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일기장

영화 속 그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 맥퍼슨, 매리언의 일기

<레이디 버드>

윤혜은 / 2020-02-27


영화가 끝난 후 영화 속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혹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한 적 없으셨나요. <우리들>의 선이와 지아는 화해한 뒤 예전처럼 친한 친구 사이로 돌아갔을까요? <캐롤>의 테레즈와 캐롤은 한집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겠지요? 그들은 자신의 삶을 어떤 색깔로 채워가고 있을까요. 퍼줌이 상상력을 발휘해 쓴 그들의 뒷이야기, ‘그들의 일기’를 보여드립니다.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 맥퍼슨의 일기

2005년 5월 27일 금요일

새크라멘토에 돌아온 지 이제야 한 달이 다 되어간다.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내려왔으니, 체감은 지난 학기만큼이나 길었다. 6월부터 교수님을 도우며 단기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올해도 이곳 홀푸드마켓에서 여름을 날릴 뻔했다. 정말이지 개싸움은 작년으로 족하다. 이제는 대학도, 엄마도 빨리 졸업하고 싶을 뿐이다. (아마 작년 여름의 일기장을 펼치면 똑같은 말을 써놓았겠지)

뉴욕으로 가면, 대학생이 되면 뭔가 좀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한 순간엔 놀랍도록 제자리로 돌아가 버린다. 결국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느낌. 뉴욕에서 그런 기분으로 눈을 뜨거나 감으면 새크라멘토에서보다 조금 더 비참해지곤 한다.

어쨌거나 내일이면 뉴욕으로 돌아간다. 새크라멘토는 물론이고, 이제는 뉴욕도 얼마간은 내가 ‘돌아갈’ 곳이 되어버렸다. 앞으로 내 인생에 또 어디가 더해질까? 지금 여기가 아닌, 돌아갈(…도망일까?) 곳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이제 나는 그냥 내가 오랫동안 머무르고 싶은 곳이 생겼으면 좋겠다. 어디로도 돌아갈 궁리를 할 필요가 없는 곳으로 말이다.


2005년 6월 3일 금요일

기숙사 앞에 다다라서 넘어졌다. 무릎이 깨지는 바람에 왼쪽 다리를 끌다시피 하면서 걷고 있다. 새 학기가 시작될 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서 다행이다. 학교에서 일을 구한 것도 잘한 선택이었지 싶다. 의사는 뼈에는 다행히 이상이 없지만 무릎 인대나 연골이 손상됐을 수도 있으니 MRI 촬영을 권했다. MRI? 엄마가 알면 기절초풍할 노릇이지. 정말로 무서운 건 비용보다도 엄마다. 이런 말을 하면 엄마는 콧방귀를 뀌겠지. 네가 날 무서워한다고? 하지만 진심이다. 엄마는 아직도 날 잘 모르는 것 같다. 내가 당신을 무시한다고 느끼는 꼭 그만큼 내가 엄마를 무서워한다는 걸 알았으면. 그리고 나는 언제나 엄마랑 화해할 준비가 돼 있는데 퇴짜를 놓는 건 매번 엄마 쪽이었다는 것도 꼭 알았으면 싶다.

무릎이 너무 아프다. 벌어진 상처 때문에 당기는 건지, 의사 말마따나 근육이 찢어진 건지 알 수가 없다. 우선 진통제와 근육이완제부터 처방받았다. 아빠에게 전화해서 소식을 알렸더니 엄마가 옆에 있었는지 수화기 너머로 대신 대꾸했다. (“아니, 미끄러졌다면서 뒤로 안 넘어지고 앞으로 넘어져서 무릎이 나갔다는 소리야?”) 나이 들어 다치면 걱정보다는 타박을 먼저 듣는다. 대충 안부를 전하며 오른쪽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었다. 파자마 군데군데 선홍빛으로 번진 핏물이 그로테스크하다. 엄마는 내 기분을 확실히 잡치게 하는 데 재주가 있다.


