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M IN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정가영, 끝나지 않을 이야기를 향하여

손시내|영화평론가 / 2020-03-26


< ZOOM IN >에서는 여성 영화, 감독, 배우, 캐릭터 등을 퍼줌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도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하트> 스틸컷

대개 여자와 남자, 두 사람이 등장한다. 일단, 둘은 현재 사귀는 사이가 아니다. 그렇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히 뭔가가 있다. 그건 대화가 지속되면서 생겨나는 성적 긴장, 어디로 향할지 도통 알 수 없는 미묘한 기류, 애타는 마음과 황당함, 짜증과 정다움 같은 것들이다. 이 관계의 한 축에는 ‘가영’이 있고, 다른 한 축에는 남자들이 있다. 그 남자들은 가영과 과거 한때 사귀었거나 잤던 사람들일 수도, 가영이 너무나도 두드리고 열고 싶은 문 너머 미지의 존재들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비치온더비치>(2016)와 <밤치기>(2017) 그리고 <하트>(2019)까지 세 편의 장편 영화와 여러 편의 단편 영화 작업을 한 정가영 감독의 영화들 말이다.

정가영의 영화는 사랑과 욕망의 영화다. 대체로 정가영 감독이 직접 연기해왔던 ‘가영’들은 영화 속에서 거침없이 고백하고 구애하며 욕망을 표현하는데, 그러다가 마음속에 샘솟는 사랑에 깜짝 놀라 주저앉아버리기도 하는 어쨌거나 정이 가는 캐릭터다. 상대방에게 자꾸 마음이 가는 가영은 연애가 하고 싶고 키스도 하고 싶고 섹스도 하고 싶다. 그런데 상대방에겐 애인이 있거나 아내가 있다. 가끔은 가영이 영화를 함께 찍고 싶은 남자 배우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들에게 가영은 말과 이야기를 무기로 돌진한다. 같이 자자, 키스하자, 영화를 찍자면서. 질문을 퍼부어 상대를 방심하게 하고 회심의 일격도 날린다. 물론 그게 언제나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쉽게 단념하지 않는 가영의 시도가 영화를 끝까지 끌고 간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트> 스틸컷

비슷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정가영의 영화들에는 솔직하게 욕망을 표현하는 여성들에게 으레 붙여질 법한 표현들이 늘 따라다녔던 것 같다. 호의적인 표현들이었겠지만, 그 표현들 자체가 다소 뻔하게 느껴지는 구석도 있다는 건 언급해야겠다. 이를테면 발칙하고 당돌하다는 표현 같은 것들. 그런데 정가영의 영화들이 여성의 욕망을 표현하기를 넘어서 종종 그 표현하는 방식 자체에 주목하게 하고 이야기의 틀을 바라보게 할 때도 있기 때문에, 그보다는 풍부한 감상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다. 정가영의 영화를 쭉 보아오며 매력을 느꼈던 이들이라면 <하트>를 일종의 분기점으로 느낄 만하다. 감독 또한 이를 기점으로 1막이 끝난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으니, 이참에 정가영의 영화들을 들여다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아 보는 건 어떨까.

일단 ‘말’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정가영의 영화엔 유독 말이 많고, 영화 속 가영은 우선 말하고 보는 사람이다. “우리 자면 안 돼? 자자”, “정확히 1분 후에 키스할 거예요”, “오빠랑 자는 건 불가능하겠죠?” 남자가 표현할 때까지 기다린다거나, 먼저 욕망을 내비치더라도 노골적인 말은 피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남녀 연애 관계에서 여성에게 줄곧 주어져 왔던 젠더 역할은 가영에겐 별 게 아니다. 지금 하고 싶다는 욕망에 충실한 말들은 의도와 상관없이 연애와 성을 둘러싼 통념과 규범들을 건드리며 쾌감과 재미를 준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도발적인 시도 언저리 어디쯤에서 끝나는 건 아니어서, 상대방을 정색하게 만들거나 불쾌하게 하고 말아버리기도 한다. 말하자면 가영은 적당히 유혹하는 게 아니라 끝까지 간다. 말의 힘을 믿고 그 힘으로 끝까지 가며 긴장을 버티고 감당하는 사람, 그게 가영이다. 

