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임선우입니다. 배우이고요. 지금까지 주로 독립영화들을 찍었어요. 

요즘 코로나 때문에 많이 멈췄잖아요. 저도 멈춰 살았던 것 같아요. 집에서 주로 일상을 보냈어요. 그 전에는 일하느라 밖에 많이 있기도 했고, 일이 없어도 영화를 보든 뭘 하든 늘 밖에 나가려고 했는데 이번에 집에 있게 되면서 그동안 잊고 있던 일들을 했던 것 같아요. 책도 읽고 설거지도 열심히 하고, 유튜브 보면서 스트레칭도 하고(웃음). 꼭 외부에 의존하지 않아도 혼자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걸 깨달았어요.

네, 쉽지 않았어요. 신체적, 정신적인 번아웃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동안 작품을 열심히 했는데 앞으로 어떤 길을 가고, 어떤 방향으로 연기를 하고, 또 어떤 작품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됐어요. (결론은 내리셨나요?) 아니요. 딱히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어요. 인생이란 게 내 마음대로 흘러갈 수 없는 것이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또 새로운 막이 열리기도 하고, 새로운 방향에 들어서있기도 하잖아요. 모든 변화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을 가졌던 것 같아요.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연기하면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게 된 해였어요.

연기를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학교에 들어간 건 아니었어요. 처음엔 영화보다는 연극에 더 관심이 많았죠. 저는 갑자기 삶을 바꾸는 게 싫었어요. 제가 생각해도 너무 무모한 선택 같았고, 꼭 배우가 되지 않더라도 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공연을 올리면서 살아도 되고요. 지금 생각하면 나이브한 부분도 있지만 그 당시의 제 상황에서 최대한 연기에 가까운 삶을 살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게 나 자신에게 용납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죠. 그래서 결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일을 그만두고 몇 년이 됐든 나에게 시간을 줘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죠.

<더 테이블>이 2016년에 촬영하고 2017년에 개봉한 영화잖아요. 제가 사실상 2016년부터 영화를 찍기 시작했는데, 그 해가 저의 ‘시작’ 시기였던 것 같아요. 한예종 영상원에서 처음 찍은 영화가 <내일의 약속>이었어요. 그 작품이 하나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그 작품 이후에 다른 작품들이 들어오게 됐죠.

퇴사할 당시에 고민을 너무 많이 해서 살이 많이 빠질 정도였어요. 그런 말 있잖아요. 들어가는 것보다 나오는 게 더 힘들다고. 되게 힘들 때 회사에 들어갔었는데, 나올 땐 10배는 더 어렵더라고요. 그런데 나에게 시간을 꼭 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넘어가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더라고요. 당시에는 제가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렇게 늦은 나이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가 나의 때였다고 생각해요. 길을 전환하기 전에 고민의 기간이 길었던 만큼 결정하고 나서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어요.

<코>는 전체적으로 하나의 흐름과 호흡을 갖고 찍었던 것 같아요. 한나가 현수를 좋아하는데, 그 남자가 집까지 쫓아오잖아요. 근데 한나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집에 휙 들어가죠. 하지만 한나는 상대의 무례한 행동을 크게 저지하지 못해요. 어떻게 보면 폭력의 전조로 볼 수 있는 상황인데, 한나는 그냥 넘기고 현수와 사귀죠. 근데 이게 제3자의 입장에서 볼 땐 “쟤 좀 이상한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막상 당사자가 되면 제대로 못 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연애 초기고, 한나가 상대를 더 좋아하는 상황이었잖아요. 그래서 그런 장면들을 찍을 때 감독님하고 얘기를 많이 나눴어요. 한나가 현수와 헤어지고 나서야 그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는데, 그런 시각의 차이를 생각하면서 찍었죠.

특정 신이라기보다도 자기가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상황에 깊이 공감했어요.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힘들 거고, 자기가 잘못한 게 아님에도 맞았다는 사실에 수치를 느낄 수 있잖아요. 그런 감정들이 내면에 있지만 누구한테 말할 수 없는 상황들에 공감이 됐죠.

저도 그걸 물어봤었어요. 근데 그건 아니더라고요. 영화 속 한나의 이야기가 단순히 한나의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나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것, 결국은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지으신 게 아닐까 싶어요.

