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퍼플레이가 만난 사람들

욕망을 가진 여자가 나를 끌어당긴다

<그녀의 욕조.> 박채원 감독

퍼플레이 / 2020-02-13


#세상을_바꾸는_여자들
2020.2.8|박채원 감독을 만나다   
박채원 감독 필모그래피 
2018  <그녀의 욕조.> 연출 
2014  <황제를 위하여> 연출지원 
           <스승의 은혜> 연출

박채원 감독 ©퍼플레이

그 여자다. 보자마자 얼굴이 달아오른다. 눈도 못 마주치겠어…. 비에 흠뻑 젖은 걸 보니 우산이 없었나보다. 늦은 시간. 덕분에 목욕탕 안에는 그녀밖에 없다. 엄마가 잠시 외출한 지금이 기회 아닐까? 뿌옇고 축축한 탕 안은 습기로 가득하다. 발갛게 상기된 볼. 그녀 때문인지 탕 안의 후끈함 때문인지 도통 모를 일이다. 아주 잠깐만, 너무 대놓고는 말고, 슬쩍 보기만 하는 거야. 슬쩍… 슬쩍만….

<그녀의 욕조.>의 주인공 소정(김주아)은 비 오는 날 저녁 늦게 목욕탕을 찾은 여자를 보고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박채원 감독의 <그녀의 욕조.>(2018)는 성인 여성에 대한 중학생 여자아이의 동경을 탁월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박 감독은 대중목욕탕이라는 배경과 몽환적인 분위기를 이용해 누군가에 대한 ‘끌림’을 숨 막히고 밀도 있게 그려냈다.

<그녀의 욕조.>는 통념적으로 ‘남성’의 시선으로 읽히는 관음을 여성, 그것도 여자아이의 시선으로 전복시킨다. 영화는 여성의 몸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소정은 무엇에 홀린 것처럼 여자의 몸을 바라본다. 변태적인 성욕이 완전히 제거된 그 시선은 대상에 대한 무해한 호기심과 달뜬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작품을 통해 미성년 여성과 성인 여성의 관계에 집중해온 박채원 감독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여자아이의 이야기”라며 “감수성이 풍부할 때의 불안불안한 느낌이 좋다”고 말했다. 또 그는 “한국의 대중목욕탕이 굉장히 매력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드라마나 영화에서 한 번 더 써보고 싶다”며 사라져가는 공간에 대한 애정을 보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영화와 드라마에 관심을 갖게 된 후 한 길만을 걸어온 박 감독은 현재 한 방송국의 PD로 일하고 있다. “영화 빼면 시체”라는 그와 만나 함께 나눈 대화를 전한다.

<그녀의 욕조.> 스틸컷

-예술고등학교를 진학하고 고등학생 때부터 영화연출을 배우면서 영상 작업을 하셨잖아요. 학창시절부터 영화감독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활동해오신 것 같은데, 감독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한 계기가 있나요?
초등학생 때 캐나다로 유학을 갔었어요. 그런데 영어가 안 되니 대화가 안 돼서 왕따를 심하게 당했죠. 친구도 없고 말도 안 통하니까 집에서 드라마를 계속 봤어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보다가 어느 순간 이해가 되기 시작하면서 캐나다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그때 드라마가 가진 힘과 긍정적인 영향을 알게 됐고 영화와 드라마에 관심을 갖게 됐죠.
그리고 극장에서 영화 상영 후 GV 때 관객 분들이 제 이야기에 공감해주고 박수를 쳐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관객들이랑 면대면으로 얘기할 수 있는 영화감독도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렸을 적 목욕탕에 가면 여성들의 몸과 아름다움에 반해 넋을 놓고 바라본 적이 많았다고요. 어린 시절 감독님이 느꼈던 감정이 영화에 그대로 녹아든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집 근처에 공중목욕탕이 있었어요. 목욕을 하는데 성인 여성들의 몸에 계속 눈이 가더라고요.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성인이 되고 나서 목욕탕에 갔는데 너무 아름다운 여성 분이 계신 거예요. 그분과 나이가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또 동경심이 생겼죠! 그때 이 영화를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게 어린 시절의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어른이 돼서도 느끼는 감정이라는 걸 알고 굉장히 놀랐거든요. 많은 여성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채원 감독 ©퍼플레이

-어린 시절에 느꼈던 감정을 성인이 돼서도 느꼈고, 그걸 포착해서 영화로 풀어내신 거네요.
어린 시절 느꼈던 건 동경이었어요. 그런데 성인이 된 후에는 ‘내가 그때 느낀 게 사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감정의 구분이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 미묘한 감정선을 표현을 해보고 싶었어요.

-첫 작품인 <스승의 은혜>에서도 미성년 여성과 성인 여성의 관계를 그리셨더라고요. 그런 관계에 애정을 갖고 계신 것 같아요.
저는 왠지 모르게 여성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어요. 사랑받고 싶고 ‘쟤 잘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죠. 그래서 나는 왜 이런 감정을 느낄까 하는 궁금증이 많았고, 그걸 영화를 찍으며 찾아가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잘 보이고 싶고 잘 해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근데 저는 그게 항상 집착의 방향으로 흐르더라고요(웃음).

