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퍼플레이가 만난 사람들

잠그지 못한 ‘밸브’를 통해 돌아본 ‘나’

<밸브를 잠근다>, <면도> 한혜지 배우

퍼플레이 / 2020-04-17



#세상을_바꾸는_여자들
2020.4.1|한혜지 배우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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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지 배우 필모그래피
2019  <입문반> 주연
           <사자> 단역
2018  <밸브를 잠근다> 주연
           <엄마가 60살이 되기 전에> 주연
2017  <면도> 주연
2015  <글로리데이> 단역

한혜지 배우 ©퍼플레이

따뜻함과 단단함. 인터뷰를 위해 만난 한혜지 배우에게서 느껴진 에너지다. 2015년 <글로리데이>(최정열)로 연기에 입문해 어느덧 데뷔한 지 햇수로 5년차에 이르는 그는 상냥하면서도 호쾌하고,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한혜지 배우는 “인터뷰 장소가 너무 골목 속에 있다”며 ‘찾아오는 길’을 직접 손으로 써 인터뷰 하루 전 문자로 보내주었다. 상세한 설명과 함께 보내준 약도 덕분에 헤매지 않을 수 있었다. 인터뷰 당일, 인사를 나누고 퍼플레이 굿즈를 건네주니 그도 “직접 만들었다”며 이어폰 줄감개를 선물로 주었다. 포근한 마음이 전해져오는 순간이었다. 

간호사로 일을 하다 연기에 눈을 뜬 한혜지 배우는 연극동아리에 들어가 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비전공자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연기자로 길을 돌리기까지는 엄청난 결심이 필요했을 듯한데 그는 담담하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연기를 막 시작할 무렵 가장 뜨거웠던 시기, 그는 어떤 배우가 될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결론은 ‘잘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의 삶도, 인물의 삶도 잘 사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에서 뿌리 깊은 확고함을 느낄 수 있었다. 

<밸브를 잠근다> <면도> 등을 통해 다채로운 얼굴을 보여준 한혜지 배우가 궁금했다.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을 자신만의 해석과 호흡을 거쳐 세밀하고도 특색 있게 표현해내는 그와 직접 이야기를 나눠봤다. 

<입문반> 스틸컷

-벌써 2020년의 1분기가 지났어요. 배우님은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입문반>으로 상을 받은 만큼 남다른 해였을 것 같은데 어떻게 보내셨어요?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가라앉히는 연말을 보내다가 2020년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2019년 시작할 때는 기운이 다 빠진 상태여서 일을 좀 쉬었었는데, 연말에 좋은 기운을 많이 받았으니 2020년엔 많은 시도와 경험을 해야겠다는 각오를 했죠. 실패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서 도전을 잘 안 했었는데 이제 해보고 싶어요. 

-도전과 시도에는 연기 외적인 것들도 포함되는 건가요?
그것보다는, 저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캐릭터나 장르와 매체들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일일드라마나 주말드라마, 웹드라마, 광고 등 다양한 분야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올해 초에 tvN에서 방영한 <블랙독>에 나오시는 걸 보고 혼자 반가워했어요. 앞으로 드라마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는 건가요?
(제작진에서) 연락을 주셔야…(웃음). 드라마는 영화 현장과는 또 달라서 어려웠어요. 드라마 제작 환경은 호흡이 정말 빨라서 모니터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다 보니까 어렵고 무서웠죠. 단편영화나 독립영화 작업을 할 때는 스태프들과 서로 친해진 후에 작업에 돌입하는 경우가 많은데 드라마는 정말 낯설더라고요. 그래서 드라마 현장은 아직도 가면 어색해요. 적응해나가는 방법을 찾는 게 제 몫이겠죠.

한혜지 배우 ©퍼플레이

-간호사를 그만 두고 2014년부터 배우 준비를 한 뒤 2015년부터 연기를 시작하셨다고요. 비전공자에 하고 있던 일까지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이었잖아요. 웬만한 용기가 아니고서는 내리기 힘든 결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배우님은 오히려 연기를 시작한 건 ‘이기심’에서였다고 다른 인터뷰를 통해 말씀하셨어요. 하고 싶은 걸 해야겠다는 마음을 왜 ‘용기’가 아니라 ‘이기심’이라고 생각하셨나요.
꼭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을 하게 됐다는 점에서 이기심이라는 단어를 쓴 거였어요. 옳다고 믿거나 진심으로 원해서 행동하는 것은 저한테는 너무 당연한 거죠. 그런데 다른 사람이 봤을 땐 용기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어느 정도 ‘모르는 것’도 용기의 재료가 되는 것 같아요. 얼마나 힘들지, 얼마나 위험할지 모르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게 용기의 재료가 아닐까 싶어요.

