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퍼플레이가 만난 사람들

영화를 만들고 싶은 욕구

<이브> 오은영 감독

퍼플레이 / 2019-12-16


이렇게 다양한 여성들이 여기, 지금 우리의 곁에서 영화를 만들고 보여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여성 영화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실제 그들의 일과 삶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지 않나요? 그들의 생각과 목소리를 들려드립니다.
오은영 감독 필모그래피
2019  <우리의 계절> 연출
2015  <이브> 연출, 편집, 내레이션
<이브> 스틸컷

*<이브>의 오은영 감독과 서면으로 진행한 인터뷰를 전해드립니다. 

-인생을 살며 한 번쯤은 ‘난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이런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는데, 감독님께서 ‘영화감독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순간이 언제인지 궁금합니다. 혹은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으셨는지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는 ‘영화감독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결정적인 순간은 없었던 것 같아요. 결정적인 순간보다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욕구를 간직한 채 천천히 살아온 것 같아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처음 생각했던 건, 대학 입시를 준비하며 우연히 보게 된 곽재용 감독님의 영화 <클래식>(2003)을 봤을 때인데, 그 전까지 소설가가 꿈이었다가 아름다운 영상에 마음을 빼앗겨 ‘내 글이 저 영화처럼 아름다운 이미지와 소리가 되면 좋겠다’고 처음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 계기로 대학교를 영화과로 진학하게 됐고, 몇 편의 단편영화를 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 감독님이 처음으로 본 영화는 어떤 것인가요? 그 영화가 감독님에게는 어떤 인상을 남겼는지도 궁금합니다.
첫 번째 질문의 대답에 연장선이 될 대답을 하자면, <클래식>이 처음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영화 같아요. 두 주인공이 빗속에서 달리는 명장면을 볼 때, 아름다운 영상과 감성적인 음악의 조화에 혼을 뺏겼던 것 같아요. 소설만 좋아하던 제가 영화의 힘을 깨닫고 영화를 만들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정도니까 그 당시 제게는 굉장히 대단하게 다가왔었습니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특정한 상황이나 인물이 있으신지요. 혹은 시나리오의 시작이 되는 이야기의 씨앗을 어디서 발견하곤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제 단편 다큐멘터리 <이브>(2015)에도 나오지만, 제 어머니께서 교회에서 사역을 하시는데, 그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제 3자로서 듣다보면 영화적인 이야기로 구성하고 싶어질 때가 많아요. 한 예로, 교회에 정신지체를 앓는 소년이 종종 예배에 나왔는데, 그 소년은 보호소에 들어갈 정도의 정신지체는 아니지만 더 이상 집에서 케어하기에는 신체적으로 성장한 나이어서 동네에 거의 방치되어 있다시피 한 소년이었어요. 집에서도 케어가 안 되니 매를 들었는지 곳곳에 학대의 정황도 보였다고 합니다. 겨울에 추위를 피하고자 평일에도 교회에 들락거리곤 했는데 출퇴근을 하던 목사님은 소년을 내치지 않고 항상 따뜻하게 대해주셨다고 해요. 

어느 날, 소년이 우연히 헌금함을 발견하고 그걸 도둑질하다가 걸리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그 사건으로 교회가 잠시 시끄러워졌고, 교인들의 의견이 수렴되어 결국 그 소년은 교회에 접근금지 됐어요. 그 날 이후로 교회 근처에서 그 소년을 봤다는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깜깜한 밤, 고요하게 눈이 내리고 반짝거리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휘감은 교회 앞을 시린 손을 비비며 쓸쓸하게 걸어갔을 그 소년의 모습이 그려졌어요.

이렇게 침묵뿐인 이야기들, 모두에게 알아달라고 소리치고 싶은 이야기들, 나의 고민이 아닌 모두의 고민으로 나눌 수 있는 이야기들을 들으면 영화로 만들고 싶어져요. 주로 주변인들에게 듣거나 직접 목격하는 경우 등 감성이 자극됐을 때 영화로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가 생기는 것 같아요.


