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퍼플레이가 만난 사람들

발을 맞춰가는 것, 그게 사랑 아닐까

<퍼스트 댄스> 정소희 감독

퍼플레이 / 2020-01-30


#세상을_바꾸는_여자들
2020.1.17|정소희 감독을 만나다
정소희 감독 필모그래피
2018  <비닐하우스는 집이 아니다> 감독
2014  <퍼스트 댄스> 감독, 프로듀서, 촬영, 편집

정소희 감독 ©퍼플레이

손을 맞잡고 눈을 바라보며 두 사람이 춤을 춘다.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물 흐르듯 스텝을 밟는 둘을 보고 있으면 입가에 미소가 퍼지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퍼스트 댄스>(정소희, 2014)의 선민과 로렌 이야기다.

<퍼스트 댄스>는 레즈비언 커플의 결혼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로, 선민과 로렌은 친구들과 가족의 무한한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준비하고 치러낸다. 둘은 서로를 존중과 사랑으로 대하며 평생 동반자로서 함께할 것을 눈물로 약속한다.

영화는 레즈비언 커플의 결혼을 통해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사랑 앞에 성별은 중요치 않고, 결혼으로 사랑의 결실을 맺고 싶은 이들의 선택을 그 누구도 막을 권리는 없다고. 로렌의 엄마 메들린이 한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제게는 성적 취향만큼 경계가 불분명한 것도 없어요. 그렇게 타고나는 것은 그들의 선택 문제가 아니에요. (…) 변태적인 것도 이상한 것도 아니고 그냥 그들이 가지고 난 카드 패 같은 거죠. 그냥 좀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로렌과 선민의 이야기를 영화로 기록한 정소희 감독을 지난 17일 독립영화배급사 호우주의보가 운영하는 카페 ‘가시광선’에서 만났다. 그는 “선민과 로렌이 서로 발을 맞춰가면서 춤 연습을 하는 걸 보며 ‘아, 이게 결혼이지 않을까’ 생각했다”며 이 영화를 통해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깨게 됐다고 했다. 선민-로렌 커플의 친구로서 그리고 감독으로서 당시 둘의 결혼 과정을 영상으로 남기며 어떤 생각을 하고 또 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영화로 만들게 됐는지 들어봤다. 

<퍼스트 댄스> 스틸컷

-<퍼스트 댄스>의 시작이 궁금합니다.
처음에 선민이가 결혼식을 비디오로 찍어달라고 했어요. 그걸 제가 다큐멘터리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고 역제안을 했죠. 선민과 로렌이 어느 정도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무서운 마음이 덜했던 것 같아요. 또 그들은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다큐멘터리 작업으로) 잘못해서 출연자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감독 욕심으로 그들이 싫어하는 부분을 파헤치는 문제들을 항상 걱정해요. 물론 그건 찍는 동안에도 계속 고민하는 부분이지만, 그래도 그들에겐 내가 덜 낯선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에 하게 됐던 것 같아요.

-결혼식 비디오를 다큐메터리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구체적인 이유가 있나요?
한국사회에서 레즈비언 결혼이 공식적으로 영상물로 찍혀 나온 것이 없기 때문에 나중에라도 좋은 기록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선민에게 혹시 가능하다면 다큐멘터리로 만들면 좋겠다, 일단은 남겨두면 좋겠다고 했더니 “고민해보고 연락 줄게”라고 말했죠. 시간이 지나서 괜찮다고 하길래 왜 그런 결심을 했냐고 물었어요. 당시 미국에서 어린 퀴어들이 자살을 많이 하던 때였어요. 문제가 심각해서 많은 유명인들이 캠페인 영상을 찍었었죠. ‘너는 충분히 살아있을 가치가 있다’라는 내용의 캠페인이었는데, 선민이는 일련의 상황들이 한국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대요. 퀴어의 삶이 어둡고 불행한 것만 있는 게 아니라 밝은 미래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희망이 되고 싶다고 했어요.

