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퍼플레이가 만난 사람들

투쟁 그리고 꾸준히 살아가는 것

<재춘언니> 이수정 감독

퍼플레이 / 2022-03-24


#세상을_바꾸는_여자들
2022.3.22.|이수정 감독을 만나다

이수정 감독 필모그래피 
2022  <재춘언니> 감독
2021  <시 읽는 시간> 감독, 구성, 기획, 촬영, 제작
2015  <나쁜 나라> 촬영, 공동연출 
2012  <깔깔깔 희망버스> 감독, 구성, 촬영
2009  <감자 심포니> 제작지휘
2002  <우렁 각시> 프로듀서 
2000  <달 세뇨> 제작
1998  <미술관 옆 동물원> 제작실장

4464일. 정리해고를 당한 기타 노동자들이 2007년부터 2019년까지 싸워온 투쟁 기간이다. 콜트·콜텍에서 30년간 기타를 만들어온 기타 기능공 임재춘 씨는 어느 날 갑자기 회사로부터 해고를 통보받는다. 그리고 시작한 복직 투쟁은 13년 후에야 끝을 맺는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그 긴 시간동안 재춘 씨는 변화한다. 팽팽했던 얼굴은 홀쭉해지고, 앳된 얼굴엔 주름이 늘고, 까맸던 머리칼은 허옇게 센다. 변한 것은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소심하고 내성적이라 앞에 나서기 싫어했던 그는 무대 위에 올라 오필리아를 연기하고, 악기를 다루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평생을 공장 노동자로 일해 왔던 재춘 씨에게 그것들은 모두 처음 해보는 일이라 너무나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결국 해낸다. 예술을 모르는 사람이라던 그는 누구보다 예술의 근방에 자리하며 연대의 감각을 깨우쳐 나갔다. 

콜트·콜텍은 한때 세계 점유율 1위를 차지했던 국내 최대 규모의 기타 제조 회사지만, 2007년 경영 위기를 이유로 들며 노동자를 대거 해고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저항하며 투쟁에 나섰다. 그런데 이들의 투쟁은 어딘가 달랐다. 연극과 공연, 문학 등 예술을 기반으로 한 농성은 복합문화예술과 맞닿아 있었다. 예술과 함께한 노동운동이었기에 어쩌면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시간 속에는 이수정 감독도 함께 있었다. 그는 2012년부터 노동자들의 삶과 현장을 기록함으로써 연대했고, 투쟁 승리 후 일상으로 돌아간 재춘 씨 역시 담아냈다. 일용직 노동자가 된 재춘 씨의 뒷모습이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라는 문장이 살아 숨 쉬는 듯했다. 

이수정 감독 ©시네마달

-영화 개봉으로 많은 관객분들과 만나게 되셨습니다.
코로나로 어려운 시기에 좋은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하게 돼 기뻐요. 훌륭한 여건이 마련된 만큼 많은 관객분들이 와서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코로나 확산세로 많은 분들이 오시기 힘들 수 있어 걱정도 됩니다. 

-영화를 만드신 지 올해로 10년이 되셨어요.
제가 연배가 있어 영화를 한 지는 30년이 넘어요(웃음). 장편 연출로 극장 개봉까지 한 것을 정식 데뷔라고 한다면 그 작품이 <깔깔깔 희망버스>(2012)가 되겠네요. 90년대에는 다른 영화의 프로듀서로 참여하거나 방송 다큐를 연출하기도 했고요. 

-영화인생 30년, 소회가 어떠세요. 
30년이 됐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30년 전 20대 중후반이었을 때 영화에 대한 열정이 컸는데 결혼, 출산으로 경력단절을 겪기도 하고 시대 변화 속에서 작품 활동을 지속할 수 없어 다른 방법을 모색했었어요. 극영화도 하고, MBC 베스트극장 극본을 쓰기도 했죠. 여러 기회가 주어져서 이것저것 다양하게 해보긴 했는데 제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못 만들다 보니 갈증이 생겼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뭔가를 계속 하다 보니 20년 만에 다큐멘터리를 다시 하게 됐죠. <깔깔깔 희망버스> 이후로 독립 다큐를 10년째 하고 있는 셈이네요. 이런 저를 보고 다른 분들도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웃음). 


