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일기장

영화 속 그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은희의 일기

<벌새>

윤혜은 / 2019-12-16


영화가 끝난 후 영화 속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혹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한 적 없으셨나요. <우리들>의 선이와 지아는 화해한 뒤 예전처럼 친한 친구 사이로 돌아갔을까요? <캐롤>의 테레즈와 캐롤은 한집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겠지요? 그들은 자신의 삶을 어떤 색깔로 채워가고 있을까요. 퍼줌이 상상력을 발휘해 쓴 그들의 뒷이야기, ‘그들의 일기’를 보여드립니다.


1999년 12월 23일 목요일

일주일만 지나면 스무 살도 끝이다. 스무 살만 끝이 날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처럼 아예 내 인생이 끝장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16세기 점성가의 글을 보고선 온 세계가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는 꼴이 아주 우습다. 주변에는 아직까지 농담처럼 12월 31일을 이야기하다 은근히 겁을 먹는 애들도 더러 있다.

한편으론 곧 크리스마스라 친구들은 어떻게 하면 이날을 마지막 1분까지 짜릿하고 신나게 보낼까 궁리 중이다. 얼마 전에 애인이 생겨버린 나는 배신자다. 너네 말대로라면 얘가 내 마지막 애인이 될지도 모르는데? 배신의 대가치고는 좀 혹독하네.
 
요즘은 자기 전에 ‘쿨캣(Coolcat)’¹님의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카툰 다이어리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쿨캣은 대부분 혼자 논다. 혼자서 잘 지낸다고 혼자라도 괜찮다는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자꾸만 쿨캣의 일기가 궁금하다. 가끔씩 만화 아래에 덧붙여놓는 한 마디도 참 좋다. ‘하나를 얻으면 꼭 한 가지는 잃게 돼있는 것 같아. 씁쓸하게도…’와 같은. 사람들은 내게 작가의 성별을 캐묻곤 하는데, 쓸데없는 질문이다. 나는 쿨캣이 무엇이래도 좋으니까. 그냥 그 작은 고양이의 하루가 어떻게든 계속되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얻은 것과 잃은 것에 대해 생각한다. 앞으로는 작은 것만 얻고 조금씩 잃어가고 싶다. 더는 덜컥, 너무 큰 걸 얻어버리고 싶진 않다. 그런데 갑자기 종말이라니? 한 순간에 세계를 빼앗겨야 할 만큼 우리가 얻은 것이 있었다고? 글쎄 난……. 내 안의 모순에 슬퍼진다.


1999년 12월 25일 토요일 /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의 명동은 퍽 인상적이었다. 사방에서 핑클의 ‘화이트’가 돌림노래처럼 흘러나왔다. 노래 자체는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전주에 울려 퍼지는 잔잔한 종소리를 들으면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애인은 인파 속에서 “키스하면 종소리가 울린대” 같은 말을 진지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나는 “아니던데?” 라고 부러 큰소리로 받아치면서 그 애를 골렸다. 금세 뾰로통해지는 얼굴이 순진하게 귀여웠다. 얘랑 키스하게 되면 절대로 침을 뱉진 말아야지, 웃긴 생각을 했다.

우리는 명동성당에서 나눠주는 율무차를 들고 중앙우체국 근처 벤치에 앉았다. 거짓말처럼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만 둘 다 통금을 근사하게 어길 만 한 배짱도 돈도 없었다. 다만 애인이 너무 아쉬워해서 막차 대신 택시를 타고 집에 가자는 데 동의했다. 애인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레몬색 손모아장갑을 건넸는데, 사실 난 손가락을 하나하나 다 감싸주는 장갑을 더 좋아한다. 장갑을 낀 채 하늘로 두 손을 뻗어 열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자 동그란 모양이 울퉁불퉁하게 구겨졌다. 애인이 앙고라 털보다 부드러운 미소로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같은 시간에 우리는 어쩌면 다른 생각을 했다.(1999년 1월 1일 발매된 토이 4집에서 윤상이 부른 ‘우리는 어쩌면 만약에’의 첫 소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같은 시간에 우린, 어쩌면 서로를, 그리워했었는지 모르네…’)

CD 플레이어에는 토이 4집이 들어 있었다. 김이 낀 차창 너머로 울렁이는 불빛들을 바라본다. 손등으로 문지르니 조잡한 네온사인과 가로수 아래로 쓰러진 쓰레기봉투 따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어떤 잔상도 남기지 못하는 비슷한 풍경이 무한히 반복된다. 지워진 자리에 다시 입김을 불어 넣고 눈을 감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13번 트랙(김형중, ‘남겨진 사람들’)이 막 재생되는 참이었다. 이제 그만, 메리 크리스마스.


1999년 12월 27일 월요일

웬 옛날 프랑스 점성가 하나 때문에 다들 약간은 ‘될 대로 돼라’는 식의 분위기가 만연하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주고 싶을 때 종말을 기정사실화했다. 어차피 죽을 건데 먹어도 돼, 사도 돼, 오늘 집에 안 들어가도 돼. 어차피 죽을 건데 너한테 고백이나 해보려고. 어차피 죽을 건데, 죽을 건데, 어차피…….

어차피 태어난 건 다 죽게 돼있다. 누구라도 그게 당장 31일은 아니었음 싶은 거겠지. 하지만 언제라고 죽는 게 아무렇지도 않게 될까. 그런 날은 어느 시대의 인류에게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연말에 가까워질수록 더 자주 들려오는 ‘어차피 죽을 건데’라는 말이 듣기 거북해서 더더욱 종말론에 반감이 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면 사람들은 나보고 재미없다고 하는데, 맞다. 나는 정말로 그 말이 재미없다. 하나도 안 웃기다고.