-<퍼스트 댄스>가 레즈비언 커플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잖아요. 선민-로렌 커플의 친구로서 감독님도 느낌이 남다르셨을 것 같아요.
감동했고 제가 거기 있어서 고맙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국과 너무 다르다는 생각도 했고요. 한국에서는 친구 결혼식에 가도 감흥이 별로 없잖아요. 근데 거긴 친구들이 하나같이 진심으로 축복해주더라고요. 인터뷰를 하면 ‘나를 초청해줘서 너무 고맙다’ ‘내가 너의 친구일 수 있어서 고맙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저도 그런 마음이 많이 들었어요.

정소희 감독 ©퍼플레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로렌의 어머니가 너무 고마웠어요. 내 친구를 자신의 딸처럼 받아들이는 모습이 정말 고마웠죠. 왜냐하면 선민이는 부모님이 인정을 안 하실 때였으니까. 로렌 어머니가 “나는 딸이 원래 하난데 오늘 둘이 됐다”고 하시는데 그때 참…. 그리고 제가 원래 무교거든요. 그런데 결혼식에서 주례를 봐준 랍비 님이 어깨에 손을 얹은 뒤 기도해주시는데 한마음 한뜻으로 둘을 축복하는 게 느껴져서 정말 좋았어요.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신이 있다면요?
퍼스트 댄스(결혼식이 끝난 뒤 피로연에서 신부와 신랑이 하객들 앞에서 선보이는 춤)를 연습하는 장면이 너무 예쁜 거예요. 그래서 그때 제목을 ‘퍼스트 댄스’로 해야겠다고 정했죠. 퍼스트 댄스를 미국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서 보잖아요. 저는 그냥 편하게 추는 건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걸 연습하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아, 이게 결혼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한발 한발 서로 맞춰가면서 연습하는 것. 결혼식이나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을 깨주는 장면이었어요.

-비하인드 스토리나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한국에서 영화를 상영했을 때 걱정했었어요.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이나 보수적인 분들이 보고 기분 나빠하거나 안 좋은 말을 하면 어떡하지 했는데, 생각 외로 나이 드신 분들이 영화를 보고 그런 반응을 전혀 안 하시는 거예요. 어떤 분은 너무 감동스러웠다면서 본인의 딸도 이렇게 사랑받는 결혼을 시키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봐주는 게 고마웠어요.

-그런 경험을 하면 너무 감동적일 것 같아요.
사실은 그게 제 영화의 전략이었어요. 투 트랙이었죠. 하나는 퀴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다른 하나는 결혼에 대해 좀 생각해보자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한국에서는) 결혼식 자체가 괴로운 사안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사랑이란 게, 결혼이란 게 뭘까’라는 생각을 한국사회에서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런 반응이 나왔을 때 어느 정도는 내가 의도했던 게 먹혔다고 생각했죠. 물론 한 명을 한국사회 전부로 생각할 수는 없지만, 저는 한 명이 바뀌면 열 명, 백 명이 바뀐다고 생각하거든요.

-<퍼스트 댄스>로 또 의도하셨던 게 있나요?
강남의 독립영화관에서 상영했을 때예요. 아주머니 몇 분이 너무 잘 봤다면서 ‘저렇게 똑똑한 사람들 중에도 레즈비언이 있는 것이 놀랍다’고 말하는 거예요. 저는 사실 그것도 보여주고 싶었어요. 레즈비언 하면 다 못 살고 가난하고 힘든 게 아니라는 걸. 잘 사는 사람도 있고 똑똑한 사람도 있고 다양하다는 걸.

<퍼스트 댄스> 스틸컷

-<퍼스트 댄스>를 한 문장으로 설명해주신다면요?
따뜻한 사랑 이야기. 제가 아는 분이 <퍼스트 댄스> 보고 난 후에 “너 되게 따뜻한 사람이었구나?” 그러더라고요.

-혹시 선민과 로렌 커플은 현재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혹시 아이를 낳으셨는지도 궁금합니다.
더 이상 보스턴에 살지 않고 따뜻한 남쪽으로 이사를 했어요. 아이는 셋이에요. 같이 사는 강아지도 새로 생겼고, 대가족이 됐어요.