<그녀의 욕조.> 포스터

-정말 궁금했던 게 있어요. 영화 제목에 마침표가 붙어 있는데 그 이유가 뭔가요?
사람들이 오타 난 줄 알고 자꾸 점을 지우더라고요(웃음). 그게 되게 사소한 거긴 한데 여자 목 뒤에 점이 있잖아요. 그 점을 소정이가 그림 그릴 때 그려 넣어요. 그걸 의미한 거예요.

-<그녀의 욕조.> 촬영은 얼마나 걸리셨어요?
대본 수정 작업과 프리 프로덕션은 4개월 넘게 걸렸고, 촬영은 6회차에 끝냈어요. 후반 작업은 한 달 걸렸습니다.

-이 정도면 졸업영화의 평균 정도인가요?
보통 이 정도 걸리긴 하는데, 저는 이걸 위해 습작 형식으로 하나를 먼저 찍었어요. 그다음에 <그녀의 욕조.>를 촬영한 거라 제작 기간으로 치면 거의 1년 정도 걸린 것 같아요.

<그녀의 욕조.> 스틸컷

-영화 속 배경이 오래된 목욕탕이에요. 요즘에 찾아보기 정말 어려운데 장소 섭외는 어떻게 하셨나요?
저는 목욕탕이 작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큰 목욕탕은 제가 살리고 싶은 느낌이 안 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서울시 문화재 리스트에 수록된 목욕탕을 전부 방문했어요. 직접 목욕도 해보면서 괜찮은지 확인하고. 근데 목록에 있는 목욕탕 대부분이 너무 오래돼서 없어졌더라고요. 그래서 허탕 친 적도 많아요. 그렇게 하나씩 찾아다니다가 영화 배경으로 쓴 목욕탕이 제일 잘 맞는다고 생각해서 촬영하게 됐어요. (그 목욕탕은 아직도 있나요?) 네, 있어요. 성수동에 있는 ‘성수탕’이라는 곳이에요.

-영화에 비 내리는 장면이 있는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아요. 어떻게 촬영하셨어요?
60만원 정도를 들여서 살수차를 대여했어요. 그런데 웃긴 게 ‘찍자’ 하는 순간 비가 미친 듯이 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야, 이거 느낌이 좋다’ 했죠. 그런데 비가 촬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더라고요. 거의 우박처럼. ‘망했다, 이거 쉽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스태프들이 목욕탕 뒤에 가서 제사를 지냈어요. ‘비 그만 내려주세요’ 하면서. 그런데 신기하게 그러고 난 후 비가 정말 그치기 시작하더라고요. 덕분에 촬영을 할 수 있었죠. (제사를 지낸 게 효험이 있었던 거네요?) 다들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웃음). 다들 ‘우리의 정성으로 비를 그쳤다’면서 좋아했죠. (그럼 살수차는 이용을 하셨어요?) 네. 1시간 정도 간신히 했어요. 


<그녀의 욕조.> 스틸컷

-비 신 촬영 말고도 현장에서 벌어졌던 에피소드가 궁금해요.
영화에 누드 모델이 대역으로 나와요. 그런데 저는 누드 모델과 같이 작업한 게 그때 처음이라 당황스럽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당황하면 스태프들도 당황하니까 최대한 많이 해본 사람처럼 디렉팅 했어요. 모델 분이 프로의식을 갖고 굉장히 열심히 해주셨는데 그때 어떤 경외심이 들었죠.

-단편임에도 노출이 있어서 캐스팅 과정에서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애초에 제가 원한 배우가 있었는데 그분이 힘들다고 하셔서 오디션을 진행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리스크가 있다 보니까 많이들 안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발로 뛰었죠. 제가 원하는 분들 찾아다니면서 여쭤봤어요. 그래서 겨우 한 분을 캐스팅했죠.

-리크스가 큼에도 불구하고 노출 연기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제가 봤던 걸 그대로 담고 싶었어요. 내가 느꼈던 걸 다 보여주기 위해서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저는 이 영화가 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었고, 감추거나 보일 듯 말 듯 표현하는 게 더 선정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여성의 몸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과 일치한다고 생각했죠.

<그녀의 욕조.> 스틸컷

-‘관음’이라는 것을 여성의 시선, 특히 여자아이의 시선으로 전복시켜 보여준 게 좋았어요. 이를 위해선 기존의 영화들이 보여줬던 연출 방식과는 다른 지점이 필요했을 것 같아요. 시나리오 작업이나 연출 계획에서 중점을 둔 게 있나요?
노출을 다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아이의 감정선을 잘 보여주는 것. 아이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바로 여성의 몸을 보여주면 야한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해서 최대한 아이의 감정선을 길게 보여줬어요.

-초반 시놉시스에서는 주인공이 2차 성징이 오지 않아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는다는 설정이 있었어요. 그런데 완성된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더라고요. 물론 완성된 내용이 더 좋긴 하지만, 빠지게 된 이유가 있나요?
소정이가 왜 여성의 몸에 그렇게 집착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피드백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런 신을 넣었는데 촬영할 때 뺐죠. 저는 이게 온전히 목욕탕에서만 일어나는 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외부 요인이 들어가는 순간 영화가 지저분해진다고 생각해서 아예 싹 다 빼고 정공법으로 가자 싶었죠. ‘이건 목욕탕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여자아이는 여자를 좋아해’ 이렇게 가보고 싶었어요.