<재춘언니> 스틸컷 ©시네마달

-2012년부터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분들을 찍기 시작하셨어요. 그분들을 카메라에 담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인천에 있던 콜트악기 폐공장 전시회에 갔던 게 직접적인 계기가 됐어요.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철회 투쟁을 하면서 폐공장을 점거해 생활하고 있었거든요. 그런 와중에 미술작가들이 공장 내 빈 공간을 작업실 삼아 그림을 그리고 2012년에는 전시회를 열었어요. 저도 초대된 덕분에 갈 수 있었는데 기계가 모두 빠져나간 공장의 이미지가 크게 다가왔어요. 이걸로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죠. 80년대에 20대를 보낸 세대로서 공장이나 노동자에 대한 일종의 동경이 있었던 것 같아요. 20대 때 영화운동하면서 만난 노동자들에 대한 작업을 해보긴 했지만 제대로 지속하지는 못했는데, 시간이 흘러 20년 만에 노동자들을 다시 만나게 되면서 이전보다 성숙하게 문제를 대할 수 있게 됐어요. IMF 이후 한진중공업이나 쌍용자동차 등 대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수천 명씩 해고되는 일들이 사회적 문제로 발생했잖아요. 그래서 이건 중요한 일이고 주목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희망버스에도 타게 됐고 콜트·콜텍 문제도 촬영하게 됐죠. 

평소에 노동자들은 공장 안에만 있기 때문에 만날 기회가 없잖아요. 근데 그분들이 쫓겨나 공장 밖으로 나오게 되면서 만날 수 있게 된 거예요. 그러면서 노동자들이 예술가들과 함께 공연하고, 미술 전시를 하고, 밥을 먹고, 생활하게 됐죠. 예술과 노동의 만남이 무척 흥미로웠어요. 노동자들이 공장에 다닐 땐 일만 하느라 기타를 배울 기회가 없어 칠 줄 몰랐거든요. 그런데 해고된 후에야 비로소 기타를 치게 됐어요. 뮤지션들을 만나다 보니 문화적인 방식이 투쟁을 알리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리고 2011년에 콜밴(콜트·콜텍 밴드)이라는 밴드를 만들었어요. 그렇게 악기를 배워 밴드를 만들고 거리에서 공연하며 투쟁을 알리는 걸 포인트로 잡아 2012년에 ‘우주최강 콜밴’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기획했죠. 

이수정 감독 ©퍼플레이

-지금과 비교하면 기획이 완전히 바뀌었네요. 왜 방향을 틀게 되셨나요? 
2012년부터 촬영을 시작해 늦어도 2015년에는 영화를 완성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분들이 2014년도에 재판에서 최종 패소하고, 저도 영화를 완성하려면 제작비가 필요했는데 추가제작지원 펀딩에 실패했죠. 작품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어요. 스토리가 부족한가 보다, 기획을 발전시켜야겠다 싶었죠. 투쟁도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아예 길게 찍을 생각도 하게 됐고요. 그렇게 한 해, 두 해 가고 2019년에 투쟁이 마무리되면서 그해에 본격적으로 편집에 박차를 가했어요.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1인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니라 여러 명이 등장하는 기획이었고 심지어 3부작을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1부작을 거의 다 편집했을 무렵 여러 사정으로 영화를 공개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해서 덮을 수밖에 없었어요. 이런 저런 일들로 우울증적 상태에 있다가 2020년 봄에 마음을 다시 추스르고, 편집감독과 2~3달 바짝 작업했죠. 그러면서 재춘을 주인공으로 삼게 됐어요.

그 전 편집본에는 주인공으로 삼았던 분의 30년 노동운동사가 담겨 있어요. 늙은 노동자의 투쟁사인 셈이죠. 많은 내용과 복잡한 사안들을 담았는데 이번엔 그런 것들을 다 걷어내고 싶었어요.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캐릭터를 부각시키고 싶었어요. 임재춘이 솔직한 모습을 많이 보여줬거든요. 맨날 툴툴거리고 고민하면서도 어떻게든 그 자리에 남아있었던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죠. 

