 있을 때 엄마가 방에 또 마음대로 들어왔다. 화가 난다. 사진을 훔쳐보고는 예쁘다면서 앨범에 넣겠다고 한다. 사진을 숨겨 가방에 넣었다. 자꾸 윤희의 안부를 나한테 묻는다. 그냥 친구라고 해도 계속 묻는다. 내가 윤희를 좋아하는 걸 들키면 어쩌지? 차라리 나한테 관심이 없으면 좋겠다.

엄마가 자꾸 독서실에 태워준다고 해서 겨우 뿌리쳤다. 급하게 나오느라 목도리도 못했다. 독서실에서 윤희랑 만나기로 했다. 윤희는 내 옆자리를 맡아 놓고 워크맨을 빌려 노래를 듣고 있었다. 기말이 끝나서인지 방에 사람이 우리밖에 없었다. 우리는 의자를 붙여놓고 얘기하고 놀았다.

  “나 사실은 대학 가고 싶어.”
  “응?”
  “너랑 같이 가고 싶어.”
  “나도 그러면 좋겠다.”

상상만 해도 좋았다. 윤희는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쓰고 맞혀보라고 했다. 집중했는데 모르겠다. 윤희는 글씨를 못 쓴다…. 못 맞히고 우물거리자 윤희가 나를 안고 볼에 뽀뽀했다. 밖에서 독서실 총무가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는 길에 총무가 누가 맡겨놨다며 목도리를 주었다. 누가 맡기고 갔냐고 하니 그 사람이 그것만 주고 가서 모른다고 했다. 엄마가 왔다 갔나?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는 엄마 때문에 좀 짜증이 났지만 추워서 목도리를 두르고 집에 갔다.


1996년 12월 31일 목요일 / 맑음

윤희가 종업식날까지 학교에 오지 않았다.


1997년 1월 1일 금요일 / 맑음

윤희 집에 전화했더니 윤희가 아파서 전화 못 받는다고만 한다. 윤희 집에 가도 윤희가 병원에 있다고 해서 만날 수가 없다. 독감인가? 병원을 알려달라고 했더니 나는 윤희 병원에 못 간다고 했다.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보고 싶다.

오후에 도서관에서 감기 관련 의학 서적을 찾아서 읽었다. 읽는 동안 윤희 생각을 안 하고 싶었는데 계속 걱정이 된다. 병원에 있으니까 괜찮겠지?


윤희의 일기

1996년 12월 30일

집에서 학교에 못 가게 한다. 아빠가 소주병을 들고 나를 때려죽이려고 했다. 누가 나와 쥰이 뽀뽀하는 걸 봤다고 했다. 쥰이라는 애가 좀 이상한 것 같았다고, 걔가 일방적으로 그런 거냐고, 학교에 얘기한다고 했다. 쥰은 아무 잘못이 없는데 왜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까. 쥰이 그런 게 아니고 내가 쥰을 사랑한다고 했다. 아빠는 폭발했다. 나보고 정신병에 걸렸다고 했다. 엄마가 울었다. 오빠가 아빠를 막으면서 병이니까 병원 가면 낫는다고 했다.

병원 가는 차에 억지로 타니까 눈물이랑 콧물이 계속 났다. 눈물이랑 콧물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머리통 크기보다 더 많이 나온 것 같은데 계속 나왔다. 너무 계속 나오니까 내가 쥰이랑 이어져 있어서 거기 있는 물까지 다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머리가 멍했다. 정말 내가 미친 걸까?


쥰의 일기

윤희에게

윤희, 많이 아프다며?
네가 학교에 나오지 않은 동안 담임이 이상한 소리를 했어.
늘 하던 소린데, 수업은 끝났지만 앞으로도 좋은 엄마가 되려면 담배 피지 말래.
불량학생 선도는 계속 한다고도 했어.
너도 조심해. 망볼 때 나를 데려가는 거 잊지 마.
네가 빨리 나아서 이런 얘기 같이 하면 좋겠어.

사랑한다는 말이 일본어로 뭔지 알아?
愛してる.
나는 그 뜻을 알 것 같아.
분명 아는 말인데, 전에는 뜻 없이 텅 비어있었거든.

그게 채워지는 것 같아.
너도 그걸 알까?

쥰.


1997년 2월 14일 금요일 / 눈

졸업식에 윤희가 오지 않았다. 편지를 윤희에게 주고 싶어서 윤희 집 대문 앞에서 서성였다. 윤희 아빠가 나와 우편함을 확인했다. 편지는 넣지 않고 그냥 주머니에 가지고 왔다.

윤희 집에 전화했더니 아직 윤희가 많이 아프다고 했다. 걱정이었다. 윤희 어머니께 일본 아버지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일본에 당분간 있을 것 같다. 윤희와 연락이 되면 좋겠다.


1998년 2월 15일 일요일 / 비

꿈에 윤희가 나왔다. 오늘도 윤희에게선 연락이 없다.


1998년 8월 10일 월요일 / 흐림

윤희에게서 청첩장이 왔다. 가지 않을 생각이다. 봉투는 버리지 못했다. 이사를 갔구나. 윤희의 주소가 이전과 달랐다. 그곳에서 윤희는 어떻게 지낼까? 궁금하지만 차마 가보진 못할 것 같다. 



쥰의 일기

2019년 11월 28일 목요일 / 눈

오타루는 오늘도 눈이 많이 온다. 언제쯤 눈이 그칠까? 그전에는 고모가 실없는 소리 한다고 생각했지만 윤희가 온다고 생각하니 눈이 잠시 그쳤으면 바라게 된다. 윤희가 오늘 입국한다고 해서 데리러 갈 생각이다. 쿠지라가 몸을 부비고 있다. 쿠지라, 너도 윤희 만나면 반가워 해줘. 고등학교 때 쓴 일기장에서 편지를 발견했다. 이번엔 윤희에게 직접 편지를 주고 싶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꿈이 아니니까.


윤희의 일기

2019년 11월 28일

한 시간도 안 되는 비행인데 새봄이가 인천공항까지 따라왔다. 나더러 이것저것 사달라고 무슨 리스트를 줬다. 오타루 주변 핫플? 이라나, 그런 곳들이 열 개나 적혀 있었다.

  “아니, 엄마, 그런 데 가면 되게 좋아. 막 분위기도 엄청 쩔어.”
  “내가 지금 그런 데 갈 나이니?”
  “엄마 나이가 뭐 어때서. 엄마 요즘 완전 좋아. 완전 이뻐. 나 엄마 딸이어서 인기 개 많잖아.”
  “갑자기 왜 네 자랑질이야? 엄마 배웅하러 와서.”

출국 게이트로 들어가려니 새봄이 뒤에서 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새봄이 덕분에 긴장이 누그러졌다가 비행기에 앉으니 또 긴장이 됐다. 아픈 것도, 나쁜 것도 아닌데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어질했다. 쥰을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할까. 새봄이 이야기? 새 직장 이야기? 아니, 사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얼마나 너를 그리워했는지, 얼마나 너를 사랑했는지 그런 말들. 흘린 눈물만큼 채워야 할 이야기들.

눈을 감았다. 이제 언제든 꽃으로 가득한 물속에 잠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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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그들의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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