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에세이

우아한 퇴사 – (feat. 클래식이 ‘주성치’ 영화로 장르가 바뀌는 순간)

벡델데이2021 벡델 에세이 공모전 선정작

김린제 / 2021-09-17

2회째를 맞이한 벡델데이 2021은 올해 슬로건인 BE NEXT!를 좀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자 단편영화 공모와 글, 사진, 만화 등 자유 형식의 에세이 공모를 진행했습니다. 길지않은 공모 기간 동안 약 70여 편의 작품과 다양한 주제와 내용의 글이 접수됐음에 먼저 감사드립니다. 대체로 여성 화자의 글들이 많긴 했지만, 다행히도 세대별로 남성 화자의 글들도 도착해 이번 공모전은 성별 간, 세대 간의 생각들을 엿볼 수 있게 해준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에세이에 담긴 내용들은 나다움, 소수자에 대한 혐오, 페미니즘, 출산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성별 고정관념, 전통적 성 역할에서 오는 편견들 대한 이야기들이 주류를 이뤘습니다. 심사를 맡게 된 저희들은 글이 가진 완성도 자체를 평가하기보다는 지금 바로, 우리 사회에 당면한 불평등 문제를 작가 고유의 시선으로 바라본 점과 심사위원들의 다수의 공감대 형성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끝으로 올해 벡델데이 2021에서 첫 시도된 벡델 에세이 공모전에 지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더불어 심사위원들은 우리끼리만 보고 말기에 아까운 글들이 많아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됐으면 하는 바람 또한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사회가 성평등한 가치를 실현하는데 있어서 여러분들의 지속적인 관심이 이어지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심사위원 일동
(배종대, 윤단비, 이태겸, 임선애 감독)

내 피, 땀, 눈물을 도서관에 종일 바치며, 나는 빈틈없는 시간관리로, 졸업 전 원하는 취업의 결실을 얻었다. 그것은 캠퍼스의 낭만이니 억압된 고교시절 이후의 이성교제, 동아리 활동의 여유와 맞바꾼 4년간의 치열한 결과물이었다. 입학 후 더욱 좁은 여성취업의 문 앞에서 대학 간판을 따고 결혼하는 일명 '취집'도 의미 있다고 에둘러 위로하는 말들에 더욱 반감이 들었고, 본격적으로 내 능력을 발휘하고 싶었기에 결과에 만족했다.

입사 후, 매 프로젝트에서 우수함을 증명하기 위해선 또 다시 새벽부터 자정까지 자료조사하고 파악하고 보고해야 하는 일로 장소만 도서관에서 회사로 옮겨 연장되었을 뿐, 모든 걸 바치며 몇 배로 노력했다. 오래지 않아 영어와 제2외국어 그리고 컴퓨터를 잘하는 신입 여사원 덕에 팀워크가 수월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잘난 상사의 숟가락 얹기나 업적 가로채기, 회사 야유회, 운동회, 사내 동아리활동, 동기 모임, 부서 회식이란 이름 하에 단합이라고 모일 때면 여자 일을 구분하고 희롱하는 것이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것이라는 오랜 관습들도 내가 더 높은 위치에서 해결할 일들로 리스트 업하고 있었다.

한번도 누구를 사귄 적이 없어도 문제, 같은 신입사원 처지지만 지원하겠다는 남편과의 결혼도 문제라고 했다. 내 결혼 소식엔 임신은 미루라는 답이 왔으며 1년 이상 피임을 했음에도 임신을 하게 되었다. 당황스럽고 시기상 여러 가지로 부족했으며 무엇보다 내 아이가 축복 속의 탄생보다는 자신들의 늘어날 일 부담으로 짜증내는 소리가 듣기 싫어 7개월까지는 아무도 모르게 버텼었다. 쉬 피로하고 입덧도 아침마다 화장실에서 숨죽이며 버텼고, 메슥거림과 밀려오는 졸음을 참아내며 그 어느때보다 열심히 일했다. '여자들은 이래서 안돼! 일 좀 할 만하면 결혼하고 출산하고 안 나오지? 기껏 뽑아줬더니 일만 배우고 결혼했다고 임신했다고 육아한다고 일에 집중들을 못해!!' 라던 막말들이 떠올라 나를 학대했다. 그러나 나의 출산은 출산 휴가로 빈자리가 영향을 주지않도록 출산 몇 시간 전까지도 산고를 참으며 일했고, 바로 출산하고서도 회사 전화를 받으며 일을 했다. 내 삶은 학원물에서 잠깐의 멜로를 거쳐 성공한 오피스물로 가더니 가임여성 인력 현실 다큐물에서 출산과 산고의 여성 잔혹사로 퇴보하다 뜬금 공포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갑자기 친정엄마가 입원하신 뒤, 젊은 시어머니는 `아이는 못 봐준다고 나도 내 인생 즐길 거라고 자유 선언`을 하면서, 남편까지 1주일 중 5일은 출장을 가는 보직을 맞게 되자, 혼란스럽고 막막해졌다. 어떻게든 일단 애를 낳으면 길은 있다더니 오롯이 나만의 몫으로 남겨진것이다. 아이 봐주는 분들 면접과 여러 기관을 거쳐 다양한 경로를 찾아봤지만 갓난 내 아이를 맡길 만한 곳은 없었다. 아이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사건들이 발생할 수도 있는데 부모인 내 커리어를 위해 강행하기는 어려웠다.