<재춘언니> 스틸컷 ©시네마달

-영화 제목이 ‘재춘언니’라서 주인공이 여성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남성분이었어요. 왜 재춘 씨를 ‘언니’라고 칭하셨나요? 
2013년 인천 갈산동에서 천막 농성을 할 때 인천 지역 여성 활동가 몇 분이 재춘을 언니라고 불렀어요. 격의 없이 친하게 지내는 관계여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남성 동지들에게 언니라고 부르는 게 신선하고 듣기 좋고 재밌었어요. 그래서 저도 따라서 재춘 언니라고 몇 번 불러봤죠. 영화 초반부에도 한 번 나오잖아요(웃음). ‘몽실 언니’처럼 ‘언니’라고 하면 어린 동생을 업고 있는 헌신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데 재춘에게도 그런 느낌이 있었어요. 재춘이 충남 공주 출신으로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남들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성이 남아 있는 사람이에요. 천막 농성 당시 주방을 담당하면서 맛있는 밥을 지어 사람들에게 먹이는 역할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더 언니처럼 느껴졌고요. 밥 잘해주는 좋은 언니 같은 느낌이었죠(웃음).

-영화에도 재춘 씨의 따님들이 아빠에게 밥을 해달라고 했다는 내용이 나와요. 
재춘의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밥을 지어 먹었던 것 같아요. 부인하고도 일찍 헤어져서 아이들 어려서부터 밥을 쭉 해 먹여 온 것 같고요. 농성 생활하면서도 대전 집에 가끔씩 갈 때마다 반찬을 몇 개씩 해놓고 왔어요. 

-감독님이 생각하는 재춘 씨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많은 분들 중 재춘 씨를 주인공으로 삼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 분은 말을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정리를 해서 말해주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날것의 매력이 있어요. 극영화에서도 너무 잘나고 정답만 말하는 사람보다는 우물쭈물하고 갈팡질팡하며 고민하는 인물에게 눈길이 가잖아요. 약해 보이는 인물이 끝까지 남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재춘에게서도 그런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자기는 도망갈 타이밍을 놓쳐서 할 수 없이 남아있는 거라고 했지만 어쨌든 끝까지 남아서 투쟁했잖아요. 연극을 하거나 시를 낭독하고 글을 쓰면서 생전 안 했던 일도 해보고요. <오마이뉴스>에 농성일기도 연재했는데 저는 그런 것들이 너무 놀라웠어요. 자발적으로 한 건 아니지만 옆에서 무언가 해보자고 제안했을 때 거부를 안 했거든요. 힘들다며 툴툴거렸지만 그래도 했다는 게 중요한 거예요. 그런 힘겨운 과정들이 이 사람의 투쟁사인 셈인 거죠. 마지막엔 단식까지 했고요.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밥부터 챙겨먹는 사람이라 평소에도 ‘나는 단식은 절대 안 한다’고 했거든요. 그런 변화들이 제가 생각하는 주인공으로서 적합했던 것 같아요. 

<재춘언니> 스틸컷 ©시네마달

-영화를 본 재춘 씨의 소감은 어땠나요.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언제 저런 걸 찍었대?’라고 묻기도 하고. 자기도 미처 몰랐던 장면들이 들어가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라면서 재밌어하더라고요. 본인이 변화하는 모습들이 보이니 감회가 남다를 것 같아요. 다만, 다른 분들이 상대적으로 역할이 적어져서 섭섭해 하지 않을까 싶어요. 영화 제목도 ‘재춘언니’잖아요. 김경봉 씨는 농담 삼아 ‘그거 재춘이 영화잖아?’라고 하더라고요. 임재춘만의 영화가 아니라고 했는데 걱정이 돼요(웃음). 

-영화는 재춘 씨의 이야기를 흑백화면으로 전달해요. 
그전에 많은 인물과 사건, 투쟁 과정이 담긴 버전의 편집본이 있다고 했잖아요. 콜트·콜텍 투쟁사를 충실하게 정리해보고 싶었는데 그것을 접게 되면서 정보를 지우는 방향으로 가고 싶었어요. 전에는 더하는 방식이었다면 이번엔 빼는 방식을 택한 거죠. 그래서 색도 빼는 게 좋겠다 싶었어요. 임재춘이 농성일기에 썼던 글을 기반으로 스토리를 구성하고 기본 뼈대가 되는 플롯을 잡았는데 그러다 보니 그 형식이 찰리 채플린 시대의 무성영화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 영화 속 주인공들도 노동자나 부랑자잖아요. 천막 농성하는 분들과 겹쳐 보였죠. 임재춘의 팔자걸음이 찰리채플린과 비슷한 느낌도 있었고요(웃음). 흑백 무성영화로 방향을 잡으면서 화면 비율도 16:9로 촬영했던 것을 4:3 사이즈로 맞췄어요. 무성영화에서 음악이 감정을 끌고 가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저도 이번 영화에서는 음악을 적극적으로 썼어요.

