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일기장

영화 속 그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지영, 미숙, 지석의 일기

<82년생 김지영>

윤혜은 / 2020-01-09


영화가 끝난 후 영화 속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혹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한 적 없으셨나요. <우리들>의 선이와 지아는 화해한 뒤 예전처럼 친한 친구 사이로 돌아갔을까요? <캐롤>의 테레즈와 캐롤은 한집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겠지요? 그들은 자신의 삶을 어떤 색깔로 채워가고 있을까요. 퍼줌이 상상력을 발휘해 쓴 그들의 뒷이야기, ‘그들의 일기’를 보여드립니다.


지석(동생)의 일기

2020년 8월 15일 금요일

가게를 오픈하자마자 이른 점심으로 매운 해장죽을 먹었다. 엄마는 냉장고에서 작은 반찬 통을 꺼내 내 앞으로 슥 밀더니 눈치를 보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뚜껑을 여는 것도 귀찮아 그대로 테이블에 엎드렸다. 김치와 장아찌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술은 걔가 마셨는데 왜 내 속이 울렁거린대. 엄마도 부엌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자 친구랑 놀러 간다더니 왜 죽상을 하고 앉아 있대….

 “술도 잘 못 마시는 놈이 웬 해장죽이야? 새벽에 들어온 것 같더니만 어제 술 마셨던 거야?”

엄마는 멀쩡한 바닥을 쓸면서 세상 관심 없다는 듯 물었지만 목소리에 호기심이 잔뜩 묻어 있었다.

 “아니 그냥, 좀 개운한 게 먹고 싶어서. 바닥은 깨끗한데 뭘 자꾸 쓸어. 이따가 내가 할게.”

엄마는 ‘곧 손님들 올 텐데 언제?’라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 봤다.

어제는 수민이가 나를 약간 돌게 했다. 아직 자는 건지 연락이 안 돼 나를 물 먹이고 있지만. 수민이네 회사는 8월 초에 전 직원이 일괄적으로 여름휴가를 써야 하는데, 휴가 기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체회식이 잡혔다면서 아마 그날은 단단히 늦을 거라고 며칠 전부터 걱정을 했다.

 “큰 맘 먹고 가는 호캉슨데, 하필 전날에 회식이 잡혀서 미안해. 내가 숙취해소 음료도 완전 비싼 걸로 챙겨 마시고 눈치껏 일찍 빠질게.”

광복절, 그러니까 오늘은 우리의 1주년이다. 으레 주고받는 선물 대신 추억으로 남을 만한 기념으로 영종도에 있는 부띠끄 호텔을 예약해두었건만, 지난주 토요일과 다를 바 없이 엄마와 가게를 지키고 있다.

 “아니 글쎄, 미투 때문에 요즘 회식을 안 한대잖아. 그래서 고깃집이 줄줄이 문을 닫는대. 그걸 말이라고 해? 아니 이제는 경기가 나빠진 것도 여자 때문이야? 어?”

가게를 마감하고 수민이를 데리러 갔을 때, 수민이는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회사의 단골 고깃집 사장님이 오랜만이라 반갑다고 직접 고기를 구워주면서 기껏 저런 말을 내뱉은 모양이었다. 사장님의 실없는 농담보다도 웬 아저씨의 헛소리에 화가 나서 술을 연거푸 들이켰을 수민이에게 더 화가 났다.

 “그런데 오빠 있잖아, 부장님이 계산하려고 카운터에 서 있는데 사장님이 막 아이쿠 이제 들어가시게요? 감사합니다아 이러는 거야. 평소엔 되게 사람 좋은 얼굴로 웃는 분인데 그게 되게 얄미운 거 있지?”

수민이는 술을 마시면 말이 빨라지고 목소리가 커진다. 그게 참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만은 예외다. 수민이가 말할 때마다 진한 알콜 냄새가 풍겼다. 푸우우 수민이는 답지 않게 잔뜩 짜증이 난 얼굴이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뭐가 꼬여서 오늘 이러는 건지, 대충 달래주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긋거리는 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여름이라 얇고 짧은 옷가지가 신경 쓰인 참이었다. 얘는 회식인 거 뻔히 알면서 굳이 치마를 입고 갔냐.