사정이 이렇게 되니 출산휴가를 다 쓰고 퇴사한다면 또한 후에 여직원들에게 안 좋은 사례가 될까 싶어 바로 퇴사를 신청했으나 반려되었다. 회사에서 지금 너만 한 인력 대체는 어려우니 다시 아이 맡길 곳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러나 당신 인생 찾겠다는 시어머니와 내 딸 고생하니 도와주려 했지만 당신 거동도 어려워지신 친정엄마 사이에서 잠시도 믿고 맡길 곳이 없다고 거듭 읍소할 수 밖에 없었다.

굳은 각오를 했지만 막상 `퇴사불가`라는 상사의 강요 앞에, 내 인생의 가장 우아한 모습으로 열심히 일하다 회사의 노고를 인정받으며 `그레이스 켈리`나 `오드리 햅번` 같은 박수 받는 마지막 퇴장은 이뤄질 수 없었다. 이미 사표수리 반려라는 이름으로 내게 생각을 바꿔보라며 회사에 찾아 온 나를 만나주지 않는 동안 출산한지 얼마 되지 않아 오로가 나오는 상황에서 여분의 생리대도 없는 상황이었다. 아래 주차장에서 아기를 보는 조카는 언제 오냐고 재촉하고 나 역시 초조하고 답답한데, 다시 여러 선배, 동료들의 참견과 한마디씩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은 처하지 않은 상황에서 각자의 출산과 ‘육아론’들을 내 앞에서 지난하게 펼쳐냈다.

마침내 아름다운 주인공이고 싶던 나는 SF물 괴기영화처럼 변하면서 아기 면역력 증진을 위해 모유수유를 하던 중이라 젖먹일 시간이 지나자 가슴이 부풀면서 찌릿찌릿 통증을 동반하며 공포를 주더니 이내 젖비린내를 풍기며 줄줄 폭발하듯 흐르고 있었다. 비서가 막아대도 노크하고 임원실로 들어갔다.

"저도 일하고 싶고 그만두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도저히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요. 자기 인생 찾아서 자식 뒷바라지하는 할머니 되기 싫단 시어머니도 거동이 어렵게 된 친정어머니도 온갖 외래사투리로 담배냄새 풍기며 자기 발 만지다 애 침 닦는 외국인 보모들도 다 찾아보다, 안되니 이런 거에요. 누구보다 책임감 있게 산모의 고통 숨기며 참으며 일했는데, 남편이 출장 다니는 업무를 맡으면서 육아휴직도 눈치 보여 못쓰고요, 이렇게 오라하고 처리 안된다고만 하면 저는 어떡해요. 어린 조카가 주차장에서 차 안 아기바구니로 아기 보고 있어요. 그러게 왜 좀 있는 놈 만나 지원받지 그랬냐고요? 그러게 이럴 땐 공무원이 최곤데 나머진 아직 아니라고요? 없는 놈은 장가도 가지 말고 애도 낳지 말고 둘이 좋아도 절대 흙수저 물려주지 않는 게 정답이라고요? 그걸 지금 아이 젖 먹을 시간까지 붙잡아 두고 마지막까지 하실 말씀들이세요? 밤낮없이 휴일없이 일했던 수년간의 저를 보시고도 이러실 수 있어요? 마지막까지 어쩔 수 없어 선택한 상황인데 저한테만 이러시면 어떻게 해요. 저는 어떻게 하냐구요..."

완전 어린아이처럼 터진 울음을 삼기며 목이 메이고 딸꾹질처럼 끊어지면서도 할말을 쏟아냈다. 그렇게 피, 땀, 눈물. 거기에 침과 콧물, 유즙, 오로까지 더해져 내 모습은 엉망이 되었다. 평상시 또렷한 말투로 프리젠테이션을 해대던 나는, 한 번도 경험 못한 호흡으로 할 말을 했다지만 상대방이 그 말을 잘 알아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내 마음 속 아름다운 여성은 분비물로 뒤엉켜 더럽게 웃긴다는 주성치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나 조차도 한 도 마주한 적 없는 모습으로 사무실을 빠져나와 주차장에서 아이 젖을 불리며 또 한번 서럽게 통곡했다. 초등학생인 조카는 연신 티슈를 꺼내 내 눈물을 말없이 닦아주었다. 자세한 영문도 모른 체 조카도 같이 울먹거렸지만 지금까지도 그 날의 일에 대해 나와 얘기한적은 없다. 주차요금 처리 경황이 없어, 외부인 주차요금으로 거하게 결제하고 그렇게 회사를 빠져나왔다. 당당하고 우아하게 수년간을 근무했던 직장에서의 마지막 퇴사일 나의 모습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