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일기장

영화 속 그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지원의 일기

<어떤 알고리즘>

정다희 / 2020-06-04


영화가 끝난 후 영화 속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혹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한 적 없으셨나요. <우리들>의 선이와 지아는 화해한 뒤 예전처럼 친한 친구 사이로 돌아갔을까요? <캐롤>의 테레즈와 캐롤은 한집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겠지요? 그들은 자신의 삶을 어떤 색깔로 채워가고 있을까요. 퍼줌이 상상력을 발휘해 쓴 그들의 뒷이야기, ‘그들의 일기’를 보여드립니다.


지원의 일기

2017년 4월 ??일 (쓰인 일자가 분명하지 않다)

이민아, 설마 살아 있는 건 아니겠지?

사람이 잠을 못 자면 미칠 수 있다. 이미 미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번 과제만 아니었다면 다시는 마주치지 않았을 너를 다시 만났다. 웃기 전 먼저 나오는 작은 콧소리, 약간 비아냥대는 말투까지 너무 똑같아서 내가 이때까지 겪은 일이 모두 꿈인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번 과제는 오디오 녹음본을 같이 제출하도록. 극본을 머릿속에서 굴려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 느낌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리딩이 중요해. 자기 목소리로 해도 좋고, 성우를 쓰든지 친구에게 부탁하든지, 등장인물은 자유롭게 표현해.”

연극제 수상 덕분에 들어온 예술학교는 들어오기 어려웠던 만큼 과제도 빡빡하다. 특히 <극본의 이해> 교수는 글뿐 아니라 극에 들어가는 모든 요소를 이해하기를 원했다. 그는 매번 새로운 과제를 내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나는 있는 힘껏 지식을 흡수하고 싶었다. 처음엔 자발적으로 밤을 새기 시작했다. 편의점에 있는 모든 에너지 음료를 섭렵했다. 연녹색, 형광 노랑 오줌에 익숙해졌다. 화장실에서 잠들어 경비 아저씨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깨고, 내 낯빛에 수군거리는 주변 사람들 목소리가 내게 들릴 만큼 커졌을 때는 메일로 도착한 이민아를 마주한 후였다.


성우 캐스팅을 위해 몇 사이트에 모집 글을 올리고, 4일쯤 잠을 자지 못한 날이었다. 지금이 오늘인지 어제인지 내일인지 헷갈릴 때쯤 도착한 메일에는 샘플 녹음파일이 첨부되어 있었다. 클릭하자마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게 진짜 사람 목소리라고? 귀신 목소리가 아니고? 메일 발신인 이름은 이민아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목소리에 오한을 느꼈다. 그리고 예감했다. 이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리라. 손이 떨렸다. 답장 버튼을 눌렀다. 빈 칸에 커서가 오래 깜박였다.

  > 메일 잘 받았습니다. 직접 뵙고 설명 드리고 싶은데 내일 시간 괜찮으세요?

나는 그날 밤도 잠을 자지 못했다.

  “귀신 본다고? 좋겠네, 과제 걱정 덜어서. 귀신이 꿈에 나타나서 어떻게 쓰면 되는지 알려주디?”

민아가 웃었다. 점점 민아의 형체가 일그러졌다. 떨리는 손으로 민아 얼굴에 손을 뻗었다. 닿자마자 얼굴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손에 피가 흥건했다.  

  “아악!”

엉망이 된 민아가 내 어깨를 잡아 내렸다. 머리가 바닥에 부딪쳤다. 시야가 흐려졌다. 버둥거려도 몸이 일으켜지지 않았다. 이대로 나도 너처럼 죽겠구나, 체념할 때쯤 눈이 뜨였다. 사람이 잠을 못자면 미칠 수 있다. 꿈이었다. 새벽 3시. 컴퓨터 앞에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깜빡이는 커서를 보았다. 민아 인터뷰 영상, 이번 주에는 다 지우려고 했는데. 눈앞에서 흘러내리던 얼굴이 선명해 차마 폴더를 열지 못했다. 내일 그 사람을 만난다. 민아가 정말 살아 있으면 어떡하지. 나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 아니, 나는 용서를 빌 수 있을까?