-연기를 하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연기자의 삶이나 생태에 대해서 잘 모르셨던 거겠네요.
네, 전혀 몰랐어요. 2008년도에 처음으로 연극을 보고 난 후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극이 오르기 전에 암전이 되잖아요. 난생 
처음 겪어보는 어둠이었죠. 극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린 뒤 불이 꺼지면서 완전히 깜깜해졌고, 무대에서 빛이 한 조각 새어나오더니 배우가 나와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연기를 하더라고요. 그게 제가 본 연기하는 사람의 첫 모습이었는데 너무 행복하고 자유로워 보였어요.

사실 제가 원해서 간호 전공을 선택한 건 아니었어요. 언니가 간호학과를 다니고 있었고, 저는 건축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집에 대학생이 둘이다 보니 부담이 됐죠. 여러 반대에 부딪히다 간호학과에 가게 됐어요. 하고 싶은 것을 못한다는 것에 대한 마음의 딱지가 있는 상태에서 연극을 보게 됐고 ‘언젠가는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씨앗 정도였고, 그 후에 싹이 트고 그걸 키우는 단계가 있었던 거죠.

한혜지 배우 ©퍼플레이

-싹을 틔우고 키웠던 과정도 궁금해요.
병원 입사했을 때는 간호사에 대한 뜻이 있었어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진심으로 기뻤죠. 그런데 간호사 일이 워낙 고되다 보니 힘들 때마다 대학로에 가서 연극을 보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위로를 받고 ‘아무래도 이걸 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키워나갔죠. 그러다가 연극동아리에 들어가서 극을 하나 올렸어요. 그때 대학로에서 활동하고 계시던 연극배우 분이 마지막 리허설을 보고 가셨는데, 공연이 다 끝난 뒤 연기 선생님이 말씀해주시길 그 분이 저한테 ‘끼가 있는 것 같다, 저 친구 좋다’는 말을 해주셨다고 하더라고요. 연기를 하고 싶은데 전공자가 아니라 고민할 때였는데 그 말이 마치 ‘너 연기해도 돼’라고 들렸어요. 그 후로 간호사에서 한 발을 옮겨놓고 싹을 키우기 시작했죠.

-간호사 일은 몇 년 정도 하다가 연기를 준비하신 거예요?
3교대 근무를 한 건 2년 10개월 정도요. 그 뒤엔 개인병원에도 있었고 연구 간호사도 했어요. 환자를 직접 대면하지 않고 서류 작업하는 리서치 간호사를 마지막으로 하다가 완전히 관둔 건 2017~2018년 사이예요. 

-그럼 간호 업무를 하시면서 연기도 하신 거예요?
네. 3교대 근무할 때는 연기동아리도 안 들어갔을 때였고, 개인병원에서 근무할 때나 연구 간호사로 일할 때 비로소 시간적 여유가 생겼어요. 퇴근하고 나서 연기 스터디도 나갈 수 있게 되고, 시간이 맞으면 촬영도 할 수 있었죠.

한혜지 배우 ©퍼플레이

-데뷔작인 <글로리데이>에서 간호사 역할을 연기하고 또 이상희 배우님을 만나셨는데요. 간호사로 일하다 배우로 전향한, 나와 같은 이력을 가진 동료를 데뷔하자마자 만났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큰 힘이 됐을 것 같아요.
오디션은 두 개 대본으로 봤는데 원무과 직원과 간호사 역할이었죠. 근데 간호사로 캐스팅이 됐어요. 스태프들이 세팅하는 걸 직접 보고 싶어서 촬영 당일 현장에 3시간 전에 갔어요. 시간이 돼서 메이크업을 받으러 분장실에 갔는데 어떤 분이 분장을 받고 있는 거예요. 그분이 저를 보더니 ‘자기도 간호사라며?’라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 언니가 이상희 배우였어요. 처음엔 낯설어서 경계를 하고 말을 아꼈는데 언니가 먼저 말을 걸어줬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까 공통점이 많아서 연락처를 물어봤어요. 어떻게 극복하고 여기까지 왔는지 너무 궁금한 거예요. 연기는 어떻게 시작했고, 부모님은 어떻게 설득했는지 물어봤죠. 아직도 어려운 거 있으면 전화해서 물어봐요. 자주 연락은 못하는데 언니가 해주는 말들이 저한테 되게 오래 남아요.