 “그래서 말이야, 내가 나가면서 오늘 많이 파셨으니까, 저희 덕 보신 거예요 사장님! 저희 부서가 거의 여자들인데요, 술도 고기도 제일 비싼 걸로만 많이 시킨 거 아시죠~ 이러고 나왔어. 나 잘했지?”

그렇게 말하고선 수민이는 활짝 웃어 보였다. 일부러 과장해서 웃는 것 같았는데 그 모습이 좀 속상해 보였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으면서도 왜 그 순간 그 말이 튀어나왔을까.

 “아이 그렇게까지 할 필욘 없었잖아. 오늘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회식 때 무슨 일 있었어?”

나야말로 이 말을 할 필요는 없었는데. 내 손끝을 잡고 장난치듯 비틀거리며 걷던 수민이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해야 하는 말이 그게 아니라는 듯, 말없이 되묻는 얼굴. 나는 허둥지둥 말을 고르다 아마도 가장 최악의 답을 하고 말았다.

 “아, 아니다. 사장님이 잘못했다 잘못했어. 사장님이 미투로 고소를 당해봐야 그런…”

오빠, 좀 닥쳐. 술 좀 깨고 집에 들어가야겠다던 수민이는 내 말에 갑자기 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말했다. 평소처럼 차분한 말투로, 사실은 중저음에 가까운, 귀에 가장 익은 목소리로 뱉은 가장 낯선 말이었다.


지영의 일기

2020년 10월 8일 목요일

동네 책방에서 또래 작가의 신간을 읽었다. 동네 책방이라기엔 마을버스를 타고 이십 분 정도 가야 하는 거리이지만, 자그마한 공원 한켠에 위치해 있어 전체적으로 조용한 분위기라 한눈에 마음에 들었다. 카페를 겸하는 이곳엔 생각지도 못한 어린이용 카푸치노가 메뉴에 있다. 노키즈존이 아닌 것만 해도 다행인데 어린이용 메뉴라니. 처음 혼자 갔을 땐 메뉴판에 적힌 베이비치노의 정체가 궁금해 물었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덕분에 나도 아영이와 한 잔씩 나눠 마시면서 따뜻한 우유 위에 풍성한 우유 거품과 초코 파우더를 솔솔 뿌린 베이비치노의 맛을 새로이 알게 됐다.

아영이가 어린이집에 있을 시간, 방앗간을 가듯 책방에 들렀다. 이제는 사장님이라는 호칭보다 이름을 부르는 게 더 익숙해진 책방지기, 유경 씨가 어제 들어온 신간이라면서 책 한 권을 추천했다. 책방 주인이지만 좀처럼 책 추천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그녀인데, 드문 일이었다.

완연한 가을은 봄보다도 부드럽고 더운 공기를 몰고 와서, 오늘은 레몬에이드를 주문했다. 창가에 등을 기대고 유경 씨가 추천한 책을 펼쳤다. 책날개에 적힌 프로필을 보니 또래 작가다. 데뷔작인가?

과연 내 손에 쥐어진 산문집은 그녀의 지난 일기들을 그러모은 첫 책이었다. 에세이에 가까운 일기여서 처음엔 독특한 재미를 주었다. 그러다 이내 행간 사이사이 너무 많은 감상이 뒤따라 작게 숨을 몰아쉬며 읽어야 했다. 기분은 흡사 밀도 높은 단편 소설집을 읽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반경 5m면 충분할 만큼 생활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를 쓰면서도 깊고 아득한 글을 풀어냈다. 꼭 활자 하나하나를 엮어 만든 카펫 위에 올라타 그녀의 세상을 이리저리 유영하는 독서가 이어졌다.