2008년 4월 18일 금요일

카운슬러와 교수님을 차례대로 만나면서 다음 학기에 수강할 과목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기숙사로 돌아와서는 2층 커리어 센터부터 들렀다. 시험도 끝났으니 레쥬메와 커버레터에 대한 조언을 좀 받아보려 했는데 의욕과 달리 영 몸이 안 따라주네. 공용 컴퓨터를 차지한 채 강의용 헤드셋을 끼고 유튜브가 추천하는 선곡에 귀를 맡겼다. 마지막으로 한 곡만 더 들어야지, 하고 기다린 플레이 리스트에서는 에이브릴 라빈의 철 지난 스페셜 에디션이 흘러나왔다. . 한때 즐겨 듣던 노래라 반가웠다.

  Have you forgotten?
  (너 정말 잊은 거니?)
  Everything that I wanted
  (내가 원했던 모든 것들)
  Do you forget it now?
  (이제는 잊어버린 거야?)
  You never got it
  (넌 절대 알지 못할 거야)
  Do you get it now?
  (지금은 좀 알 것 같니?)

4년 전만 해도 가사가 꼭 내 전투력을 높여준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뭐, 그냥… 약은 좀 올라도 적당히 무력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좀 전에 대기실로 들어간 남학생 두 명, 꽤 갖춰 입은 차림이었는데 인터뷰를 보려는 모양이지.

밥스트(Bobst) 도서관으로 걸음을 돌렸다. 언제 봐도 사방이 온통 아름다운 공간이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워싱턴 스퀘어 공원의 사계절을 조망할 수 있는 도서관이라니. 신입생 시절, 다른 어디도 아닌 도서관을 둘러보면서 역시 뉴욕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학교에서, 아니 뉴욕에서 제일 사랑하는 곳이지만 도서관 대출 기록도 머지않아 멈춰질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마지막 학기는 이미 충분히 아픈 날들일 테다.


2014년 10월 11일 토요일

가끔은 궁금하다. 엄마가 아직도 나 때문에 웃곤 하는지. 내가 자신의 딸이라는 걸, 엄마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각고 있는지 알고 싶다. 나는 당신의 상상을 배반하며 자라는 동안 참 많이도 안도했는데. 엄마는 내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신을 미워하면서, 혹은 위로하면서 늙어갔을까?

오늘은 엄마의 생일이라 새크라멘토에 와있다. 내 방은 몇 년 전부터 조카 케이티의 방이 되었다. 케이티는 오늘 나랑 수다를 떨며 잘 생각에 들떠 있더니 그새 먼저 잠들어버렸다. 바닥에 누워 침대 바깥으로 삐져나온 그 애의 팔을 이불 속으로 다시 넣어 주었다.

집을 떠나면서 칠했던 흰색 페인트는 다시, 분홍색으로 바뀌었다. 천장 몰딩을 따라 커튼으로 이어지는 알전구는 이 나이대의 클리셰인가. 문득 엄마가 저녁 식탁에서 괜한 소리를 한 게 생각나 화끈거린다.

 “케이티를 보면 꼭 너 어렸을 때 찍어둔 비디오를 재생시키는 것 같아.”
 “진심이야? 엄마도 늙나 보네.”

미구엘과 샐리가 웃으면서 ‘맞아, 케이티는 정말 그렇지’라고 대꾸해서 더 미안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무엇을? 그 처음이란 건 어디일까?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그건 너무 많다. 그때 기억 중 몇몇은 아직도 생생하니까. 그럼 한… 3살? 아니면 아예 태어나기 전으로? 하지만 그게 여전히 엄마, 매리언의 뱃속이라면 다시 태어난다 한들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사진으로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할머니는 폭력적인 알콜중독자라고 했지. 왠지 엄마도 오늘 밤의 나처럼 부질없는 생각을 하다 잠든 적이 있을 것만 같다. 갑자기 엄마가 기특하게 느껴진다. 엄마를 내 엄마가 아닌 그냥 한 인간으로, 여성으로 떼어놓고 보면 친구가 되고 싶진 않아도 그녀의 삶에 박수를 보내고는 싶다. 그러니까, 축하해 생일.