-선민 님도 이주민의 위치에 있잖아요. 이주민 문화예술 활동가의 눈으로 <퍼스트 댄스>를 본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가요?
사실 저는 그 정체성을 가지고 <퍼스트 댄스>를 찍진 않았어요. 근데 작년에 이주민영화제에서 <퍼스트 댄스>를 개막작으로 틀었죠. 저는 그 시선으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영화라는 게 그렇잖아요. 감독이 만든 시선도 있지만, 관객이 보는 시선도 있어요. 그걸 어떻게 보고 해석하느냐도 있는 것인데, 그러면서 복합적으로 생각되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한국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친구가 미국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잖아요. 어떻게 보면 한국의 퀴어들은 사회적 난민이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자꾸 떠나려고 하잖아요. 다른 나라 가서 결혼하는 게 소원 중 하나고. 그런 느낌에서 말하자면 선민이는 사회적 난민으로 성공한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웃음).

이주민 문화예술 활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세상은 하나의 나라나 지역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엄청난 교류가 세상을 변하게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선민이의 얘기가 미국 얘기일 수도 있지만, 한국사회에 주는 영향도 있다고 생각해요.

-다큐멘터리 작업뿐만 아니라 이주민 관련 문화예술 기획자로, 또 미디어 교육 강사로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이런 활동은 어떤 의미를 갖나요?
한국사회가 혈연중심의 단일민족 신화에 빠져있는데 사실 아니잖아요. 그런 점에서 보수적인 부분도 많은데 거기에 균열을 내고 싶어요. 퀴어든, 장애든, 다른 부분이든 굳어져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깰 수 있는 지점 중 하나가 이주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저한테는 이주민 활동이 의미 있죠. 누가 이렇게 하다 보면 다음 세대가 좋아질 거라고 했는데, 저는 다음 세대엔 관심이 없어요. 제가 있을 때 바뀌는 걸 봐야겠거든요. 그러려면 제가 해야 해요. 제가 있을 때 바뀌어서 제가 혜택을 받으면 좋겠어요. 저는 투사는 아니고 되게 겁쟁이거든요. 성큼성큼은 아니더라도 개미 똥구멍만큼이지만, 그렇게 가다 보면 어느 순간 조금이라도 바뀌겠죠.

정소희 감독 ©퍼플레이

-이제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죽기 전에 꼭 만들어보고 싶은 영화, 구현해내고 싶은 여성 캐릭터가 있으신지요.
여성영화, 극영화, 퀴어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장편이든 단편이든, 보면 심장이 간질간질해지는 로맨스. 아니면 로맨스인데 가슴이 찌릿찌릿한 것 있잖아요. (설레서요?) 아니 아파서. 서로의 마음을 못 알아줄 때 아픈 거거든요. 서로한테 상처 줄 때. 그걸 되게 찌릿하게 느낀 게 <노팅힐>이었어요. <노팅힐>에서 줄리아 로버츠와 휴 그랜트가 서로의 마음에 대한 오해 때문에 상처를 입잖아요. 나를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그럴 때가 있잖아요. 이런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은데 못 하겠죠? 나이는 들고, 게으르고. 그래도 할 수 있을 때 해보려고 해요.

-아울러 감독님이 좋아하시는 여성 캐릭터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아가씨>의 김태리랑 <안토니아스 라인>의 안토니아요. 묵묵하게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흔들리지 않는 사람. 근데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 그게 욕망이든, 내 꿈이든 내 길을 가는 사람이잖아요. 나한테도 남한테도 솔직한 사람이 좋아요. 물론 <아가씨>에서 김태리 배우가 사기꾼으로 나오지만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고 하지는 않잖아요. 결정하면 그리로 나아가는 것. 그런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어린 시절 감독님이 처음으로 본 영화는 뭔가요?
제가 시골에 살아서 극장에서 영화를 많이 볼 수 없었어요. 우리는 TV 프로그램 <주말의 명화>, <명화극장>으로 영화를 섭렵하는 시대였죠. 극장에서는 주로 어린이 영화밖에 안 틀었는데, 나는 그런 게 너무 재미없었어요. 첫 영화라는 인상을 받은 영화는 예요. 지금은 판타지를 그다지 안 좋아하는데 어렸을 때는 판타지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또 기억나는 게 <빅>이에요. <피터팬>이라든지. 현실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그래서 할리우드 영화를 ‘꿈의 공장’이라고 불렀었잖아요. 현실을 벗어나 꿈을 꿀 수 있는 것, 망상하는 걸 좋아해요.