어떻게 보면 한나가 처음으로 “예스”라고 말한 건데 사람들은 못 듣죠. 아니면 누군가 들었더라도 깊이 생각하지 못할 만큼 시끄러운 가운데 한나가 대답하잖아요. 특정한 의미를 갖고  그 장면을 만들진 않았지만, 충분히 가능한 해석인 것 같아요.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이었고, 연출의 가장 섬세한 것들이 보이는 장면이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둘이 적이 될 수 있는 사이잖아요. 엄마는 아들을 보호해야 하는 입장이고, 한나는 그 아들과 가까운 관계에 있지만 결국은 폭력을 당한 사람이고. 그렇지만 또 둘이 연대할 수 있는 관계이기도 한 것 같아요. 여성의 연대에 관한 이야기를 중점으로 다룬 건 아니지만, 가장 예민하고 민감한 관계에 있는 둘도 연대의 고리를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죠. 물론 현수의 엄마는 한나가 자신의 아들을 신고했다는 걸 모르죠.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화가 나겠지만, 민옥이 한나를 이해를 할 수도 있는 거예요. 한나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잖아요.

여성과 여성의 관계를 그리기도 했지만, 여전히 껄끄러운 부분도 공존하잖아요. 둘 사이에 여러 레이어가 겹쳐있다는 게 좋았어요. 사람 사이의 관계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니까요. 좋지만 동시에 밉기도 하고, 애틋하지만 얄미운 것도 있고.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층이 있는데 그런 것들이 민옥과의 관계에서도 잘 보였으면 좋겠어요.

살면서 중년 여성, 엄마뻘의 여성을 이름으로 부를 일이 그렇게 많지가 않죠. 사회 활동을 하는 경우가 아닌 이상 자기 이름으로 불릴 일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근데 저는 나중에 중년이 됐을 때도 누군가 나를 부를 때 ‘몇 호 분’이라든지 ‘누구 엄마’ 혹은 아줌마보다는 제 이름으로 불렀으면 좋겠어요. 중년 여성들에게도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건 중요한 것 같아요. 중년 여성들 중에 사회적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계신 분들 많거든요. 근데 그분들의 이야기를 우리가 아직 잘 모르잖아요. 굉장히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이 이야기로 만들어진 역사가 짧기 때문이죠. 중년, 노년의 여성들이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그들의 삶에 서사를 부여받는 거라고 생각해요. 

일정 나이 이후에는 여성 배우들에게 들어오는 역할이 굉장히 제한적이고, 대개 엄마로서의 정체성이 부여되는 역할들이 들어오는데, 엄마 역할 자체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 엄마 역할이 다 똑같다면 심각한 문제죠. 여성이건 남성이건 사람은 결국 자기 안에 욕망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근데 그 욕망이 독립적인 욕망으로서의 서사를 갖지 못하고 아이에게 부속됐을 때만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거잖아요. 근데 지금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그것이 일시적인 것에 그치지 않으려면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아요. 

마지막 장면은, 한나가 홀가분해진 상태라고 생각했어요. 그동안 혼자서 끙끙 앓고 있던 걸 밖으로 내보낸 후의 모습이잖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싸움이 끝난 건 아니죠. 이제 시작이긴 하지만, 나 자신에게 솔직하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결국 이길 수 없는 것 같아요. 부당한 일들에 혼자 끙끙 앓고만 있지는 않게 된 거잖아요. 앞으로 힘든 일이 많겠지만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 결심했다는 점에서 응원하고 싶어요.

영화를 찍은 곳이 충주인데, 감독님의 고향이에요. 영화에 등장하는 집도 실제 감독님 부모님의 댁이에요. 감독님의 이야기가 많이 들어간 영화이기도 하고, 감독님의 삶의 흔적이 남아있는 공간들도 곳곳에 담겨 있어요. 그래서 그런 것들이 굉장히 특별했죠. 모든 촬영 현장이 평화롭고 아름다웠어요. 같이 호흡을 맞췄던 배우들도 너무 좋았고, 여자 셋이서 재밌게 찍었죠. 

정오와 엄마의 관계가 현실적으로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영화를 보고 많은 분들이 공감을 하면서 봤다는 얘기를 해주셨을 때 한편으론 신기했어요. 정오와 용녀의 관계는 감독님이 경험한 것인데 그게 다른 관객 분들에게 공감을 줬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 궁금한 거예요. ‘모녀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사는 건가?’ 싶었어요(웃음). 모녀 관계라는 게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또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는 관계잖아요.