쪼로록. 종이 빨대에 더 이상 음료가 빨려 들어오지 않고 빈 얼음 소리만 요란하게 났다. 책은 어느새 중반부에 다다랐고, 아영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와야 할 시간도 곧이었다. 유경 씨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못할 만큼 몰입해서 읽었나. 나도 모르게 책을 소리 나게 덮었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유경 씨가 이제 가려고 하냐는 듯 나를 바라봤다. 서둘러 책과 음료를 계산하고 책방을 나왔다.

질투가 나는 글들이 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타인의 생활이 아닌 글을 질투하게 되었으니 차라리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다. 글은 생활을,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대하는 그들의 시선에서 나오는 것이니 더 분하다. 내 생활이 결코 좁고 얕아서가 아니라, 내가 겨우 요만큼밖에 풀어내지 못한다는 걸 더 생생하게 맞닥뜨리게 되니까.

계속 쓰자. 더 많이 읽고, 더 오래 쓰자. 내가 더 나이기를 바라는 글 말고, 내 주변을 더 다정히, 더 자세히 바라볼 수 있도록. 열패감이나 열등감을 느끼는 나와는 조금씩 거리를 두고서…….


2023년 4월 11일 월요일

아영이를 등원시키고 돌아가는 길, 선생님의 손을 잡고 씩씩하게 손을 흔드는 아영이를 떠올린다. 방금 막 데려다 놓고선 금방 또 보고 싶다. 주변 엄마들은 아영이의 의젓함을 부러워한다. 말하자면, 아영이는 엄마와의 이별에 익숙해 보인다. (지나친 비약일까)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면서도 전업주부라 할 수도, 워킹맘처럼 명함을 들이밀 수도 없는 애매모호한 내 처지를 아영이는 어느 순간부터 마치 다 이해한다는 듯 굴었다. 아영이를 바라보는 내 눈에 덧씌워진 환상일지도 모른다. 아영이가 자주 울고, 물건을 함부로 어지럽히고, 내 품에서 도무지 떨어질 줄 모르는 아이였어도 내 자식에게 이런 연민 같은 감상을 가졌을까 의심스럽다.

아영이가 내 곁에 가만히 다가와 커다란 동화책을 펼치고 눈으로 그것을 읽고 있으면 나는 기특하다기보다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든다. 어디선가 부모는 자식을 영원히 짝사랑하는 존재라고 하던데, 난 가끔 아영이가 나를 짝사랑한다고 느낄까 봐 무섭다. 따뜻한 냄새가 묻어 있는 아영이를 꼭 안고 있으면 그 순간 말고는 이 세상에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어진다. 그리고 나는 그런 감정이 아직도 조금 낯설고 무섭다. 아이를 키우다보면 오히려 내가 종종 어린 아이가 돼버린다. 아영이는 자꾸만 자라는데, 나는 계속 제자리인 것 같다. 선배 작가가 모 문예지와의 인터뷰에서 ‘내 아이가 자라서 스물이 되고 서른이 될 텐데 내가 얘보다 미숙한 존재로 계속 남아 있으면 어떻게 하지. 겁이 덜컥 났어요’¹라고 말한 것을 나는 몹시 공감하며 사진으로 찍어 두었다.

휴대폰에 저장된 그 인터뷰를 곱씹으면서 문득 생각했다. 나는 아영이에게 정말로 좋은 사람이 되고 싶구나. 좋은 엄마, 좋은 어른, 혹은 좋은 작가 같은 거 말고 언제까지고 이 아이에게 한 명의 좋은 인간이고 싶다고, 일기장을 빌려 말장난을 해본다. 아영이가 차마 나에게는 털어놓지 않는 비밀을 공유할 단짝이 생겼을 때에도, 비로소 짝사랑하기에 좋은 상대를 발견했을 때에도, 그렇게 아영이가 점점 더 나를 쉽게 잊는 순간이 더 많아질 때에도 아영이에게 좋은 사람이 돼 주어야지.