-손으로 하는 걸 잘하고 또 좋아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림 그리기, 농사짓기, 뜨개질 등등 SNS 프로필에 적어놓은 ‘자급자족프로젝트’와 연결되는 일들인 것 같았어요. 이것들이 단순한 취미생활을 넘어 일상을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행위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손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언제부터 시작하게 된 건지 궁금해요.
손으로 하는 걸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비누를 조각하는 미술 과제가 있었는데, 노란색 빨랫비누로 우비소녀를 깎다가 팔이 부러졌어요. 근데 그걸 그냥 제출하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했죠. 미술 과목을 좋아했고 잘하고 싶었어요. ‘자급자족’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뭔가를 한 것은 농사로부터 시작됐어요. 지난해 4월, 구에서 지원해주는 텃밭 상자를 구매해서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어요. 2019년 들어서 배우로서 재능이 없다는 생각에 촬영 하나하나가 다 힘에 부쳤고, 괴로움에 지쳤었죠. 연로가 다 된 자동차를 뒤에서 억지로 밀고 가는 것 같았어요. 연료를 채울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쉬면서 농사를 짓게 된 거예요. 고추를 심었는데 진짜 고추가 열리고, 씹었을 때 고추 맛이 나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웃음). 식물을 돌보는 일이 곧 저를 돌보는 일이 된 거죠. 햇빛도 많이 보고 정서적으로 안정이 많이 됐어요.

한혜지 배우 ©퍼플레이

-프로필에 있는 문장 중 또 눈에 들어온 게 있었어요. ‘저의 삶도, 인물의 삶도 잘 사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 말에서 단단함과 확고함이 느껴졌어요. 인간 한혜지로서 그리고 배우 한혜지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는데,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신다면요?
2013~2014년에는 연기 스터디를 하고 2015년에 연기를 시작했는데, 그맘때가 진짜 뜨거웠던 시기예요. 연기를 시작하려고 할 때 ‘너 왜 간호사 그만두고 배우 하려고 그래?’ ‘네가 생각하는 배우가 뭔데?’ 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그게 다행스럽게 저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는 계기가 됐죠. 그에 대한 답으로 노트 첫 번째 페이지 아래쪽에 그런 말을 적어놨더라고요. ‘잘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 좋은 배우가 되는 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말이 저한테는 ‘잘 사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극중에서의 ‘나’와 실제 ‘나’ 사이에서의 균형도 잘 지켜야 되겠다고 생각했죠.

-‘독립운동가’라는 단어도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내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겠다는 선언 같은 것일까요?
나를 지키자는 의미예요. 다른 사람에 의해 휘둘리지 않고, 타인의 강점기에 살지 않겠다는. 자아라는 주권을 지키겠다는 의미죠. 외부의 영향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미로 쓴 거예요.

한혜지 배우 ©퍼플레이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고 고민하시는 모습을 보고 저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코로나 사태로 인한 대구·경북지역의 의료봉사자 모집 글을 보고 지원을 생각하신 일이라든지, N번방과 같은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그러한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궁금해요.
엄청난 힘을 낸 게 아니라 분노했기 때문에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성향 자체가 불평등과 억울함을 잘 못 참는 성격인 것 같아요. 어떻게든 힘이 될 수 있도록 저항하고 시끄럽게 굴어야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해주고 귀를 기울여준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배우님이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들의 캐릭터를 살펴보면, 우리 주변에서 한 번쯤은 마주쳤을 만한 인물들이더라고요. 또 누구나 한 번쯤은 겪었을 만한 일들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진행돼서 공감을 불러일으키죠. 혹시 시나리오를 고를 때 1순위로 꼽는 원칙이나 수칙 같은 게 있을까요?
예전에는 저와 가까운 인물에 많이 끌렸던 것 같아요. 내가 경험한 것들이 녹아있는 인물과 이야기를 좋아했는데, 이제는 치열한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어요.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싸우고 쟁취하는 캐릭터, 씩씩한 사람을 연기하고 싶어졌죠. 최근에 본 <작은 아씨들>이 영향을 많이 준 것 같아요. 시얼샤 로넌에 빠졌죠. <브루클린>과 <작은 아씨들>을 보면서 단단하면서도 여유 있는 캐릭터에 끌렸어요. 그런 캐릭터가 등장하는 시나리오가 들어오면 당장 할 것 같아요(웃음). 이제는 제가 닮고 싶은 인물한테 더 마음이 가고, 그런 캐릭터를 보면 너무 좋아서 밤에 잠을 못 자요. 

