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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라고 느껴질 때

<유나의 오늘>

유자 / 2020-01-23


<유나의 오늘>   ▶ GO 퍼플레이
박윤우, 우진 | 2016 | 드라마 | 한국 | 18분

<유나의 오늘> 스틸컷

10대 시절 학교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정글’에 가까웠다. 지금에야 그 시절 학교 하면 벚꽃이 만개한 교정, 친구들과 먹었던 떡볶이를 떠올리지만 그때로 다시 돌아가겠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땐 그랬지”라고 미소 짓기엔 교우 관계, 가족 문제, 미래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사랑 문제까지, 성인이 된 후의 비릿한 세계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기에. 아니, 오히려 뭘 모르고 어리숙했던 그때가 지금보다 더 야만적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문제들이 당시엔 지구가 반쪽이 날 만큼 중요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진 청소년에게 세계란 집, 학교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예민하고 복잡한 심리를 가졌으며 아직은 성숙한 가치관을 정립하지 못한 불안정한 존재들은 작은 마찰과 좌절에도 쉬이 의연해지지 못했다. 격동의 시기에 청소년들은 각자가 마주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고 그 과정에서 종종 자기 파괴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사춘기의 청소년들은 이 정글 같은 공간에서 성숙해간다. 다른 사람과 관계 맺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건 무엇인지, 어떤 관계가 소중한 관계인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스스로 답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유나의 오늘> 스틸컷

<유나의 오늘>(박윤우·우진, 2016)에는 이처럼 자신이 마주한 문제 앞에서 헤매는 불안정한 청소년의 모습이 담겨 있다. 주인공 유나(이지원)와 그의 친구인 수영(박수연), 이 두 명의 여고생을 통해 영화는 사춘기 시절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는 청소년의 모습을 그린다. 특히 영화는 ‘여고생’의 이야기를 다루기에, 여성이 사춘기에 겪게 되는 문제를 보여준다.

주인공인 유나는 짝사랑하는 같은 반 남학생에게 거절당한 뒤 성형을 결심한다. 혼자 병원에 가기가 겁난 유나는 친구 수영에게 같이 조퇴할 것을 제안하고, 영문도 모른 채 유나를 따라나선 수영은 그날따라 이상했던 유나와 함께 하루를 보낸다. 영화는 그 하루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유나의 오늘> 스틸컷

영화는 꽤 충격적인 오프닝으로 시작한다. 가장 처음 등장하는 것은 다름 아닌 화장할 때 사용하는 눈썹 펜슬. 유나는 조용히 그 펜슬을 자신의 앳된 얼굴에 갖다 댄 채 이리저리 선을 긋는다.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은 굵직한 선들로 가득하다. 얼굴 위의 선들은 마치 유나의 얼굴을 부위별로 조각이라도 한 듯 그려져 있었다.

오프닝 시퀀스 이후 등장한 교실에서 유나는 짝사랑하는 남학생을 유심히 바라본다. “왜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걸까?” 사랑의 좌절을 맛본 그는 원인을 자신의 얼굴에서 찾기로 한다. 유나는 본인이 매력적이지 않은 탓에 사랑이 이뤄지지 않았다 생각하고, 그 좌절감 때문에 성형을 하기로 결심한다. 여기서 하나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외모와 이성 관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사춘기 청소년, 특히 여성들은 예뻐야 한다는 강박을 갖기 쉽다는 것이다.

유나는 조퇴 후 병원에 가겠다고 굳게 결심했지만 막상 혼자 가려니까 외롭고 무서웠다. 신체에 칼을 대는 중대한 일임에도 쉽게 선택할 만큼 성형수술이 보편화돼있어 결단을 내린 유나였지만, 막상 생각해보니 두려운 것이다.

그렇게 수영과 함께 간 성형외과에서 유나는 간호사로부터 “수술은 30분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수술을 하면 더 예뻐질 것”이라는 격려를 듣는다. 어린 여성은 사랑의 실패 원인을 자신의 외모에서 찾고 사회는 아름다움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어리숙한 여성 청소년들을 세뇌한다.

<유나의 오늘> 스틸컷

한편, 이 모든 갈등과 우울감은 연애로부터 시작된 것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작품은 너무나도 이성애 중심적인 사춘기 청소년 문화를 보여준다. 유나와 수영 역시 이성애 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를테면, 수영은 책을 보고 있는 유나에게 웬일로 공부를 하냐며, 공부 열심히 해서 나중에 뭐할 거냐고 묻는다. 이에 유나는 “현모양처가 꿈”이라고 답한다.