매리언(엄마)의 일기

2005년 5월 8일 일요일

오늘은 ‘어머니의 날’. 샐리는 아침부터 집안의 화병을 전부 새 꽃으로 갈아놓고 내 목에 트윌리 스카프를 둘러주면서 서프라이즈에 제대로 성공했다. 미구엘은 평소처럼 늦잠을 잤지만 눈치 빠르게 래리를 도우며 부엌과 다용도실을 서성였다. 여름방학이라고 새크라멘토에 내려와 있는 크리스틴은 내게 빈티지 귀걸이를 선물했다. 바로 착용하지는 않고, 그냥 귀에 갖다 대기만 했는데도 크리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엄마 너무 예쁘다. 잘 어울려!

언젠가 크리스틴은 내게 경고하듯 물은 적이 있다. 이게 내 최고의 모습이라면? 그 즈음 난 딸애의 맹랑함이랄까, 당돌함에 좀 질려 있었다. 하지만 그때에 크리스틴도 만만치 않게 나를 못 견뎌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크리스틴에게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줬어야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부분엔 아주 꽝인 엄마였지 싶다. 배운 적 없는 걸 제대로 일러줄 수 있을 리 없지. 그래도 크리스틴은 자신을 어떻게든 사랑해보기를, 사랑받는 존재로 만들어보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제와 그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시절 크리스틴이 갖고 있는 사랑은 전부 어디에서 왔을까. 십대 시절 딸애의 악착같은 모습은 허황돼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나를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고백하자면, 그건 은근한 부러움에 가까웠다.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지금이 내 최고네, 최선이네 라고 여겨본 적이 없었다. 그럴 감상에 빠질 여유 자체가 없었다는 편이 더 맞겠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뒤늦게나마 알아갈수록 내 생애 최대의 난제랄까, 암호 투성이 같던 딸이 조금씩 다르게 보인다.


2018년 12월 11일 화요일

날씨가 매우 흐리다. 래리랑 술 한 잔 마시면 딱 좋겠지 싶다. 음악을 들으며 청소를 하고 멍하니 거실 소파에 앉았다. 일을 할 때에는 그렇게나 기다려온 여유인데…. 아주 무료하다. 살아내야 할 날이 수두룩하다는 것, 그건 정말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통 위로가 되지 않는다. 요즘 같은 시대에 까딱하면 나는 내가 살아온 만큼 더 살 수도 있다. 하하 그건 좀 너무하네. 아득한 나중에, 나중에 내가 죽으면 내 엄마 아빠도 다 볼 수 있는 걸까? 그때는 왜 그렇게 엄마를 미워하기만 했을까? 크리스틴은 나처럼 후회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일을 안 해서 나쁜 점이 방금 또 하나 늘었다. 후회하는 게 많아진다. 여기저기 남아 있는 기억을 끌고 와 사과하기 바쁘다. 그곳엔 용서도, 대답도 없다. 만약 누군가 내 환영을 앞에다 놓고 머리를 숙인다면 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2018년 3월 21일 수요일

아침을 먹자마자 청소를 하고, 은행가서 세금을 내고, 마트에서 돼지고기와 아스파라거스를 사가지고 집에 왔다. 새삼스럽게도 사는 게 참 재미없다. 어디로 훌쩍 떠나가서 혼자 있다 오고 싶다. 나만 이렇게 사나. 괜히 외로워진다. 슬프기도 하고. 웃긴 생각인데, 기를 쓰고 새크라멘토를 떠나려했던 크리스틴의 심정을 조금 알 것도 같다. 이제야 우리는 진짜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너무 늦었나?

  네 친구한테 하는 것 반만큼만 나한테 해봐.
  난 엄마가 내 앞에서도 그렇게 교양 있었으면 좋겠어.

옛날에 딸이랑 싸울 때마다 주고받던 단골멘트가 생각났다. 마지막은 늘 내 일갈로 끝나곤 했지. 내가 네 친구가 아니라 정말 유감이다. 그러면 미구엘은 친구가 될 수 없는 운명이 가족으로 묶이는 건 아닐까? 하고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해대고. 참, 별게 다 생각나네. 한숨 자고 일어나서 크리스틴에게 전화를 해야지. 그냥, 이런 지난 이야기 말고 그 애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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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ZOOMER

프리랜서 인터뷰어이자 14년차 일기인간.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어떤책, 2020)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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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그들의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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