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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90-00: 언니들의 영화] ➂전환기의 시대정신

1990년대-2000년대 중반 시네페미니즘의 흐름

손희정|문화평론가 / 2020-06-04


< ZOOM IN >에서는 여성 영화, 감독, 배우, 캐릭터 등을 퍼줌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도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90-00: 언니들의 영화] 글 보러가기
➀전환을 이끌었던 여자들1990년대-2000년대 한국영화와 여성영화인
➁짧고 강렬한, 영화: 1990년대-2000년대 독립단편이 선보인 여성 서사

90-00 언니들의 영화의 마지막 글이다. 여기서는 한국 시네페미니즘을 1기 ‘변혁운동의 확장-시네페미니즘의 도입(1990-IMF 전)’, 2기 ‘신자유주의 시대의 포스트(모던)페미니즘(포스트 IMF-2000년대 중반)’, 그리고 3기 ‘백래시와 여성혐오, 페미니즘 리부트(2000년대 후반 이후부터 현재까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송효정 평론가의 틀을 바탕으로 태동기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의 흐름을 살펴본다.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 스틸컷

여성주의 영화비평, 즉 시네페미니즘은 서구의 페미니즘 제 2물결 안에서 그 시작을 알렸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교육과 같은 공적영역에서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페미니즘 제 1물결이 어느 정도 성과를 본 뒤에도 성차별은 여전했고, 여성들은 표면적인 권리의 평등을 넘어 권리의 성격과 그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삶의 조건을 구성하는 가부장제 문화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페미니즘 제 2물결은 이 깨달음을 자양분으로 문화 전반에 대한 비평을 전개했다. 이때 질문의 장 위에 올려진 것 중 하나가 여성재현과 상징체계였다. 페미니스트들은 지면이나 브라운관뿐만 아니라 스크린에 주목했고, 기존의 남성중심적이었던 영화비평담론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1989년 여성영상집단 바리터의 결성을 그 시작으로 주목해볼 수 있다. 87년 이후 시대의 전환과 함께 제작과 이론을 아우르는 페미니스트 영화 실천이 본격적으로 움트기 시작했고, 그 자리에 바리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주의적 영화 실천’을 표방했던 바리터는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1990), <우리네 아이들>(1990) 등 여성과 노동의 문제를 다루는 영화를 제작했다. 김소영 감독은 바리터 30주년 기념행사에서 “‘바리데기’ 서사와 여성들이 모이는 장소로서의 ‘터’를 합해서 이름을 지었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발음이 베리떼(vérité, 진실)와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일부 남성 영화인들은 빨래터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여성영화인들의 의지와, 그것을 조롱했던 당시의 남성중심적 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델마와 루이스> 스틸컷

1990년대, 시네페미니즘의 도입

1990년대가 되면 페미니즘과 문화의 관계가 조금 달라진다.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제적인 대중문화를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여성운동의 장으로 탈영토화해서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소설, 영화, 연극 등이 대중들의 앞에 나타났고, 적지 않은 주목을 끌면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소설에서는 양귀자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2)과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3)가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화되기도 했다. 더불어 <델마와 루이스>(1991),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1992), <피아노>(1993) 등의 영화가 개봉하고 <아들과 딸>(MBC, 1992) 등의 드라마가 방영되면서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대중적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된다. 페미니스트 문화운동 단체인 ‘여성문화예술기획(이하 여문)’에서는 연극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제작하는 한편, 다양한 페미니스트 전시와 퍼포먼스, 무대 등을 선보였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개최한 것 역시 여문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페미니즘 영화임을 내세웠던 <그대 안의 블루>(1992),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같은 영화들도 개봉한다.

<개같은 나의 오후> 스틸컷

이와 함께 여성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서구 시네페미니즘 이론을 소개하는 작업이 이뤄진다. 이 시기를 잘 보여주는 출간 작업으로는 유지나·변재란 편 『페미니즘/영화/여성』(1993)과 김소영 편 『시네페미니즘, 대중영화 꼼꼼히 읽기』(1995)가 있다. 

『페미니즘/영화/여성』은 서구 시네페미니즘 1기에서 3기에 이르는 각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에세이들을 소개한다. 1기(1968-1974)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마조리 로젠의 「팝콘 비너스」는 사회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상황에 따라 영화에서 여성 재현이 어떻게 달라져왔는가를 분석한다. 2기(1975-1980년대)에서는 클레어 존스톤의 「대항영화로서의 여성영화」와 로라 멀비의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시네마」를 소개하고 있는데, 전자의 경우에는 바르트의 신화론에 기대어 여성 스테레오타입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후자의 경우에는 남성 쾌락에 복무하는 영화의 시각 메커니즘 자체를 비판하고 있는 고전이다. 그리고 2기가 모든 여성을 동질적인 존재로 이해하면서 여성 관객의 다양한 위치와 쾌락을 폐기했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시작된 3기(1990년대 이후)의 대표작으로 영화를 보는 여성들의 쾌락을 탐구하는 제인 게인즈의 「여성과 재현: 우리도 다른 쾌락을 즐길 수 있을까?」 등을 소개한다. 

『시네페미니즘, 대중영화 꼼꼼히 읽기』의 경우에는 <델마와 루이스>, <프리티 우먼>, <인어공주>, <양들의 침묵>, <그대 안의 블루> 등 당시 화제가 되었던 대중영화에 대한 페미니즘적 독해를 시도함으로써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나 실험적인 페미니스트 영화에 대한 분석에 치중된 기존의 논의와 상대적인 차별성”을 추구하고, 영화에서 여성 목소리와 사운드의 문제를 다루었던 카야 실버만의 논문 등을 소개하면서 이론적 자장 역시 확장하고자 했다.