2016년 4월 ??일 (다음 날처럼 보인다)

그런 생각을 해냈다. 도플갱어를 만나는 이야기로 극을 쓰면 좋겠다. 첫 도플갱어를 살해한 뒤에 두 번째 도플갱어를 만나, 제대로 살해하지 못했다는 혼란 속에서 서서히 미쳐가는 이야기를. 뒤늦게 첫 도플갱어를 자신이 사랑했단 걸 깨닫고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야기를. 결말을 정하진 못했다. 글을 한참 쓰다 시계를 보니 그 사람과 약속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부재중 전화 4통. 너무 놀라 전화를 걸었다.  

  “아, 죄송해요. 제가 작업하다가 시간을 잊어서... 어디세요?”

  “아니, 2시간이나 기다렸는데 안 오셔서 그냥 나왔는데요. 됐고, 다른 분 구해보세요.”

  “아 정말 죄송한데 제가 지금 계신 곳으로 갈 테니까 한 번만 만나주시면 안 될까요?”

  “참나

만약 민아라면 여기서 못 이기는 척 받아줄 텐데. 나는 대답 없는 짧은 찰나에 ‘이 사람이 민아라면’에 대한 모든 대화의 수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런 말이 나오기만을 바랐다. 뭐, 나오세요, 라든지, 뻥이야, 라든지, 내가 죽도록 내버려두고 이제 와서 만나달라고? 라든지. 하지만 전화는 맥없이 끊겼다.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바로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하는 안내 음성이 들렸다. 

나는 전화를 내팽개치고 약속 장소로 내달렸다. 학교 앞에서 조금 떨어진 큰 카페였다. 짧은 머리가 보였다. 어깨를 잡아채 얼굴을 확인했다. 민아가 아니었다. 그리고 몇 사람을 더 확인했다. 욕을 들었지만 모두 민아는 아니었다. 그곳에는 민아가 없었다. 나는 카페 안을 한참 두리번거리다 직원의 만류로 밖으로 쫓겨났다. 짧은 머리의 사람이 구석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걸어가 입에 물린 담배를 잡아챘다. 한 모금을 빨았다. 그 사람은 너무 당황해서 할 말을 잊은 듯했다. 나는 바닥에 담배를 내던지고 기침을 한참 했다. 처음 피는 담배였다.


집에 도착해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이 사람을 만나야만 내 극이 완성될 것 같았으므로. 무례하게 굴었다면 죄송합니다, 로 시작한 글은 기묘한 자기 고백으로 끝났다. 자백일지도 몰랐다. 나 때문에 죽은 사람과 당신 목소리가 너무 비슷해요. 제가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제발 한 번만 만나주세요. 답장이 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만날지 생각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친구에게 부탁해 핸드폰을 잠시 빌려 달라고 청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말에 과제 때문이라고 얼버무렸다. 금세 방에 찾아온 친구는 내 안색을 보고 놀란 얼굴이었다.

  “지원아, 너 얼굴이 왜 이래? 병원 가야하는 거 아냐?”

  “괜찮아. 밤 며칠 새서. 끝나고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 핸드폰 좀.”

친구는 말을 삼키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내밀었다. 대체 무슨 과제길래, 사람이 다 죽어 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핸드폰에 그 사람의 번호를 찍었다. 0, 1, 0... 다 누르고 통화를 누르자 민아 목소리가 들렸다.

  “저 그때 성우 모집한 사람인데요...”

  “아 씨, 나 죽은 사람 아니라고. 연락하지 마요. 별 미친년 다 보겠네.”

전화가 끊겼다. 다시 전화하려고 하자 친구가 손목을 잡았다. 너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해. 나는 그때 알았다. 내게 민아가 필요하다, 나는 민아를 사무치게 만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다시 만날 수 없다. 주저앉자마자 몸에서 수분이 다 빠져나가는 것처럼 눈, 코, 입에서 무언가 쏟아져 나왔다. 미처 하지 못한 사과일지도 몰랐다. 다시는 전달되지 못할 사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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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ZOOMER

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수상한 소설 클럽 운영인. 매달 3편 이상 재미있는 소설을 써서 보내주자는 목표로 ‘비밀독자단’을 만들어 운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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