-영화를 촬영하며 겪었던 어려움이나 즐거웠던 순간, 비하인드 스토리,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가장 최근에 작업한 졸업영화에서 소외아동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기획 단계에 지역아동센터에 리서치를 갔다가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중학생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어린 아이들과 뛰어 놀아주는 것이 주 역할이었는데 지금까지 모르고 살아온 것들이 정말 많았다는 점과 앞으로 모르고 살아갈 것들 역시 정말 많을 거라는 것들을 깨달아서 참 슬펐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이 배우고, 반성하고, 성장한 것 같아요. 이 경험 이후로, 영화는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죽기 전에 꼭 만들어보고 싶은 영화, 구현해내고 싶은 여성 캐릭터가 있으신지요. 아울러 감독님의 인생영화, 감독님이 좋아하시는 여성 캐릭터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세 번째 답변의 연장선이 될 것 같은데, 추운 겨울에 갈 곳을 잃은 그 소년의 이야기를 영화로 꼭 만들어보고 싶어요. 교회로부터 접근금지를 당해 갈 곳을 잃기 전, 이미 갈 곳이 없던 사람이잖아요. 그렇다면 누구를 탓해야 하는지, 신마저 그를 저버린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신을 원망해야하는 것인지, 그것은 실체가 있는 것인지. 이런 이야기 속에는 뚜렷한 흑과 백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런 이야기일수록 공정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캐릭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캐릭터가 여성이었으면 좋겠어요. 
제 인생영화는 션 베이커 감독의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입니다. 비교적 최근작인데, 제가 추구하는 영화의 모든 조건을 가지고 있는 영화입니다. 누군가의 소소한 일상이 사회가 함께 나눠야 하는 이야기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영화로서, 영화인이 가져야 하는 태도를 가르쳐주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무니(브루클린 프린스)는 주변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알고, 자신만의 에너지로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면서도 자신의 욕구를 늘 당당하게 표현하는 캐릭터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여성 캐릭터입니다.


-시나리오를 쓰거나 영화를 찍다 보면 유독 마음이 쓰이는 장면이 있을 것 같습니다. 감독님이 촬영하신 영화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신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 이유도 궁금합니다.
졸업작품으로 가정에서 방치되는 소외아동과 그를 방문하는 가정방문봉사자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토대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 영화의 클라이막스가 마지막 가정 방문 날, 평소 아이가 꿈에 그리던 놀이공원에 가는 씬인데, 그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드는 씬입니다. 특정하게 씬을 구성해놓지 않고 그저 두 배우를 재밌게 놀게 하고 쫓아다니며 카메라에 담았는데 이런 사실적인 느낌이 영화 주제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었던 것 같아요. 한여름이어서 더위로 고생을 하긴 했지만, 그만큼 날이 밝아 이미지도 멋지게 담겼고요. 물론 백점은 아니지만 내용 전달과 이미지 구현이 동시에 만족스럽게 나온 씬인 것 같아요.


-한국 영화계 또는 관객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으실지요. 혹은 ‘이런 방향으로 변화해가길 바란다’고 생각하시는 지점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다양한 영화를 사랑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개인적인 생각으로, 한국 관객들은 엔터테인먼트의 색깔이 짙은 영화를 많이 사랑해주시는 것 같아요. 비슷한 캐릭터를 같은 배우가 연기하고, 플롯과 주제의식은 거의 전래동화 같은 영화지만 그것이 결국 익숙하고 재미있기 때문에 다시 사랑을 받는 것 같아요. 새로운 소재, 소수의 캐릭터, 스크린에서 쉽게 다루지 못했지만 스크린 밖에 실존하는 이야기들도 다양성을 존중하는 자세로 봐주셨으면 좋겠고, 당연히 상영관도 많았으면 좋겠어요.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자질이 필요한가요? 미래의 여성 영화인들을 위해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제가 감히 자질을 이야기하기는 부끄럽고, 그저 평소 제가 추구하는 바를 이야기하자면,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간절함’이 필요한 것 같아요. 어떤 이야기를 꼭 하고 싶다는 간절함, 이야기가 영화가 되었을 때 관객에게 그리고 본인에게 아주 작게나마 울림을 주길 바란다는 간절함. 그것 없인 영화를 만들 수 없고, 만드는 의미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간절함은 곧 진정성으로 이어지고, 진정성 있는 영화는 그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영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감독님에게 영화란 어떤 의미인가요. ‘나에게 영화란?’이라는 질문에 답을 해주신다면요.
저에게 영화란 저를 성장시키는 과정입니다. 영화를 만들다 보면, 제가 어떤 사람인지 직면하게 돼요. 무엇이 날 간절하게 하는지, 무엇이 날 도망치고 싶게 하는지, 하나씩 계속 깨닫는 것들이 생겨요. 그래서 영화를 다 찍은 후에 저를 되돌아보면 찍기 전과는 아주 작은 부분일지라도 성장했다고 느껴요. 그래서 제 영화 포트폴리오들이 그 시절, 당시의 저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한 작품, 한 작품 영화 작업이 더 신중해지는 것 같아요.


-퍼플레이에 바라는 점, 기대하는 점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응원의 한 마디도 함께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여성영화를 쉽게 접하게 해주시고, 좋은 여성 영화인들을 위해 늘 힘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퍼플레이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큰 힘이 되고, 가치 있다는 것 기억해주시고 항상 힘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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