박채원 감독 ©퍼플레이

-소정 역할을 연기한 김주아 배우의 연기가 정말 탁월했어요. 성인 여성을 동경하는 여자아이의 감정을 잘 소화해냈는데 캐스팅은 어떻게 하게 되셨어요?
오디션 공고를 올렸는데 지원자에 주아가 있었어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미지가 성숙해서 고민이 됐는데 연기를 보자마자 ‘아, 이건 가야 된다’ 싶었죠. 바로 몰입해서 연기하는데 정말 프로더라고요. 비교할 상대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 자리에서 바로 캐스팅했어요.

-어린 시절, 나와 다른 성인 여성에 대한 동경이나 호기심 혹은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될 때의 순간과 느낌을 영화에서 잘 보여주셨어요. 주인공의 감정에 공감하게 만들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동시에 가져가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에 대한 연출 계획은 어떻게 하셨나요?
몽환적인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는 사운드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물 똑똑 떨어지는 미세한 소리 같은, 사운드 디자인을 열심히 했어요. 아무래도 시나리오를 쓸 때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뿌옇고 축축한 곳에서 아이가 여자를 바라본다.’ 이걸 표현하기 위해 사운드와 스모그 머신을 적절히 사용했죠.

-이 영화를 위한 습작 촬영까지 포함하면 거의 1년여에 걸쳐 영화를 완성한 셈인데, 다 만들고 난 뒤의 소감은 어떠셨어요?
제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다 들어가 있어서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어요. (만족하셨던 건가요?) 네. 저는 사실 한 번도 제 영화를 보면서 만족하진 않았었거든요. 근데 이 영화는 처음으로 제가 생각했던 걸 그대로 담아낸 영화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뿌듯했던 게 가장 커요.

-해외영화제에서 상영할 때 당시 반응은 어땠어요? 특히 상파울루 국제단편영화제에서는 관객상 수상까지 했는데요.
공중목욕탕이라는 공간 자체가 동양적이잖아요. 근데 영화 내용은 여성들이라면 한 번쯤 겪었을 법한 일인 거죠. 그래서 처음엔 배경에 흥미가 생겨서 봤다가 점차 ‘어? 이거 내 얘긴데?’라고 공감했던 것 같아요. 색다르지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평이 많았어요.

박채원 감독 ©퍼플레이

-롤모델로 삼고 있는 감독이 있나요?
윤가은 감독님. 굉장히 섬세하게 아이들을 디렉팅하시더라고요. 배우들과 벽 없이 소통하는 게 부러웠고 ‘어떻게 저렇게까지 연기를 최대치로 끌어낼 수 있지?’ 하는 궁금증이 컸어요. 영화도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정말 좋잖아요. (윤가은 감독님의 어떤 작품이 특히 좋았나요?) <우리들>이요. 선이의 동생인 윤이가 “맨날 싸우면 언제 노냐”고 하는 대사를 듣고 오열했어요. 사실 그게 저한테는 인생의 진리처럼 느껴지거든요. ‘맞아, 우리가 계속 싸우면 언제 화목하게 지내겠어’라는 생각이 들었죠. 어른들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잖아요.

-죽기 전에 꼭 만들어보고 싶은 영화 혹은 여성 캐릭터가 있다면요?
거짓말하는 여자를 그려보고 싶어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상대방을 속이는 여성. 최근에 『친밀한 이방인』이라는 소설을 읽었는데 여자 캐릭터가 굉장히 매력적이었어요. 여자가 됐다가 남자가 됐다가 신분을 10여 개씩 만들면서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인데 그런 캐릭터를 영화나 드라마에서 만들어보고 싶어요. 저는 항상 여자 캐릭터, 그중에서도 욕망을 가진 여자 캐릭터에 관심이 가더라고요.

-감독님에게 영화란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제 인생에서 영화 빼면 아무것도 안 남아요. 그래서 영화는 제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뭘 볼 때도 ‘이거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싶고. 영화 빼면 시체라는 느낌이에요.

<여름의 끝> 스틸컷

-퍼플레이에서 추천하고 싶은 영화가 있다면요?
보고 싶었던 영화는 <여름의 끝>이요. 이밖에도 엄청 많아요. ‘우와~ 이것도 있어?’ 이러면서 둘러봤죠. 퍼플레이에 있는 모든 영화가 보고 싶어요. 

-퍼플레이에서 <그녀의 욕조.>를 꼭 봐야 하는 이유를 말씀해주세요.
가장 어려운 질문이네요(웃음). 남자아이가 여자의 몸을 바라보는 영화는 많잖아요. 그런데 여자아이가 바라보는 건 별로 없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 영화를 보면서 어린 여자아이의 감정을 알아가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드라마를 열심히 찍자. 일단 지금은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자는 게 목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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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 미래의 여성 그리고 영화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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