-영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때는 언제인가요?
중학교 때? 할리우드 영화 같은 걸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 그전에도 저런 걸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했는데, 한국에서 영화를 한다는 생각은 못 했어요. 제가 좋아했던 건 할리우드 영화인데 할리우드를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중학교 때 <여명의 눈동자>가 나왔어요. 드라마가 꼭 영화 같은 거예요. “한국에서도 이런 걸 만들 수 있단 말이야?”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영화를 만들고 싶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근데 또 계산을 해봤죠. ‘영화로는 먹고 살 수 없을 것 같아.’ 그래서 신문방송학과에 간 거예요. 드라마 감독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그럼에도 영화에 대한 마음이 있었죠.

카페 가시광선 ©퍼플레이

-드라마 감독의 꿈을 접고 다시 영화감독의 꿈을 키운 건 언제부터였나요?
대학교 1학년 때 부산국제영화제가 시작됐거든요. 영화의 바다에 빠진 거죠. 제3세계 영화부터 독립영화, 전 세계 영화, 한국영화를 볼 수 있게 된 거죠. 너무 행복했어요. 그러면서 영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리고 여자는 영화감독 되는 것보다 드라마 감독 되는 게 더 어려웠어요. 그때쯤 EBS에서 <독립영화극장>을 했는데 기억에 남는 처음 본 영화가 임순례 감독의 <우중산책>이었어요. 우연히 보게 됐는데 ‘저게 뭐야?’ 하는데 끝나더라고요. 그때 ‘아, 작은 감정으로도 영화를 만들 수 있구나’ ‘저런 걸 독립영화라고 하는구나’ ‘독립영화를 한다면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독립영화 감독을 해야지 마음먹었죠.

-감독님에게 영화란 어떤 의미인가요.
영화는 꿈이죠. 그 꿈이 내가 바라는 꿈일 수도 있고, ‘이런 게 보고 싶은데’ 하고 느끼게 하는 꿈도 있고, 내가 보여주고 싶은 세상을 보여주는 창일 수도 있고. 현실을 보여주든 상상을 보여주든 그 안에 사람의 이야기가 있으니까. 저는 영화로 인해 외롭지 않게 됐거든요. 어렸을 때는 내가 외계인 같다고 생각했어요. 엄청나게 건방진 얘기지만, 생각이란 걸 세상에서 나 혼자만 하는 줄 알았어요. 그건 제가 얘기를 나눌 사람이 없었다는 거죠. 그러다 영화를 보면서 나랑 비슷한 생각을 만나기 시작했죠. 나도 저런 생각 해봤는데, 저런 감정 느껴봤는데. 그런 걸 충족해주니까 위로가 됐어요. 드라마도, 만화도 그런 부분이 있고. 그런 점에서 영화나 예술이 내게 위로가 되는 것 같고, 혼자라고 느끼지 않게 해주는 것 같아요.

정소희 감독 ©퍼플레이

-퍼플레이의 비전은 ‘여성영화로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여성’이 ‘영화’로 먹고 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요즘에 그런 생각을 해요. 연대만이 살길이다. 남자들이 왜 여자들보다 잘 될까 생각해 보면, 서로 밀어주거든요.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서로서로 밀어주고 불러줘야 먹고 살 수 있는 단초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발굴해줘야 해요. 남자 예술가들이 물론 자기가 잘해서 유명한 것도 있겠지만, 그 사람을 발굴해주는 게 누구예요. 평론가고, 큐레이팅하는 기획자들이고, 언론인 거잖아요. 근데 여자들은 그런 경우가 많지 않고, 발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도 많지 않아요. 그런 부분에서 퍼플레이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더 나아가 퍼플레이에 바라는 점, 기대하는 점이 있으실까요?
한국 여성영화의 중심에서 좋은 영화를 발굴해내는 것. 그게 중요해요. 가치를 알아주는 것. 그러려면 퍼플레이가 커야 해요(웃음).

-앞으로 작품활동은 어떻게 이어나갈 계획이신가요?
이주민 관련 문화예술 활동을 하면서 습작처럼 꾸준히 단편을 만들고 있긴 해요. 좀 더 여유를 갖고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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