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일기장

영화 속 그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찬실, 소피의 일기

<찬실이는 복도 많지>

정다희 / 2020-04-23


영화가 끝난 후 영화 속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혹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한 적 없으셨나요. <우리들>의 선이와 지아는 화해한 뒤 예전처럼 친한 친구 사이로 돌아갔을까요? <캐롤>의 테레즈와 캐롤은 한집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겠지요? 그들은 자신의 삶을 어떤 색깔로 채워가고 있을까요. 퍼줌이 상상력을 발휘해 쓴 그들의 뒷이야기, ‘그들의 일기’를 보여드립니다.


찬실의 일기

2020년 4월 2일 목요일 

   -언니, 일은 어쩌려고. 마스크는 있어? 갖다 줄까?

뉴스에서 난리가 났다. 전염병 때문이다. 소피네는 당분간 안 나가기로 했다.  

  -괜찮다. 일은 온라인으로 할 수 있는 거 찾아볼라고. 내야 걸리면 모르겠는데 할머니가 걸리면 어떡하노.

쉰다는 말에 소피는 며칠 잠잠했다. 그러다 우리 집에 오고 싶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답장을 안 해도 재차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나 배우야. 외출할 때마다 사람들 피해 다니는 건 자신 있어. 전에 닌자 수련하는 사람한테 은신 수업도 들은 적 있거든? 나 천장에 붙어서 사람 피할 수도 있어.

  -웬만하면 오지 마라. 나는 집에서 할머니랑 밥 잘 해묵는다.

  -마스크도 공항용, 거리용, 해외용 따로 쟁여 놓거든? 색깔도 여러 가지 있어. 할머니는 무슨 색 좋아하셔?

  -쫌!


이쯤 되니 나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답답함에 몸을 비틀어 제끼는 소피의 모습이 떠올랐다. 잠도 안 자는 거 아닌가? 집에서 앞구르기, 뒷구르기, 폴댄스도 하는 거 아닌가? 촬영이 없어졌나? 마음이 약해지려던 차에 대화방에 불쌍한 표정 이모티콘이 올라왔다. 

  -이모티콘 보낼 정신 있으면 가만히 니 연기에 대해 생각을 해봐라.

안전하게 있어야 다음 작품도 하고 그랄낀데. 소피가 내 말을 들을 것 같지는 않았다. 답장을 보내고 다시 컴퓨터 화면에 눈을 고정했다. 이번 주에 새 시나리오를 완성할 예정이다. 공모전에 내보고, 지원금도 신청해볼 작정이다. 작업 중간에 영이에게 보여줬다. 기대는 안 했지만 영이 “좀 지루하네요, 누나”라고 말해서 솔직히 실망했다. 크리스토퍼 놀란한테 메일 보내서 따지고 싶다. 도시 한복판에서 쫄쫄이 입고 총질하고 남의 꿈에 들어가고 자동차 추격극을 하는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인가 묻고 싶다. 인생은 재미없게 매일 하는 시답잖은 일들이 모여 있고 그래서 아름답다. 이걸로 토론해보면 좋겠다. 그렇지만 놀란이 한국어를 못할 것 같아서 메일은 잠시 미뤘다.

  -언니, 시나리오 써?

  -ㅇㅇ. 니 전에 우리 집에서 읽다가 자대?

  -그건 촬영 갔다 와서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했잖아.

  -변명하지 마라.


영화가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 글을 매일 쓴다. 잘 나오면 기분이 좋다. 입에 밥알도 술술 들어간다. 안 나오면 인생 망했다 싶다. 밖에 나가 걷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되니까 방에 들어갔다 나갔다 한다. 마당에서 체조도 한다. 집주인 할머니는 별 짓을 다 한다고 혀를 차더니 어제부터는 같이 체조하기 시작했다. 

  “찬실아, 와서 이것 좀 봐줘.”

  “예.”

할머니가 불러서 거실에 나갔다. 지지난 달에 할머니랑 휴대폰 대리점에 가서 폰을 하나 샀다. 문화센터에 못 나가는 동안 문화센터 선생님, 문우 분들과 매일 카톡 방에서 글을 주고받으시기로 했단다.

  “이거, 내 문센 친군데, 얘가 뭐라고 쓴 거야?”

  “코떼까리파가... 피가나써요. 모드 조심하새오.”

  “나도 읽어는 봤는데 무슨 암호 같애. 그게 무슨 말이야?”

  “심심해서 코떼까리 파셨다가 피가 나셔서 모두 조심하랍니다.”

  “코떼까리 팔아? 코끼리 팔았다고 말하는 거야?”

  “아니요, 코떼까리는 코딱지예요. 사투리로요. 코딱지 팠다고요.”

  “아니, 코떼까리가 코딱지면, 사투리로 딱지치기는 떼까리 치기야?”

  “그런 건 아니에요. 딱지는 떼까리라고 쓸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어요. 밥떼까리는 밥알이고요.”