<내가 어때섷ㅎㅎ> 스틸컷

<밤치기> 스틸컷

가영은 말을 잘하는 사람인데, 그건 말을 유창하고 유려하게 하는 사람이라기보다도 말을 잘 들여다보는 사람이라는 뜻에 가까운 것 같다. 단편 <내가 어때섷ㅎㅎ>(2015)에서 가영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술을 마시고 있는 남자(백수장)에게 대뜸 연애한 지 얼마나 됐냐고 묻는다. 4년이라는 남자의 대답에 가영은 다시 질문한다. “4년이 안 된 거예요, 4년이 넘은 거예요?” 그냥 말장난처럼 들리긴 하지만, 새삼 말이라는 것이 참 미묘하다는 점만큼은 생각하게 된다. 세상엔 굳이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겨지는 말들, 척하면 척인 말들이 있는데, 가영은 말의 맥락과 표면을 오가며 그런 말들의 미묘한 부분을 한 번씩 건드려본다. 소문과 농담, 진심과 거짓말, 허구와 진실을 단숨에 건너가며 상대의 마음을 떠보기도 한다. 이렇게 말의 놀이를 지속하면, 철벽을 친 채 완강하게 버티던 남자들도 한 번쯤은 허우적거리게 만들 수 있다는 듯이.

<밤치기>의 가영은 아는 오빠인 진혁(박종환)을 불러내 술을 마시며 시나리오 자료 조사를 핑계로 연애하고 섹스하는 이야기와 질문을 퍼부어댄다. 수첩과 펜을 손에 들고 뭔가를 끄적이고는 있지만, 슬며시 번지는 웃음에 질문의 내용을 보아하니 시나리오는 정말로 다 핑계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술집에서 룸 카페로 자리를 옮겨 계속되는 질문들엔 가영이 하는 말의 놀이가 섞여 있다. 하루에 자위를 4번까지 해본 적이 있냐, 주로 누구를 떠올리면서 하냐, 키스는 잘하냐,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싶은 질문이 계속되지만 표면적으로 이건 어디까지나 시나리오 준비를 위한 것. 그러니까 가영은 무엇이든 다 물어볼 수 있다는 식이다. 이렇게 미묘한 상태이기에 진심을 섞어 볼 수도 있다. 그러다가 더 가기 어렵겠다 싶을 땐 “에이, 설마 진짜겠어요?”라며 상대가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비치온더비치> 스틸컷

가영이 전 남자친구 정훈(김최용준)을 찾아가 너랑 자고 싶다고 말하는 <비치온더비치>에서도 대화는 끊이지 않는다. 지금은 다른 사람과 연애하고 있는 정훈은 무작정 들이대는 가영이 못마땅하지만, 옛날이야기나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이어가는 둘은 예전 언젠가 그랬을 것처럼 다시 다정해 보인다. 어느 챕터의 제목처럼 ‘그랬대 글쎄’ 하는 이 이야기들이 미묘한 건, 남들 이야기가 실은 그들의 마음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랑하고 연애하는 이야기,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과 후회하고 미안해하는 마음 같은 것들이 둘의 한가한 대화와 말다툼 사이 머뭇거리는 찰나에도 스민다. 그러고 보면 정가영의 영화에서 ‘가영’은 한 편의 영화 안에서도 여럿이었고 여러 편의 영화들 사이에서도 여럿이었던 것 같다. 이야기 속의 가영과 이야기 바깥의 가영 그리고 또 그 바깥의 가영… 가장 밖에는 물론 영화를 만드는 감독 정가영이 있지만, 영화 안에서도 가영은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등장하곤 한다. 

다시 <밤치기>의 가영을 보자. 시나리오는 아직 쓰지도 않았지만, 진혁을 쿡쿡 찔러보는 마음만큼 영화를 대하는 가영의 마음도 꽤 진지해 보인다. 사실 <밤치기>는 가영의 실패담이다. 애인이 있다는 진혁은 가영의 시도와 공격을 적절하게 받아칠 뿐만 아니라, 그러면 안 된다는 조언도 자못 심각하게 던지는 의외의 상대다. 그래도 가영은 끝까지 가봐야 안다는 태도를 고수하지만, 진혁은 가영이 바라는 결말을 함께 해주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의 후반부, 그 실패의 예감과 마지막 희망을 부여잡고 걷는 쓸쓸한 밤거리에는 또 다른 ‘결말’ 이야기가 겹쳐진다. 언젠가 가영이 만들게 될 영화, ‘최고의 결말’이라는 제목을 가진 영화 이야기다. 결말이 없는 영화, 그래서 현재진행형인 영화,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그 영화 이야기는 그 자체로 가영을 설명해주는 근사한 비유다. 가영은 말하는 사람,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인성을 좋아하세요> 스틸컷