<쉬리> 스틸컷

이와 함께 이수연의 『메두사의 웃음-한국 페미니즘 영화와 섹슈얼리티』(1998)를 주목할 만하다. 이수연은 1부에서 서구 페미니즘 이론 및 시네페미니즘 이론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2부에서는 <그대 안의 블루>, <개같은 날의 오후>(1995), <코르셋>(1996), <301 302>(1995) 등 1990년대 당시 여성영화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던 작품들의 페미니즘 영화로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논했다. 이런 작업들은 시네페미니즘이 역사를 가진 하나의 이론적 체계로서 어떻게 치열한 토론을 통해 점차 확장되고 또 변주되어 왔는지 보여준다.

1999년에는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및 퀴어 담론의 확장과 함께 스크린에서 가시화되기 시작한 퀴어에 대한 영화이론 작업을 소개하는 『호모/펑크/이반 – 레즈비언, 게이, 퀴어 영화비평의 이해』(1999)가 출간된다. 로빈 우드, 줄리아 르사주, 루비 리치, 발레리 트로브 등 퀴어 이론가와 바바라 해머 등 퀴어 창작자의 글을 소개하면서 “섹슈얼리티의 재현과 정치성의 문제가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레즈비언, 게이, 퀴어 영화 비평의 전개과정과 쟁점들”을 살폈다.


포스트 IMF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1997년 IMF 이후, 세기 전환기 한국 영화산업은 변신을 도모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홍보문구를 내세웠던 <퇴마록>(1998)과 실제적인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시작으로 평가받았던 <쉬리>(1998) 이후, 한국영화는 본격적으로 산업화, 합리화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크게 투자하고 로또 맞는’ 산업구조가 일반화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영화는 점차로 ‘남자영화’ 만들기에 몰두했다. 예산이 커졌기 때문에 ‘흥행 보증수표’가 필요해졌고, 이때 그 보증수표로 ‘남자영화’라고 할 수 있는 한국형 느와르와 액션, 사극 같은 장르가 부상한다. 주류 영화에서는 만나기 어려워진 여성 주인공들은 모두 공포영화 속으로 모여들었다. 이처럼 ‘나만 힘들다’고 울면서 다시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던 남자들과 귀신이 되지 않으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된 여자들의 형상이란 “표리와도 같은 관계”(송효정)였다.

2000년대에 이르면, 1990년대에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1세대 시네페미니스트들이 아카데미를 기반으로 더욱 활발한 연구 활동을 시작한다. 이들의 작업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텐데, 하나는 젠더의 관점에서 한국영화사를 다시 쓰는 작업,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한국 시네페미니즘의 이론을 구축하고 당대 영화를 분석하는 작업이었다.


한국영화사에 대한 재평가와 재기술은 매우 흥미로운데, 기존에 그다지 주목을 끌지 못했거나 폄하되었던 여성 캐릭터, 여성향 영화 그리고 여성 관객들을 다르게 분석하고 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들이 남성 영화인과 남성 감독 중심으로 젠더화되어 있었던 한국영화사에 다채로운 색을 부여한다. 김소영의 『근대성의 유령들』(2000), 변재란·주유신 등이 참여한 『한국영화와 근대성』(2001), 그리고 백문임의 『월하의 여곡성-여귀로 읽는 한국 공포영화사』(2008) 등이 주목할 만한 성과였다.

이론 작업의 경우에는 페미니즘 제 3물결이라고 불리는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을 비롯한 다양한 포스트 담론들, 특히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과 민족주의/국가주의를 비판하는 트랜스내셔널 이론이 시네페미니즘과 적극적으로 만났다. 김소영이 책임편집한 선집 『아틀란티스 혹은 아메리카-한국형 블록버스터』(2001)와 『트랜스-아시아 영상문화』(2006), 그리고 김선아의 단독 저서인 『한국영화라는 낯선 경계』(2006) 등을 꼽을 수 있다.

비평의 장에서는 유지나, 심영섭 등 스타 페미니스트 영화평론가들이 등장했다. 특히 <씨네21> 평론가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한 심영섭은 대표적인 대중적 페미니스트 영화평론가로서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로서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다양한 욕설과 부당한 공격에 노출되기도 했다. 심영섭에 따르면 그는 2000년 대 초 김기덕 감독의 작품을 비판했다가 “유림 페미니스트, 페미 파시즘, 보지 평론가” 등의 공격을 받았다.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셈이다. 

2000년대 후반이 되면 전지구적 우경화와 함께 한국에서도 백래시의 시대가 열린다. 그러나 한번 터져 나온 말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말과 생각과 마음들은 쌓여서, 그 다음을 기어코 열어젖힌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다양한 여성영화를 볼 수 있고,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시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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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손희정, 『페미니즘 리부트』, 나무연필, 2017.

-송효정, 「한국영화, 페미니즘, 그리고 재현」, 《영화평론》 30호, 2018. 

-이주현, “[서울국제여성영화제②] 여성영상창작집단 바리터, ‘바리터 30주년의 의미를 말하다’”, 《씨네21》, 2019.09.18. 

-조애리·이혜경 외, 「좌담: 페미니즘과 대중문화의 만남, 뿌리내리기」, 《여성과 사회》 5호,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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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리부트>, <성평등>, <다시, 쓰는, 세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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