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일기장

영화 속 그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무니, 바비, 핼리의 일기

<플로리다 프로젝트>

윤혜은 / 2020-03-19


영화가 끝난 후 영화 속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혹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한 적 없으셨나요. <우리들>의 선이와 지아는 화해한 뒤 예전처럼 친한 친구 사이로 돌아갔을까요? <캐롤>의 테레즈와 캐롤은 한집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겠지요? 그들은 자신의 삶을 어떤 색깔로 채워가고 있을까요. 퍼줌이 상상력을 발휘해 쓴 그들의 뒷이야기, ‘그들의 일기’를 보여드립니다.


무니의 일기

2045년 7월 30일 

핼리를 다시 만난 건 장례식장에서였다. 오래된 성당은 엄마와 영 어울리지 않았다. 아마도 바비의 도움이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관 속에 누워 있는 엄마는 하이웨스트 청반바지와 노란색 민소매티를 입고 있었다. 어깨의 끈 부분이 끊어질 듯 얇았다. 배 위에는 뒤집어진 캡모자 안쪽으로 빈 담뱃갑과 기름 없는 라이터(엄마는 죽어서도 담배와 불을 빌리러 다닐 처지가 되었다)가 놓여 있었다. 누가 입혀주었을까? 누가 엄마의 20대를 이토록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을까? 틀림없이 애슐리의 작품인 것 같았지만 모른 체했다. 나도 모르게 핼리의 팔다리를 훑으며 주삿바늘의 흔적을 찾다가 속으로 욕을 씹었다. 무니이! 핼리가 눈치 챘다면 장난스레 눈을 흘기며 내 이름을 불렀을 것이다.

여름의 혈기왕성한 햇볕이 성당 안에 마구잡이로 들이닥쳤다. 안 그래도 빛바랜 문신 위를 보란 듯이 비추는 바람에 총천연색이 한 겹 더 벗겨질 것 같았다. 한때 핼리가 온 몸으로 품고 있던 색깔은 핏기 없는 그의 얼굴처럼 채도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는 이미 많은 것을 잃고도 더 잃을 게 남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핼리의 생에 깃든 끈질긴 악착같음에 환멸이 났다. 그저 장례식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가 무엇을 더 잃어버리기 전에 관 뚜껑을 덮고 싶었다. 그건 나만이 바랄 수 있는 기도 같은 거였다.


2045년 8월 10일

핼리는 허리케인으로 외출금지가 내려졌을 때 몸을 팔러 나갔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경찰이 전화로 일러주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나는 핼리가 죽었다는 사실보다 그의 생애 마지막 스케줄이 몸을 파는 일이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핼리가 좀 충동적이긴 해도 바보는 아니니까. 아니, 충동적이란 말도 취소다. 그만큼 삶을 계획적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단지 계획을 세우는 게 무의미했을 뿐이다. 핼리의 계획보다 세상의 계획은 더 견고했고, 세상은 그를 계획적으로 망치는 데 능통했다. 핼리가 자신을 지키려는 계획은 언제나 그보다 느리고 또 약했다.

핼리 자신이 그걸 몰랐을 리 없다. 그러니 핼리가 허리케인에 휩쓸려 죽었다면, 그건 분명 그의 계획이었을 거라고, 나는 확신했다. 마침내 핼리는 오랜 시간 세상과의 계획 다툼에서 승리한 것이다. 전화를 끊고 나도 모르게 조금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니 핼리의 부고는 독립기념일에 전해졌던 것이다. 이제 7월 4일을 나는 핼리의 자유와 독립의 날로 기억하게 됐다. 이건 핼리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계획이었을 것이다.


2032년 1월 

엄마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공평하게 나도 엄마를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그럴 수가 없어 분하다. 이제 나를 그냥 핼리라고 불러도 좋아, 라고 말하는 10년 전 엄마의 목소리와 표정 하나까지도 생생히 기억할 수 있다. 그날 엄마는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팔과 다리가 조금도 드러나지 않은 옷을 입었고, 구두까지 갖춰 신었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나의 경우 아동국에서 단장을 해주었으므로, 조금 더 촌스럽고 과하게 귀여운 스타일로 꾸며졌다. 그날의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멀끔해보였지만 어딘가 패배자 같은 분위기를 숨길 수 없었다.