<밸브를 잠근다> 스틸컷

-<밸브를 잠근다>의 진나는 아이를 둔 기혼여성인 동시에 가스 검침원이라는 직업인인데요. 진나를 연기하면서 기혼여성, 가스 검침원의 삶을 체험하는 계기도 됐을 것 같아요.
‘진나가 잠그지 못한 밸브’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던 것 같아요. ‘나는 제대로 살고 있나?’ ‘지금 나에게서 새어나가는 건 무엇일까?’라는 생각도 하게 됐죠. 그리고 촬영하면서 보이는 것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되는데 이 작품은 정말 아무것도 신경 안 쓰고 했어요. 외모적인 것도 그렇고 ‘어떻게 하면 잘 보일까’라는 생각을 안 하고 자유롭게 찍었어요. 한편으론 너무 신경 안 쓴 게 아닐까 했는데 오히려 거기서 진심이 묻어나기도 하더라고요. 자유롭고 본질적인 것에 집중해야 전달이 잘 된다는 걸 배웠던 것 같아요.

-가스 검침원이라는 역할을 연기하기 위해서 그분들의 업무라든가 업무 환경에서 겪는 불합리함 같은 것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셨을 것 같아요.
정말 조사 많이 했어요. 가스 검침원으로만 찾으면 한계가 있어서 수도 검침원도 찾아봤어요. 다큐멘터리랑 그분들의 인터뷰도 많더라고요. 감독님과 서로 공유하면서 서치를 많이 하고 작업에 들어갔죠.

<면도> 스틸컷

-<면도>는 사회초년생인 여성이 겪는 무례한 상황들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여자를 동료로 보지 않고 그저 ‘여성’으로만 치부하는 모습이라든지, ‘털’을 기준으로 여자를 비교하고 평가하는 것이라든지. 그런 장면들을 보며 짜증이 솟구쳤는데, 배우님은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어땠을지 궁금해요.
저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어서 공감할 수밖에 없었어요. 민희가 겪는 일들이 너무 보편적인 얘기라고 생각했죠. 제가 연기를 하다가 힘들거나 집중력이 흐트러질 때 마음속으로 되뇌었던 문장이 있어요. ‘세상의 수많은 민희를 위하여’라는 말이었죠. 민희를 책임감 있게 표현하고 싶다는 마음이었어요. <면도>는 제가 여성주의와 성평등을 공부하는 계기가 되어서 더 의미 있는 작품이에요. 현장 소품 중에 『82년생 김지영』이 있었는데, 그 책을 쉬는 시간마다 읽고 촬영 끝나고도 숙소에서 읽었어요. 그러면서 배운 것도 많아요. 그리고 이 영화를 상영한 첫 번째 영화제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였는데, 다른 많은 여성영화들을 보면서 내가 어떤 걸 비판해야 하는지도 알게 됐죠.

작품마다 제가 연기한 인물과 이야기가 저를 통과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작품을 하고 나면 제가 못 보던 게 보여요.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이죠. 어떤 인물을 경험함으로써 또 다른 시각이 열리더라고요. 연기하면서 제일 좋은 것 중 하나예요.

-<면도>에서는 디테일한 설정이 눈에 띄었어요. 민희가 하이힐로 힘들어하는 모습이나  남자 직원들이 자기들끼리 메뉴를 고르고는 민희의 대답도 안 듣고 가버리는 장면들이었는데요. 이런 불편함과 무례함을 일상적으로 겪는 이들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장면들이죠.
하이힐 신고 삐끗하는 건 영화의 어느 지점이든 꼭 한 번 넣고 싶었어요. 리허설을 하는데 그냥 걸어가는 게 재미가 없는 거예요. 남자 배우들이 실제로 체구가 커서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저는 평생을 종종걸음으로 살아서 걷다가 어느 순간 템포를 빨리하는 게 몸에 배어있어요(웃음). 그래서 그걸 영화에 넣고 싶었죠. 그리고 촬영 당시 실제로 구두가 불편했어요. 리허설 때 일부러 삐끗하고 감독님에게 ‘봤어요? 괜찮아요?’라고 물었는데 괜찮다고 하셔서 넣게 됐죠.

<밸브를 잠근다> 스틸컷

-<밸브를 잠근다>와 <면도>의 공통점이 무례함을 웃음으로 넘겨야 하는 상황들이 있다는 거예요. 진나와 민희 둘 다 쌓이고 쌓였던 것들이 폭발하는 경험을 한다는 점도 같죠. 배우님이 연기하면서 느꼈던 진나와 민희의 공통점 혹은 차이점이 있었나요?
대구에서 제 단편들을 모아서 상영했었는데 관객 분들이 그런 얘기를 하셨었어요. 제가 맡는 캐릭터가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다고. 전 한 번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놀랐어요. 전부 다른 캐릭터를 연기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얘기를 들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차이점이 있다면 그런 것 같아요. 민희는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서 그냥 웃고 넘어가다가 ‘나 이거 불편한데?’라고 말할 수 있는 시작점에서 끝난다면, 진나는 그렇진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켜야 할 게 너무 많잖아요.