  “아휴, 한글 너무 어려워. 이렇게 들으면 또 금방 알겠는데 글자로 보면 또 한참 봐야 알아. 사투리도 알아야 하고. 아유, 머리야.”

할머니는 투덜거리다 슬며시 웃었다.

  “그래도 웃으시네요.”

  “오늘 또 하나 알았잖아. 코떼까리. 하루에 하나씩 아는 거. 그만한 보람이 어딨냐.”

할머니는 코떼까리라고 공책에 크게 써 두었다. 그거 표준어도 아니니 쓰지 말라고 하자 “내 친구랑 네가 쓰는 말인데 알아야지” 하고 엄포를 놓았다. 그리고 할머니는 대화방에 오늘 반찬을 써서 올렸다. 냉이된장찌개를 냉미된장끼개라고 썼다가 고쳤지만 훌륭했다. 냉이된장찌개, 콩나물무침에 밥 먹었어요. 다들 아프지 말아요. 다음에 만날 때는 많이 웃어요.


소피의 일기

2020년 4월 2일 목요일

일기를 써본 적이 없다. 일기장을 처음 꺼냈다. 스페인 여행 갔을 때 산 일기장이다. 멋져서 샀다. 무슨 말 쓰지? 가나다라마바사. 프랑스어 연습해야겠다. 

Je ne peux pas agir.

나는 연기를 못합니다.

(이 뒤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다.)


찬실의 일기

2020년 4월 3일 금요일

아침에 좌우로 구르다 벌떡 일어나 이불을 갠다. 방바닥을 쓴다. 아무 데도 안 나가도 먼지는 매일 있다. 머리카락까지 손으로 싹 잡아서 쓰레기통에 털어 넣는다. 기지개를 켜면서 마당으로 나가면 집주인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는 마당에 있는 식물들을 요리조리 살피고 있다. 내가 하는 박자에 맞춰 둘이 몸을 움직인다. 핫, 둘, 셋, 넷. 중간쯤 가면 할머니도 작게 박자를 센다. 양손을 깍지 끼고 하늘 위로 번쩍 들면 아야야 소리가 나온다.

다 하고 나면 아침을 준비한다. 오늘은 내가 팬케이크를 만들기로 했다. 매일 할머니가 더 많이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가루를 개어 후라이팬에 굽는다. 금방 거품이 뽀글뽀글 올라왔다. 고소한 냄새가 집안에 퍼진다. 우리는 잘 먹고 텔레비전을 켰다. 확진자가 86명 늘었다. 그 중에 나와 할머니가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슬프다. 누군가의 할머니거나 누군가는 어딘가의 나이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을 끄고 할머니는 공책을 꺼내고 나는 방에서 노트북을 켰다. 조금 지나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잠깐 거실에서 한글 공부를 돕는다. 점심은 파절임과 쑥두부무침이다. 점심 먹고 설거지를 했다. 할머니는 대문 쪽을 바라보고 가만히 서 있었다. 나도 옆에 섰다. 할머니는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나도 그렇게 했다.


소피에게 문자가 왔다. 소피가 라이브 방송을 시작했다고 했다. 잠깐 들어가 보니 집에서 하는 폴댄스 연습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집에 폴이 없는 걸 깜빡했다며 기타 치는 라이브로 바뀌었다. 화면을 끄고 누워 음악을 들었다. 세상이 멈춘 것 같은데 시간이 가는 게 신기했다. 결국 하루를 잘 살아내야 했다. 뭐가 잘 사는 건지는 모르겠다.

노트북을 끌어다 놓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게 뭔지 모르겠지만 써냈다. 다 쓴 글을 덮어두고 마당으로 나왔다. 손으로 땅을 짚었다가 하늘로 쭉 뻗었다. 할머니가 글은 많이 썼냐고 했다. 다 썼다고 했다. 앉아서 당근과 감자 껍질을 깠다. 오늘 저녁은 카레라이스였다. 김치와 잘 어울렸다. 김치 국물을 밥상에 조금 흘려서 다 먹고 박박 문질러 닦았다. 할머니가 자기가 마저 치울 테니 들어가라고 했다. 나는 “잘 먹었습니다” 크게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휴대폰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했는데 별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계속 시간이 갔다. 우리는 계속 살아있었다. 지루한 영화 같다. 그런 영화가 좋았다. 자기 위해 눈을 감아도 시간은 갈 것이었다. 누군가가 죽어도 이 영화는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내 시나리오가 망해도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성공해도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내가 죽어도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이불에서 약간 고소한 냄새가 났다. 내일은 샤워하고 자야겠다. 점점 생각이 옅어졌다. 페이드 아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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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ZOOMER

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수상한 소설 클럽 운영인. 매달 3편 이상 재미있는 소설을 써서 보내주자는 목표로 ‘비밀독자단’을 만들어 운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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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그들의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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