내가 용케도 그날의 분위기를 지우고 무럭무럭 자라는 동안, 엄마는 그날의 분위기에 압도당했나보다. 내가 완전히 입양 보내진 후, 엄마가 줄곧 자살시도를 했다는 걸 이제야 알아버렸다. 연거푸 자살에 실패한 대가로 엄마는 기억을 잃었다. 내 생각엔 ‘잃었다’라는 수동적인 결과보단 ‘스스로 지웠다’라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 같았지만, 아무튼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기억을 잃었어요. 하지만 정작 엄마는 어딘가 천진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으므로, 나는 이것이야말로 엄마가 원한 일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마치 어느 날들의 내가 자주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엄마는 먼 훗날에라도 나를 보기 위해 어떻게든 삶을 살아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 있는 모든 순간에 내가 곁에 없다는 걸 확인받아야 했겠지. 그러면 어김없이 욕조에 물을 받고 싶어지고… 욕조에 물이 찰수록 나를 빼앗긴 기억들이 떠오르고…. 아무래도 엄마는 살아서 나를 보기 위해 나를 잊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물론 엄마가 잊은 게 나뿐만은 아니지만.


엄마는 나를, 우리의 그 많은 향수들을, 지긋지긋한 바비를, 우리가 마지막으로 먹은 만찬을 모두 잊었다. 애슐리나 스쿠티, 메이플 시럽이 있거나 자주 없던 와플 박스, 바나나 가슴을 달고 다니는 글로리아, 빼빼 마른 젠시를 잊는 건 더욱 쉬웠다. 엄마가 이 모든 것을 하나씩 지워갔을 모습을 상상하니 언젠가 저 멀리 디즈니랜드의 폭죽놀이를 함께 바라본 밤이 떠올랐다. 힘차게 떠올라 팡, 하고 사라져버리는, 깜깜한 밤하늘 사이로 완전히 흩어져버리는 기억들….

엄마에게 나를 다시 설명하려니 막막했다. 그건 꼭 친구들에게 ‘매직캐슬’을 설명하는 일과 같았다. 사람들은 플로리다에서 디즈니랜드만을 기억했다. 친구들은 나를 이야기꾼이라고 부르면서 친해지고 싶어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낙담했다. 이 아이들의 상상력이란 겨우 그 정도였던 것이다.

엄마는 나의 자기소개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엄마와 다시 친해질 수 있다는 신호였으므로, 이번에는 낙담할 필요가 없었다.

안녕 핼리, 나는 무니라고 해. 딸기랑 라즈베리를 좋아해. 동시에 먹으면 어떤 맛이 나는지 알지? 또 나는 어디에서든 갓 구운 베이컨과 갓 졸인 따뜻한 시럽을 왕창 추가해 먹는 걸 좋아해. 물론 그럴만한 돈도 좀 있고 말이지. 참, 나는 당분간 매직캐슬 323호에 머물까 해. 그런데 거기 뷰가 끝내주게 멋지긴 하지만, 서비스가 좀 후지잖아. 그래서 말인데, 나랑 칼립소 모텔에 조식 먹으러 안 갈래? 여기까지 오느라 배고팠거든. 오늘은 내가 살게! 우리 가장 좋아하는 향수를 서로에게 뿌려 줄까?


바비의 일기

2020년 1월 27일

원래도 깊은 잠을 자기는 글러 먹은 인생이지만, 부쩍 잠들기가 어려운 요즘이다. 덕분에 수영장을 등지고 서서 매직캐슬의 앞모습을 바라보는 취미가 생겼다. 달빛 속에 잠긴 매직캐슬은 낮보다 조금 더 음울해 보인다. 저 안에서 나의 쓸쓸한 이웃들이 잠들어 있다. 물론 나처럼 여태 깨있거나 불현듯 깨어난 이도 있을 테다. 그냥, 모두 어서 잠들었으면. 