-맞아요. 진나는 짐이 너무 많죠. 아들과 남편을 부양해야 하고, 자신도 지켜야 하고. 그런 점에서 진나가 너무 안쓰러웠어요.
<밸브를 잠근다> 마지막 장면을 보면, 장난감 하나 더 사고 말고의 문제로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남편 벌이가 없고 진나 혼자 벌어서 아이를 키워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생활비와 월세 등등을 계산해봤을 때 진짜 빠듯하더라고요. 은행 이자도 있을 테고요. 그렇게 생각해보면 진나는 정말 큰 결심을 한 거예요. 그만큼 자기가 지키고 싶은 가치관이 있었던 거죠.

<면도> 스틸컷

-진나와 민희 모두 일상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인물들인데요. 너무 튀지 않으면서도 밋밋하지 않게 표현하는 게 중요했을 것 같아요. 둘 다 감정의 폭이 크지 않아서 미세한 감정 변화를 보여주는 장면도 신경을 쓰셨을 것 같은데요. 진나와 민희를 연기하면서 중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요?
어떤 캐릭터든 제 몸과 목소리를 통과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표현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는 것 같아요. 제가 일상생활에서도 감정의 폭이나 어조의 간극이 크지 않은 편이라 캐릭터에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것 같기도 해요. 연기할 때 고민하는 지점은, 제가 느낀 것보다 덜 표현될 때가 많다는 거예요. 내가 느낀 만큼 눈이나 표정, 움직임에서 잘 드러났는지 살펴볼 때가 많아요.

-연기적 영감은 어디서 얻으세요?
좋아하는 배우들의 인터뷰 찾아보는 걸 좋아해요. 누군가는 음악에서 영감을 받는다고 해서 저도 도움을 받아볼까 했는데 잘 안 맞는 것 같더라고요. 책도 읽어보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는데 저에게 가장 많이 힌트를 주는 건 다큐멘터리예요. 실제로 제가 보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영감을 받아요. <밸브를 잠근다>는 다큐에서 영감을 얻었고, <면도>는 제 경험을 많이 가져온 것 같아요.

<밸브를 잠근다> 스틸컷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진나와 민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불편한 것에 대해서 불편하다고 목소리를 내고 불합리한 상황에서 무반응으로 동조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진나는 지금도 충분히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진나는 스스로를 합리화하지 않고 생각한 바를 실천한다는 점에서 저보다 성숙하죠. 저라면 진나처럼 행동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지난해 <벌새>부터 <우리집>, <메기>, <아워바디> 등을 비롯해 올해는 <찬실이는 복도 많지>까지 여성 감독들의 활약이 뚜렷한데요. 배우로서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힘을 받는 게 있을 것 같아요. 
좋은 작품을 만들어주시고 성과를 내주시는 것 자체로 감사한 것 같아요. 저도 의도한 건 아닌데 여성 감독님들이랑 작업을 많이 했더라고요. 확실히 소통하는 데 편한 게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여성 감독님들의 훌륭한 페르소나가 되고 싶어요.

-이런 흐름들이 더 많아지고 거대해지다보면 여성 배우 분들도 기회를 많이 얻게 되고 맡을 수 있는 역할의 폭도 넓어질 수 있겠죠.
확실히 이런 움직임들이 있다 보니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방식도 변화하는 것 같아요. 잘못 그려진 캐릭터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아지고 쌓이니까 
남성 감독님들도 캐릭터를 그리는 데 있어서 한 번 더 생각하고 경계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시국페미> 스틸컷

-배우님의 퍼플레이 추천작이 궁금해요.
제가 관심 있는 키워드는 ‘몸’과 ‘투쟁’이에요. <시국페미>도 보고 싶었던 작품이었는데 퍼플레이에 있어서 하트를 눌러놨어요(웃음). <통금>도 관심 있는 주제여서 보고 싶다고 생각했죠. “조심해라”라는 말을 들을 때 답답함을 느껴요. 딸 가진 부모들 입장에선 걱정되니까 조심하라는 거겠지만 가끔 엄마한테 말해요. “이게 내가 조심해서 될 일이야?”라고. ‘내가 조심한다고 해서 바뀔까?’라는 생각이 들죠.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올해 많은 실패와 작은 성취를 보여드리고 싶어요. 요즘엔 ‘이 시간들을 어떻게 잘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해요. 이 시간을 잘 보내면 다음에 기회가 왔을 때 좀 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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