8월이었나, 하여간 수능을 100일 정도 앞두고 아빠는 어떻게든 오빠를 재수기숙학원에 넣어놓으려고 애를 썼다. 그 무렵 오빠는 사춘기가 늦게 온 건지 생전 안 하던 고집으로 기숙학원만은 싫다고 버티면서 아빠를 돌게 만들었다. 한날은 아빠가 거의 애원하다시피 설득하고 있는데 내내 체념한 얼굴로 앉아 있던 오빠가 말했다. “그렇게 산속에 처박혀 있다가 서울대 갔는데 내년에 죽으면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왼쪽 귀를 감쌌다. 아빠가 그 자리에서 바로 오빠를 때렸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걔가 내 악다구니가 끝나기도 전에 뺨을 후려친 것처럼. 그러나 식탁은 고요했고 이내 의아하다는 듯한 시선이 내게 꽂혔다. 수희 언니는 살짝 고개를 떨궜고, 엄마는 국을 뜨던 수저를 마저 입에 넣었다. 아빠는 당황한 건지 정말 우스갯소리로 들었는지, 그런 농담도 할 줄 알았냐며 밥부터 먹고 다시 이야기하자고 순순히 오빠를 달랬다. 나는 멋쩍은 손을 내려놓으면서 내심 안도했다. 김대훈 안 맞아서 다행이다. 그건 진심이었다.

그날 저녁 나와 눈이 마주친 건 오빠뿐이었다. 2초 정도, 나를 응시하는 걔가 더는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 긴장 없음이 낯설지 않아서 오히려 조금 놀랐다. 왜인지 익숙했다. 마치 응당 그래야 했던 것처럼.

찰나나마, 오빠는 무언가 답을 얻으려는 눈빛을 보냈는데…. 거기에서 얼핏, 내가 보였던 것도 같다. 늘 묻고 싶은 것 투성이던 어느 많은 날의 내 모습이, 오늘 거울 앞에서 문득 생각나 버린 것이다. 전에도 몇 번 이런 적이 있다. 더는 내 얘기가 아닌 것 같은 장면을 외면하지도, 알은 체 하지도 못하고 그냥 바라만 봤었지.

기억은 언제까지 멋대로 도착하려는 걸까. 그럴 때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1999년 12월 31일 금요일

사람들은 거짓말일지라도, 죽음이 선명하게 그려질 때에야 비로소 제 마음을 돌보고 싶은가 보다. 문득 그것이 치사하게 느껴진다. 반칙 같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삶이 지독히도 평범한 날에, 조금도 호들갑을 떨 틈이 없도록,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모든 것으로부터 퇴장해버렸는지를 생각하면. 우리가 스스로를, 서로를 즐거이 애도하기에 이토록 충분한 시간 동안 종말이 예고되는 것은 얼마나 불공평한 일인가.

그러니 오늘 나의 하루는 반드시 여느 때와 마찬가지여야 할 터였다. 늦잠을 잤지만 아슬아슬하게 아르바이트 지각을 면하고, 역시나 아침부터 라이스버거가 제일 많이 팔렸어도 직원 식사로는 리브샌드가 제공되는 것처럼 말이다. 늦은 점심을 먹고 4시 즈음, 오후 파트와 교대를 하고선 『밍크』 신년호를 사러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다. 입구에는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가 아직 남아 있었다. 전구 사이사이 사람들의 새해 소원이 장식처럼 달려 있었는데, 그중 유난히 빼곡한 메모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추위가 매섭다. 그곳은 어떠니? 따뜻하게 지내라는 말도 차마 할 수가 없구나. 너희가 있는 천국엔 겨울도 여름도 없었으면. 이곳에서의 나쁜 일일랑 아주 작은 것 하나까지 깨끗이 잊었기를... 오로지 행복한 천사가 되어 해맑게 뛰어놀기만을 기도하고 또 기도한단다. 우리들이 참 미안하다.’²

어찌할 수 없는 무력함이 밀려왔다. 이어지는 선명한 기시감. 언젠가 나만이 사라진 세상을 그려본 적 있다. 이럴 거라면 세상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이제 나는 무엇도 쉽게 바라지 않는다. 항상 인물들이, 저마다 고유한 플롯 안에서, 각자의 사정으로 시시콜콜하게 소멸해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 긴 여정이 성급히 끝나버리는 이야기는 만화로도 읽고 싶지 않다. 

일기를 쓰는 사이 31일로부터 26분이 지났다. 알아채지 못하고 새해를 맞았다는 사실에 괜히 으쓱해진다. 새천년의 고요함이 마음에 든다. 조용히, 그러나 전부 그대로 여기에 있다. 모두 다 해피 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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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쿨캣(Coolcat): 웹툰 1세대이자 최장수라 할 수 있는 만화‧캐릭터 ‘스노우캣(SnowCat)’의 전신. 1998년 2월부터 홈페이지 활동을 시작했다가 2000년 8월에 스노우캣으로 개명하며 홈페이지를 재오픈했다.

2. 1999년 6월 30일 화성시에서 발생한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고’를 암시. 당시 화재는 19명의 어린이를 포함하여 23명이 희생당하는 대형 참사를 낳았다. 사고 후 해당 수련원이 그동안 안전검사도 무시하고 불법적인 구조로 운영해왔으며, 건설비와 운영비 절감을 위해 가연성 소재로 인테리어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국민적 공분을 샀다. 여기에 다수의 사망자가 속해 있는 유치원 교사들의 허술한 인솔까지 더해져 피해가 급증된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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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ZOOMER

프리랜서 인터뷰어이자 14년차 일기인간.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어떤책, 2020)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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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그들의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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