이런 밤에는 언젠가 우연히 마주쳤던 아내가 한 말이 생각난다. 누구에게나 죽은 물고기처럼, 자연히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기 마련이다. 건져내려면 나도 하는 수없이 물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당신은 아직도 우울이 깊네.

그 말을 나는 비웃었었지. 아내는 매직캐슬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더럽고 위험한 것들을 격리시키는 수용소쯤으로 생각했다. 이웃을 변호하느라 줄곧 가족에게 등을 보였었지. 이렇게 매직캐슬을 가만히 마주 보고 있으니 등 뒤에 꼭 아내가 서 있는 것 같다. 팔짱 낀 두 팔 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그때는 뭔가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모두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들은 점차 끝나갈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매직캐슬에도 아름다운 순간들이 더러 있었겠으나 포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것에 욕심을 내고 품 안에 가두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다. 경비 지출서를 쓸 때마다, 투숙객들이 놓친 품위를 대신 수거하기 위한 비용이 측정되어 있으면 좋겠다고 자주 생각했다. 이것도 우울이 깊은 탓일까?

더는 죽은 물고기가 떠다닐 일 없는 수영장이 오늘따라 아찔해 보인다.


핼리의 일기

2011년 6월 30일

열흘째 생리 소식이 없다. 이대로 영영 그 소식을 모를 수 있다면 좋겠다. 적어도 여름만이라도 생리가 눈치껏 꺼쳐주었으면. 어차피 지금은 탐폰 살 돈도 없다. 주급 들어오는 때에 맞춰서 하려나? 몸이 제일 먼저 가난을 고려한다.

날짜 없음

XX 불안해.


2011년 7월 6일

아침부터 테스트기를 찾느라 애를 먹었다. 언젠가, 아마도 여유 있을 적에(그러니까 엄청나게 오래 전에) 여러 개 사두었는데(어쩌면 애인들에게 사오라고 닦달했을지도)…. 그 무렵 다행히도 매번 임신을 피해갔던 터라, 틀림없이 여분이 남아 있을 것이다.

마침내 침대에 딸린 서랍장 구석에서 두 개의 새 테스트기와 한 줄이 그어진, 이미 사용한 테스트기를 발견했다. 더럽게 이걸 왜 여기다 보관한 거지? 혹시 나중에라도 줄 하나가 더 그어질까 봐 무서웠던 거야? 

어느 날의 내가 귀여워서 조금 울었다.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눈물이 저절로 흘러서 울어버렸다.

2011년 7월 9일

임신.

두 개 모두 두 줄이다.

태아 성별 테스트기는 임신 10주 후에야 쓸 수 있다는데 지금이 몇 주차인지 알 수가 있나. 아니지, 중요한 건 성별 따위가 아니다. 솔직히 임신 그 자체도 아니다. 나 같은 인간이 단지 하나가 아니라 어쩌면 둘, 세상의 운이 좀 더 나쁠 경우 셋이나 더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다. 그래도 설마……쌍둥이는 아니겠지? 제발.


날짜 없음

보통 이럴 때 병원은 누구랑 가야 하나? 혼자 가도 되나? 뭐, 아픈 것도 아니지만. 그냥 혼자 왔냐며 측은한 표정으로 몸을 훑는 의사만 없었으면 좋겠다. 아예 여자 의사를 배정해달라고 요구해야지. 요즘은 왠지 몸에 자주 기합이 들어간다.

날짜 없음

이름을, 뭐라고 지으면 좋을까?

음……나중에 애가 이름을 왜 이렇게 지었냐고 따지면 어떡하지? 나도 내 이름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처럼.

그럼 네가 다시 지으라고 하지 뭐.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갑자기 생각났음.

‘얘야, 나는 네가 뭐라고 하든 널 존중할 거란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존나…… 요즘 나 너무 웃기네. 

그래서 이름은 뭐라고 짓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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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ZOOMER

프리랜서 인터뷰어이자 14년차 일기인간.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어떤책, 2020)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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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그들의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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