미숙(엄마)의 일기

2021년 2월 3일 수요일

오늘은 난생처음 수강신청이란 걸 해봤다. “엄마가 뭘 몰라서 그래. 수강신청은 티켓팅이라 다름없다니까?”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나를 끌고 지석이는 기어이 집 앞 PC방으로 향했다. PC방으로 녀석을 잡으러 다니러만 몇 번 가봤지, 생전 이런 데에 또 올 줄은 몰랐다. 벌써 십수 년도 더 된 일이다. 환갑이 다 지나서 아들의 팔짱을 끼고 쭈뼛 걸어들어와 대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엄마, 엄마 학번이 뭐야?”
 “로그인은 엄마가 할게.”

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과 52212460 오미숙.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듯, 지영이의 전화번호를 외듯 학번을 입력했다. 이렇게나 머릿속에 착 붙는 숫자가 있었던가. 문득 동생이 고등학교 선생님이 될 때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내가 떠올랐다. 언니와 함께 방직 공장에 다니던 시절보다 겨우 고졸로 만족해야 했던 그때의 내가 가장 사무쳤다. 그즈음 가족과 친척 어른들은 언니와 나를 ‘이제 됐니?’라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지.

두 번째 책 출간을 앞두고 지영이가 파주의 게스트하우스에 일주일을 머물 때에, 나도 이틀을 그곳에서 보냈더랬다. 지영이가 건네는 커피를 마시면서 대학에 합격했다는 문자를 확인했다.

세 아이들을 전부 대학까지 길러 놓았을 때, 집을 장만했을 때, 가게를 꾸렸을 때, 그럴 때마다 내 운은 이미 다 했다고 생각했다. 겉으론 악착같이 삶을 붙들었어도 속으로는 최악을 각오하느라 늘 조마조마했다. 깊이 바라되, 쉬이 기대하지 못한 일들은 다행히 늦게라도 우리 가족에게 도착했다.

지영이에게 문자를 보여주고, 지영이가 대학 홈페이지에서 한 번 더 합격 사실을 확인했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되뇌었다. ‘내 운은 여기서 다했다. 이걸로 되었다’라고. 지영이의 마음이 나았을 때, 낫기뿐만이 아니라 훨훨 날아 작가 선생님이 되었을 때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그만큼 내게 완벽한 아침이었다.

지영이가 그렁그렁한 눈을 닦으면서 장난스레 물었다.

 “엄마, 지금 기분이 어때? 막 할 수만 있다면 과거의 자신한테 텔레파시를 마구 쏘고 싶지 않아? 결국 이렇게 해냈다고!”
 “음…. 아니, 과거의 미숙이는 오늘을 모르는 편이 낫겠어. 그때의 미숙이가 조급하게 기대하고 순진하게 희망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다. 오늘은 오늘의 미숙이에게 가장 의미 있는 하루야. 엄마는 지금이 너무 좋다 지영아.”

대학을 가겠다고 결심하도록 북돋은 것도, 교육학과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도, 지석이와 남편이 가게를 도맡게끔 설득한 것도 지영이었다. 교육학과는 출석 수업의 비중이 높은 학과이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었더라도, 심지어 내가 대학에 떨어졌더라도 지영이는 가게 바깥으로 내 등을 은근히 밀어주었을 것임을 안다. 그래서 지영이에게 참 고마웠다. 키울 때에는 둘째가 제일 아픈 손가락이었는데, 지영이는 그 손에 몇 번이고 반창고를 붙여주는 딸로 자랐다. 고맙고 귀한 내 딸.

 “엄마, 오늘 그냥 하루 더 자고 가라. 응? 어차피 대학 다니면 가게 거의 못 나갈 텐데 미리 연습한다고 생각해.”
 “그럴까?”

침대에 누워 지영이와 게으르게 책을 읽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정말로 학교에 갈 일만 남았다. PC방을 나오면서 지석이가 무슨 수업이 제일 기대되냐고 물었다. 글쓰기 교양이라고 답하자 우리 집에 작가가 또 나오겠어, 한다. 오늘이 입춘이라는데, 이미 봄 한가운데에 있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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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가 윤이형, 악스트(Axt)(2019 3/4월호) 인터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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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 인터뷰어이자 14년차 일기인간.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어떤책, 2020)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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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그들의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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