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풍경과 움직임의 SF

< SFdrome: 주세죽 >

황미요조|영화평론가 / 2020-03-05


< SFdrome: 주세죽 >   ▶ GO 퍼플레이
김소영|2018|실험|한국|26분

< SFdrome: 주세죽 > 스틸컷

< SFdrome: 주세죽 >(김소영, 2017)은 산 아래 초원의 집 한 채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지만, 우리가 보는 장면은 매 순간 변하고 있다. 멀리 새가 날아오고 날아가기도 하며 날씨와 계절이 변화하듯 빛과 색이 바뀌기도 한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의 뒤로 들리는 바람소리도 잦아졌다 거세지기를 반복하고 희미하게 새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감독의 목소리로 들리는 내레이션은 주세죽의 딸 박비비안나를 양육했던 육아원 교사의 기록이다.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혁명가였던 주세죽은 일제의 검거를 피하며 독립운동을 지속하고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성숙을 위해 조선, 상해, 모스크바를 오가며 활동하다 스탈린에 의해 스파이 혐의를 받고 카자흐스탄으로 유배된다. 카자흐스탄에서의 유형 생활 도중 딸을 찾아갔지만, 딸과의 관계는 서먹하다. 같은 혁명가였던 남편과는 곡절 끝에 헤어져서 소식도 주고받지 못 하는 상태이다. 혁명가로서의 과거도 스파이 혐의를 받는 유형자로서의 현재의 삶도 털어놓거나 이해받지 못한 채 주세죽은 딸을 만나러 오는 길, 기차에서 운명을 달리한다. 

< SFdrome: 주세죽 > 스틸컷

영화는 이 외로웠던 생애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한 글을 읽는 목소리와 높은 산 밑 외떨어진 초원의 집 한 채, 우뚝 선 여신과 같은 동상 그리고 주세죽의 얼굴 이미지를 겹쳐 놓는다. 이어 일몰 무렵의 공장이 드문드문 보이는 넓은 평야를 카메라는 위에서 천천히 이동하며 보여준다. 그리고 그 위를 낮게 날고 있는 목각인형의 몸과 얼굴이 겹쳐 보여진다. 목각 인형의 움직임은 유려하지는 않다. 팔과 등, 다리를 부단히 움직이며 땅에서 높이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나아갈 뿐이다. ‘나타나거나 또는 나타나서 보임, Emergence, 出現’이라는 문구가 등장한 후 영화의 타이틀이 뜬다. < SFdrome: 주세죽 >.

외롭고 고단하지만 세상에 출현해서 매끄럽지는 않아도 끊임없이 움직여 앞으로 나간다. 멈춰 있는 듯 보이지만 계속 변화하는 풍경처럼. 집은 보통 정착을 뜻하지만 주세죽에게는 잠시 정주하는 거처일 뿐, 끊임없는 움직임 속에 그의 삶이 있다.  

이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얼어붙은 어두운 땅이다. 주세죽은 소련 당국에 여러 번 공민권 신청을 하지만 모조리 거절당하고, 조선이 해방된 후 조선으로 귀환시켜 달라는 요청 역시 기각당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망명한 주세죽은 민족 여권도 없이 외국인에게 발급되는 거주증명서로만 신분과 삶의 임시성을 온 몸으로 체험하며 살았다. 그러나 곧 카메라는 눈 내린 땅들을 높은 위치에서 천천히 훑으며 움직인다. 얼어붙은 땅인 건 매한가지지만 해방감이 느껴진다. 

< SFdrome: 주세죽 > 스틸컷

곧 화면이 위아래로 분할되고, 두 화면에서 풍경이 옆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기차가 달리는 소리가 들린다. 황폐한 풍경이지만 밖을 바라보고 여행하는 마음의 설렘이 느껴진다. 화면은 계속 움직이고 무언가 우주기지 같은 것에 시선이 머무는 순간 흐릿하게 흐르던 풍경이 또렷해진다. 그리고 초기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플로라 트리스탄의 이름이 뜬다. 페미니스트 계몽운동과 교육운동에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임했던 플로라 트리스탄의 수기가 인터 타이틀로 소개된다. 꽝, 하는 폭발음. 고요하지만 물이 계속 흐르는 강가의 풍경. 그리고 다시 목각인형이 나타나서 허공을 난다.