-재춘 씨가 흙과 풀을 좋아하셔서 투쟁이 끝난 후 농사를 짓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일용직 노동자가 되셨더라고요. 
농사 경험이 있긴 한데 전업 농부로서 생활한 건 아니었어요. 그리고 13년간 돈벌이를 못했다 보니 뭐를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그래서 투쟁이 끝난 후 한동안은 일용직 노동자로 일했고 지금은 아파트 경비직으로 일하고 있어요. 천막 농성을 할 적에도 1~2주 정도 쉴 때 공사장에서 단기 알바를 하기도 했었어요. 한 푼이라도 벌어 딸들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어 했거든요. 

<재춘언니> 스틸컷 ©시네마달

-천막에 붙어 있던 “우리는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최선을 다해 행복해지자”라는 문장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요. 감독님의 마음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요? 
2009년도 콜텍 대전 공장에서의 투쟁 초기 장면이 영화 마지막 부분에 나와요. 제가 촬영한 소스는 아니고 김성균 감독님이 제공해준 아카이브 자료인데요. 그 장면으로 넘어갈 때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게 어떤 순간이냐면, 문화 연대하는 예술가분들이 콜텍 공장에 처음 찾아간 날이에요. 공장 밖에서 사람들이 드럼통에 불을 지펴놓고 서 있는데 거기에 임재춘도 있어요. 2009년도니까 지금과 비교하면 너무 앳되고 젊은 거예요. 그때만 해도 공장 노동자의 포스가 엿보이죠. 서울에서 온 사람들과 노동자들이 구내식당에 모여 밥을 먹거든요. 벽에는 2009년 1월 달력이 붙어있고요. 이인근 지회장이 “우리 올해는 꼭 투쟁에 성공해서 승리합시다!”라고 구호를 외치는데 그러고도 10년을 보내게 되잖아요. 저 때만 해도 단결됐었는데 투쟁이 길어지면서 서로 힘들어지고 내부 갈등이 생기고 우여곡절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장면을 볼 때마다 뭉클해요.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들을 카메라에 담으며 연대함으로써 함께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시간이 감독님에게는 어떤 의미로 남아있나요. 
임재춘이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농성일기가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임재춘, 최문선, 2016, 네잎클로바)라는 책으로 나왔을 때 글귀를 하나 적어서 줬었어요. ‘끝까지 함께합시다’라는 문장이었죠. 제가 좋아하는 재춘의 독특한 글씨체로 쓰인 그 글을 보는데 ‘그래, 끝까지 함께해야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10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늙어간 거죠. 

<재춘언니> 스틸컷 ©시네마달

-감독님이 결국 카메라를 들게 되는, 다큐를 만들게 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아름다움 아닐까 싶어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런 아름다움이 아니라 남들이 선뜻 시선을 두지 않는 것들이요.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처럼. 이분들도 비록 소외됐지만 강인한 생명력으로 공동체를 만들어 결과를 이뤄냈잖아요. 저는 그 시간이 굉장히 아름다웠다고 생각해요. 이들이 해고 노동자로서 피해의식이나 원한 감정에만 사로잡혀 있었으면 이렇게 변화하지 못했을 거예요. 신나게 노래하고 연극을 하거나 시를 쓰기도 하면서 예술을 경험했잖아요. 그런 경험과 기억이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의 신체와 감각이 분명히 변했다고 생각해요. 13년 투쟁을 통해 연대의 감각에 눈을 뜨고 거리의 공동체를 경험했잖아요. 그 자체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그걸 영화에 담아내고 싶었어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구상 중인 작업이 있으신지요. 
2020년부터 기획·촬영하고 작업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 <풀>이라는 제목으로 내년에 완성하는 게 목표입니다. 근대 이후 자본주의 속에서 대마초가 억울하게 악마화되며 금기의 풀이 됐는데, 그 과정을 되짚어보면서 우리 사회가 무언가를 타자화하는 인식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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