용녀는 굉장히 매력 있는 엄마예요. 그리고 개성 있죠. 용녀는 자식과 분리된 자기 세계가 있는 엄마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게 굉장히 좋았고, 그것 때문에 용녀가 전형적이지 않게 보였던 것 같아요. 용녀는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도 있고 또 차를 끌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게 용녀가 가진 멋이었던 것 같아요. (정오가 엄마를 용녀라고 이름으로 부르는 게 낯설면서도 쿨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도 둘의 관계가 되게 쿨하다고 생각했어요. 부모 자식 간에 쿨하다는 게 뭘까 궁금했는데 이번에 찍으면서 알게 됐죠. 기본적으로 모녀 관계이기 때문에 서로 얽혀있긴 하지만 때로는 분리돼서 각자의 세계를 즐길 수 있는 삶이 있는 게 ‘쿨함’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알려드리자면, 감독님 어머니의 성함이 실제로 용녀예요.

정오와 엄마의 관계와 해수와 엄마의 관계가 서로 다른데, 미묘하게 다른 점이 보였으면 했어요.

춤추는 장면은, 셋이서 비슷한 리듬으로 같이 췄으면 좋겠다는 디렉션을 감독님께서 주셨었어요. 근데 제가 가장 웃기게 췄던 것 같아요(웃음). 해수와 용녀가 춤추다가 정오에게 방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하잖아요. 그 전에 방 안에서 정오가 뾰로통하게 보고 있는 컷이 원래 있었어요. 근데 나올 때는 웃으면서 춤추며 나오죠. (츤데레적인 면모가 보이는 컷이 있었군요.) 음악에 맞춰 같이 춤추고 노는 존재라는 점에서 정오가 엄마랑 닮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무뚝뚝하고 멋없는 성격 같아 보이지만 춤 출 때는 모든 걸 내려놓고 출 수 있는 인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예전에 그런 생각을 한 적 있어요. 다른 나라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착한 년’이 될 것인지 ‘나쁜 년’이 될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이 보일 때가 있는 것 같아요. 보통 부모 말 안 듣고, 사회가 정해놓은 시간표대로가 아니라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을 살거나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싫은 걸 싫다고 말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여자들을 (대놓고는 아니지만) 나쁜 년이라고 말하죠. 이 사회에서 성장한 여자들만 느낄 수 있는 선들이 있거든요.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가면 안 될 것 같다고 느끼는 미묘한 선이 있어요. 선 하나만 넘으면 되바라진 느낌이고, 그걸 아슬아슬하게 지키면서도 주장을 펼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고. 혹은 ‘에라 모르겠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라는 경우도 있고. 다른 딸들은 어떤지 잘 모르지만 저는 제 마음에 솔직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아요.

맞아요. 좋은 것 같아요. 국내 영화에서 여자가 여자의 이름을 부르는 게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봤는데,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인물의 이름이 기억나는 건 정말 좋은 것 같아요. 서사가 없으면 이름도 없잖아요.

신념이 있는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어요. 신념을 지키면서도 그 사이에 여러 갈등이 생기는 인물들, 신념이 강한 여성들을 볼 때 매력을 느껴요. 자신만의 언어 또는 삶의 방향을 갖고 있는 거잖아요.

다양한 것들을 해보고 싶어요. 같은 것만 하면 재미없잖아요. 저는 영화 찍을 때 감독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배우들이 갖고 있는 결이 다른데, 그것들을 잘 알고 아껴주거나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모습을 끌어내주고 싶어 하는 분들과 함께 하고 싶죠. 영화를 하나 하기 위해서는 인물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본인이 참고한 책이나 영화, 경험들을 공유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알게 되잖아요. 저는 그게 저의 세계를 더 풍요롭게 해주는 것 같아요.

퍼플레이 가입도 하고 영화를 찾아봤는데 정말 많아서 어떤 걸 추천해야 할지 망설여져요. <나만 없는 집>(김현정, 2017)도 굉장히 잘 봤어요. 영화제에서 표를 구하기가 힘들어서 못 봤었는데 퍼플레이에 올라와서 찾아봤죠. 그리고 애니메이션도 많더라고요. <겨털소녀 김붕어>(정다히·권영서, 2017)도 너무 재밌을 것 같아요.

저는 계획이 없어요. 하루하루 사는 것, 마음을 열고 저에게 오는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제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