빛을 부러 드러내지 않고, 속세로 나가 티끌과 동화한다는 설명과 함께 화광동진, 和光同塵, Toward the world 라는 새로운 챕터의 타이틀이 뜬다. 주세죽의 임시적인 신분과 함께한 삶의 여정은, 트리스탄 플로라의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노동자 운동과 그 과정에서 여성의 발견은 화광동진의 세상 나서기 방식이다. 그리고 곧 영화는 소련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스탈린에게 숙청당해 유배해 온 곳도 카자흐스탄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모래바람이 날리는 사막 같은 카자흐스탄의 풍경 속에서 주세죽, 플로라 트리스탄, 트로츠키가 시공간을 가로질러 만난다.  

< SFdrome: 주세죽 > 스틸컷

그리고 영화는 주세죽의 단발과 동우회 창단을 비롯한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로서의 활동과 당시 신여성들의 활동을 빠르게 보여준다. 여기에 1936년 식민지 조선의 영화 <미몽>을 삽입한다. <미몽>은 여주인공 애순을 남편과 아이도 저버린 방탕하고 무책임한 여자, 소비적이고 쾌락적인 생활에 마음을 빼앗긴 여자로 그리지만 < SFdrome: 주세죽 >은 애순이 바라보던 쇼윈도우, 달리는 택시 안에서 바라본 거리 풍경과 달리는 기차를 보여줌으로써 당시 변화 중이던 세계에서 길을 나서는 신여성들의 눈으로 <미몽>을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이 영화 제목의 ‘SF’의 첫 번째 뜻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Socialist Feminist)이며 두 번째 뜻은 Science Fiction, 즉 한국어로 종종 공상과학(픽션)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사람들의 선한 의지를 믿고 운동가의 헌신과 열정을 믿는 플로라 트리스탄의 페미니스트 사회주의는 (이후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사회주의’와 구별되어) ‘공상적’ 사회주의로 불리어왔다. 세 사회주의자는 각각의 꿈, 즉 공상을 실현하고자 화광동진의 마음으로 세계의 이곳저곳을 유랑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꿈은 아직도 ‘공상’이다. 우연히도 현재 그들의 유배지에는 우주기지가 건설되어 있다. 그들의 당대에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었지만, 우주기지와 같은 과학 기술들 혹은 가까운 미래의 무언가들은 그들의 꿈, 공상을 단지 ‘미몽(헛된 꿈)’에 머무르지 않고 시간을 넘어 실현시켜 주기도 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은 이 SF, 공상‘과학’의 장소가 된다. 

< SFdrome: 주세죽 > 스틸컷

실험적이고 꿈 속 같은 풍경 이미지와 소리의 연속 중, 이 우주기지가 등장하고 발사를 준비하는 순간은 무척 현실적인 뉴스 다큐멘터리처럼 촬영되었다. 곧 무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날 듯, 경찰과 군인이 동원된 삼엄한 경비와 분주한 준비과정들이 보여지고 곧 우주발사대에서 로켓이 발사된다. 그리고 다시 주세죽의 얼굴과 여신처럼 보이는 동상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하늘로 날아가는 로켓. 다시 하얗게 눈이 쌓이 산, 천천히 움직이는 카메라, 하늘을 날고 있는 목각 인형 그리고 저 멀리의 집. 하늘, 산, 바람에 날려 여기저기로 움직이는 풍등의 이미지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 SFdrome: 주세죽 >을 포함해 김소영의 다큐멘터리 작업에서 언제나 눈에 띄는 것은 풍경들이다. 그 풍경들은 인간과 역사, 문화와 결합하여, 혹은 분리될 수 없는 한 부분으로 영화의 정서와 감흥을 전달한다. 김소영의 영화들 속 정주하기보다 유랑하는 삶의 풍경들은 정처 없음을 이야기하기보다 정주와 고향, 장소의 의미의 재구성을 이야기한다. 삶의 길 속에서 고향과 정착을 그리워하고 의미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정의 한 몸이 되는 풍경들을 포착하고 스쳐 지나가는 곳들, 혹은 일시적으로 머무는 장소들에 정주의 의미를 부여하고 정처의 의미를 새롭게 구성한다.

< SFdrome: 주세죽 >은 잊혀졌던, 드러나지 않았던 조선의 여성 사회주의자의 역사를 다시 아카이빙하는 작업이지만, 이 아카이빙은 기원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와 유배된 소비에트의 혁명 영웅 그리고 현재의 우주 기지를 과감하게 절합함으로써 20세기 초의 세계 변혁에 대한 공상들의 시공간적 ‘월딩’(worlding)을 시도한다. 이 대범한 시도는 동시대의 공상들, 또 다른 공상적 픽션들, SF를 쏘아 올리기 위한 간절한 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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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ZOOMER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강사, 2011~2014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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