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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박남옥 감독의 비정형적인 멜로드라마와 한국영화사

<미망인>

황미요조|영화평론가 / 2020-02-13


< ZOOM IN >에서는 여성 영화, 감독, 배우, 캐릭터 등을 퍼줌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도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남옥 감독

한국영화 최초의 여성 감독은 1955년에 <미망인>을 연출한 박남옥 감독이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의 폐허를 거쳐 한국영화 산업이 막 살아나기 시작한 시기, 박남옥 감독은 스스로 제작비를 마련하며 연출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미망인>은 당시 좋은 평을 받았으나 흥행에 실패했고, 이후 박남옥 감독은 다시 영화 감독의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잊혀졌던 이 영화는 1997년 제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복원·상영되며 다시 한국영화사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단순히 한국영화 최초의 여성 감독 연출작으로만 호명될 뿐, 한국영화사의 다른 영화들과 어떤 관계들을 갖는지, 한국영화사 쓰기에서 이 영화는 어떤 위치성을 가질 수 있을지는 거의 논의되지 않는다.

2019년 한국영화 100년을 기념해 다시 이 영화의 의의가 호출되는 일이 잦았으나 그 의의는 여전히 ‘최초’ 여성 감독의 연출작이라는 사실과 (어느 영화에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인) 영화가 만들어졌던 당대의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에 머문다. 나는 이 영화를 한국영화사와 관련하여, 특히 젠더적 관점을 개입시켜 한국영화사를 재구성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좀 더 적극적으로 논의할 필요를 느낀다.

<미망인>은 한국 전쟁 직후의 서울에서 남편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는 ‘전쟁 미망인’의 곤란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당시 여성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고, 이러한 점은 이 영화가 최초 복원되고 공개된 이래 집중적으로 주목되어 왔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독특하고 흥미롭게 느끼는 부분은 여성 현실이 드러나는 방식과 여성 주인공이 이에 대처하는 방식이다. 영화는 이후 한국영화에서 정립된 가족 멜로드라마나 모성 멜로드라마의 형식으로 자신의 곤란을 호소하지 않는다. 영화의 주인공인 ‘미망인’은 어머니로, 경제활동의 주체로, 로맨스와 성적 욕망의 주체로, 여성 간 우정과 적대의 중심으로 자신을 보여주지만 그 어떤 것도 한국영화의 전형과는 맞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맞지 않는 다양한 욕망과 역할을 영화는 구태여 일관된 하나의 내러티브나 인물 설정으로 끼워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미망인>

영화는 한강 다리부터 시작해 서울의 도시 전경을 보여준 후, 한 골목의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어린 아이에게 도착한다. 컷을 바꾸지 않은 채 카메라는 그대로 옆으로 움직이고, 그때 집 안에서 아이의 엄마인 신(이민자)이 나온다.

학교에서 돈을 가져오랬다는 아이와 다음에 주겠다고 달래는 엄마 사이의 갈등은 이후 눈물 나는 모성 드라마를 짐작하게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곧, 이 ‘미망인’인 신을 누군가가 방문한다. 죽은 남편의 친구의 부인이다. 죽은 남편의 친구는 대단한 부자로, 부인은 신과 자신의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추궁하는 부인에게 신은 오해라 말하고, 신과 한집에 세 들어 사는 남자와 여자는 신을 도와준다. 이후 거울을 바라보며 무엇을 다짐하는 듯한 신의 얼굴이 보이고, 멜로드라마 특유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음악이 흐른 뒤 시퀀스가 바뀐다.

신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다. 신의 억울함이나 서러움 혹은 오해에 대한 해명이 이어질 것 같지만, 신이 전화해서 만남을 청하는 것은 바람 상대로 의심 받고있는 죽은 남편의 친구이다. 신은 그를 만나 생활비를 받으며 미망인으로서 자신의 곤란한 처지나 딸의 학교 문제를 호소하기보다는 은근한 유혹을 하며 조신함과 같은 자신의 ‘여성성’을 표출한다.

<미망인>

신은 자신의 로맨스와 성애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에 있어서도 적극적이다. 친구의 남편은 자신이 이혼하면 신에게 자신의 후처가 돼줄 수 있을지 넌지시 떠보지만, 신은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생활비 이상 바라지 않고 로맨스와 성애적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상대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남편 친구는 나중에 사업 자금을 보태줄 경제활동 파트너로만 남는다.

신은 자신의 로맨스 대상과 딸이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지만 딸이 불편해하자 잠깐의 고민 끝에 옆방에 사는 남자 집으로 딸을 보낸다. 즉, 신은 돈이 필요하고 그것을 얻는 데 자신의 ‘여성성’을 활용하지만 그것이 꼭 절절 끓는 모성애 때문만은 아니다. 별 감정적 갈등 없이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를 사랑하지 않거나 방치하는 것은 아니다. 남자와 깊은 관계를 맺지만 별로 지고지순한 순정적 성격도 아니다.