그런 가영의 가장 귀엽고 재미있는 성공담은 단편 <조인성을 좋아하세요>(2017)에 흥미진진하게 담긴다. 다음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며 친구와 전화로 수다를 떠는 가영은 영화감독이다. 그런데 이 사람, 다음 영화엔 배우 조인성을 캐스팅하고 싶다. 대략적인 얼개조차 나오지 않은 상상 속 영화의 유일한 설정은 배우 조인성이 실제 본인 역할로 등장한다는 것. 아직 쓰이지 않은 이야기를 가지고 가영은 문을 두드리고 벽을 넘는다. 옴니버스 영화 <너와 극장에서>(2017)에 수록된 단편 <극장에서 한 생각.>은 영화감독 가영(‘가영’들 중 유일하게 이태경 배우가 연기했다)이 영화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에서 겪는 일을 담는다. 가영이 영화에 가져다 쓴 이야기를 두고 어디까지가 실화냐며, 모델이 된 사람에게 미안하지도 않냐며 한바탕 언쟁이 오간다. 그러다가 우리는 영화(우리가 보지 못한 영화)의 바깥(실은 상상이었던 관객과의 대화)의 바깥에 있는 가영(이때는 정가영 감독이 직접 연기했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가영들을 지나 어느덧 <하트>의 가영에 이르렀다. 이 영화는 그간 정가영의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던 지점들이 변주되고 확장되는 순간들을 보여준다. 일단 두 사람의 상황부터 다르다. 가영은 미술학원 강사인 성범(이석형)을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는데, 다른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다. 가영이 정말로 사랑하게 되어버린 어느 유부남 영화 기자 이야기. 그런데 성범도 가영과 그저 친구 사이기만 한 건 아니다. 가영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성범은 그냥 유부남도 아니고 “나랑 잤던 유부남”이다. 가영은 눈에 띄게 의기소침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태다. 여기서 가영은 이야기를 힘 있게 뻗어가게 하기 보다는 그 이야기를 보호하는 쪽에 가까운데,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성범도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불륜은 항상 뻔한 거 같애”. 

<하트> 스틸컷

한편 가영과 성범 사이에도 여전히 감정들이 남아있다. 그럼 이들 사이도 뻔해져 가고 마는 걸까? 영화는 가영의 말에만 의지하지 않고 여러 겹과 층을 만들어 이 이야기와 감정들을 ‘전형적이지 않게’ 보여주고자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섞인 시간 구성, 공간의 다양한 활용, 공포 영화의 문법을 들여오는 등 장르의 혼용까지. 이러한 구성은 리듬과 재미를 만들 뿐만 아니라 그간 여러 영화를 거치며 달려온 가영을 한숨 돌릴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가영과 성범의 이야기가 지나가고 난 뒤, 이번엔 영화감독 가영이 새 영화 캐스팅을 위해 배우 제섭(최태환)을 만나는 2부가 이어진다. (둘의 대화로 미루어 보아 그 영화의 시나리오는 우리가 본 1부의 내용과 아주 흡사한 것 같다) 제섭은 지금껏 가영이 만났던 그 모든 사람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가영의 적수다. 이게 자전적인 이야기인지 묻고는 영화 만들지 말라는 말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이 남자는 가영이 영화와 말로 도저히 공략할 수 없는 상대다. 그런데 가영은 더 강한 승부수를 던지는 게 아니라 이렇게 중얼거린다. 이것이, 영화를 만드는 것이 내가 성장하는 방식이라고. 이 성장이란 단순히 온전한 이야기 하나를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이야기의 복잡 미묘하며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에 뛰어들어보는 걸 이르는 것 같다. 타고난 말재주로 이기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한 방 먹어보기도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가영은 아직도 결말에 도달하지 않았다. 거기에 이르는 과정 자체가 그에겐 소중해 보인다. 그러니 끝나지 않을 이야기를 궁금해 하는 마음으로, 정가영의 세계는 계속 이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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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영화웹진 리버스 필진,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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