경제적 곤궁, 가정이 있는 남자와의 (유사)데이트, 미망인의 연애, 모성 혹은 모성을 저버리는 것 모두 굉장히 드라마틱한 소재로, 멜로드라마에서는 특히 주인공의 도덕적 가치를 보증하고 관객들이 주인공에게 동화되기 위해 사용되고 배치되는 소재들이 <미망인>에서는 모두 ‘그럴 수 있는 일’로 특별한 드라마를 구성하지 않고 흘러간다. <미망인>이 갖는 한국영화사에서의 비정형성은 주변 인물들인 ‘양공주’와 부르주아 가정의 주부를 묘사하는 방식에서도 두드러진다.

<미망인>

신의 옆 방 여자는 신과 깊은 유대를 형성하는 인물이다.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여러 대사들을 종합해 볼 때 옆집 여자는 미군을 상대로 하는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직업에 특별히 의미를 둬서 묘사하거나 설명하지는 않는다. 직업을 숨긴다기보다는 굳이 인물이 그 직업을 얻게 된 사연이나 직업의 고충을 설명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 같다. 그렇다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악녀로 묘사되는 것도 아니다. 한국영화와 문학에서 숱하게 볼 수 있는 양공주 재현에 내재돼있는 민족(남성)의 죄의식이나 모멸감과는 전혀 관련을 갖지 않는 것이다.

지금까지 남성 감독과 작가들의 작품에서, 특히 1961년의 <오발탄>을 강한 원형으로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 리얼리즘 영화를 중심으로 계열화한 한국영화사에서 지겹도록 등장하는 남성의 열등감이나 죄의식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등장하는 양공주 누이나 애인을 생각한다면 생소하고 이질적이다. 옆 방 여자는 나이는 어리지만 벌이가 괜찮아 자립한 여자고, 자기 주변의 여성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함께 팔 걷어붙이고 나서주는 여자일 뿐이다.

남편 친구의 아내로 등장하는 부르주아 주부 역시 도덕적인 것도 아니고 비도덕적인 것도 아니다. 그는 가정을 내세우며 남편을 단속한다는 이유로 신을 찾아오지만, 사실은 자신도 젊은 남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 이 여성에게 가정은 지켜야 할 절체절명의 고귀한 가치라기보다는 경제적 공동체이며 그것이 깨지지 않도록 노력할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성애적 쾌락은 다른 곳에서 충족시킬 수 있다.

<미망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미망인>은 관객을 도덕적 심판자로 유도하지 않고, 거창한 드라마를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인공이 ‘미망인’이라는 설정 하나로 인물의 성격,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갈등 유형, 주요 내러티브를 어느 정도 짐작하게 되는 영화들과 달리 <미망인>은 세부 모습이 판이하게 다르다. ‘전쟁 미망인’이라는 설정이 일관된 영화 형식을 추동하게 하는 유형화된 설정이라기보다 전쟁 미망인에 어울리는 혹은 사회적으로 가능한 드라마 형태를 시험하고 조합해 보는 실험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러한 영화들의 비정형성은 거꾸로 우리가 원형처럼 알고 있는, 혼외자를 둘러싼 한국 모성 멜로드라마나 가족 멜로드라마가 전후 국가주도의 경제개발이 시작된 1960년대를 거치며 역사적 조건들에 의해 세공된 것이라는 사실을 추정하게 한다. 여기서 개입한 것은 국가주의적인 남성 중심적 시선이며, 그 바깥의 여성 시선은 누락된 것이다. 즉, 통상적으로 여성 장르이면서 동시에 체제 순응적인 가부장적 여성 주체를 생산한다고 생각하는 멜로드라마 역시 여성의 시선이 적극 개입한다면 지금으로서는 굉장히 생소한, 그러나 국가나 민족, 가족보다 ‘여성’에게 밀착한 장르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따라서, 박남옥 감독이 첫 작품을 이후로 계속 작품을 하지 못한 이유는 영화 산업 내의 고용과 관련된 차별 문제인 것도 당연하지만, 더 깊숙하게는 국가주도의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동원 전략에 맞지 않는 영화를 꿈꾸어서 일 수도 있다.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뿐 아니라 1950년대의 영화들은 <마부>(강대진, 1961)와 같이 아버지의 얼굴을 내세운 가족 멜로드라마가 확립되고 유현목, 김기영, 이만희 등 해방 후 한국영화사 1세대 (남성)작가들이 상처받은 남성들을 내세우며 자신의 경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1960년대와 달리 혼란스럽고 정제되어 있지 않으며 무엇보다 여성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가 많다. 이 영화들을 탐구한다면 주류 한국영화사가 성립된 과정과 원리 그리고 그 안에서 누락된 것들이 무엇인지를 추적하는 과정이 될 그 핵심의 한 가운데에 한국영화 최초의 여성 감독 작품인 <미망인>이 위치 지어진다. 한국영화사에서의 <미망인>이 갖는 위치성과 의의는 그렇게 새롭게 획득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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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강사, 2011~2014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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