유나와 수영이 성형외과에 같이 가는 길에 수영은 누군가와 문자를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다 넘어지겠다. 누구랑 그렇게 카톡해?”라고 묻는 유나에게 수영은 “명호”라고 대답한다. 오늘은 나랑만 놀자는 유나의 말에 수영은 반문한다. “언제는 둘이 놀면 재미없다며?”

몸이 성숙하기 시작하면서 사춘기 청소년들은 자연스레 성과 애정 관계에 호기심을 갖는다. 너무나 궁금하고 꼭 해보고 싶은 은밀한 것, 그것이 그들에겐 연애인 것이다. 하지만 가정 혹은 미디어를 통해 여성 청소년들이 상상할 수 있는, 혹은 상상하도록 제안되는 사랑의 형태는 너무나 제한적이다.

학창시절 내가 즐겨 보았던 소녀 만화 월간지는 다양한 로맨스 이야기로 가득했다. 꽃미남부터 츤데레, 나쁜 남자까지. 그 속에 그려진 달콤하고도 성적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들은 남자와의 연애를 일생일대의 중요한 미션으로 승격시켜버렸다.

이는 비단 만화뿐만이 아니다.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제한적인 여성의 면모는 여성 청소년들의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고 상상의 폭을 제한한다. 그렇게 사춘기 소녀들이 “연애는 얼마나 달콤할까?”라고 상상하는 동안 소년 만화 월간지는 소년들에게 무수히 많은 판타지와 모험, 성취를 보여줬다.

<유나의 오늘> 스틸컷

그러나 두 주인공은 영화 속 시간이 진전되면서 점점 달라진다. 모든 사건의 발단은 남자관계였지만, 그들은 함께 하루를 보내며 진정으로 소중한 관계가 무엇인지 깨닫기 시작한다.

병원에 가기 전 들른 카페에서 수영은 잠시 화장실에 가 명호와 통화한다. 학교 끝나고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오라는 수영의 말에 명호는 공부하느라 가지 못한다고 한다. 수영은 유나와 명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하고 명호에게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런데 유나가 통화를 마치고 카페에 돌아오니 유나는 그의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짙은 화장을 하고 있다. “나 몇 살 같아 보여?”라는 유나의 질문에  수영은 “화장 열심히 한 고딩?”이라 답한다. 유나의 얼굴을 보며 수영은 아무런 비판도, 격려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의 화장을 고쳐주기 시작한다.

수영이 유나의 화장을 고쳐주는 다소 긴 쇼트를 보며 우리는 알게 된다. 유나와 수영이 누군가를 가장 필요로 할 때 곁에 있어준 건 사실 남자도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서로라는 사실을 말이다.

“우정이냐, 사랑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이 지겨운 질문은 사실 질문 자체에 오류가 있다. 우정과 사랑은 우열을 가려야 하는 것, 양자택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개념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를 필요로 할 때 옆에서 힘이 되어주고, 상대방을 소중히 대하는 진심이 있다면 그게 곧 사랑이고 여기에 붙는 이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유나의 오늘> 스틸컷

유나의 화장을 고쳐주는 수영의 따뜻한 눈빛을 보며 우리는 다시 한 번 느낀다. 바로 수영이 유나를 제대로 봐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유나가 연애에 실패한 이유는 결코 유나의 흠 때문이 아니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또 좌절된 연애 때문에 유나가 많이 외로울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서 수영은 그의 곁에 말없이 있어준다. 유나는 수영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고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수영과 하루를 보내면서 유나는 한 걸음 더 성장할 수 있었다.

감독은 “누구나 있는 사춘기 시절의 어느 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여고생의 하루를 그리고 싶었다”고 연출 의도를 설명한다. 감독의 설명처럼 <유나의 오늘>은 결국 유나가 수영과 함께하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직 어리숙하고 불완전하지만 내게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것 그리고 나 역시 그 사람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 사춘기 청소년을 건강하고 따뜻한 어른으로 성숙하게 해주는 것은 사랑에 기반을 둔 따뜻하고 애정 어린 관계라는 것을 영화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유나의 오늘> 스틸컷

마지막 장면에는 수영이 어떻게 유나를 따라 조퇴할 수 있었는지 그 이유가 나온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유나를 따라 조퇴하겠다는 수영을 어이없어하는 선생님에게 수영은 되려 질문을 한다. “혹시 선생님은 세상에서 혼자라고 느껴질 때가 있으세요?” “뭐… 아주 가끔?”이라고 답하는 선생님에게 수영은 말한다. “유나는 그게 오늘인 것 같아서요.”

가장 외로운 나의 오늘을 함께 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됨으로써 사춘기 청소년들은 성장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따뜻한 관계가 바로 정글 같은 사춘기 학창시절 그리고 정글 같은 사회에서 살아남아 건강한 가치관을 가진 어른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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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019 대학 교지편집부에서 활동. 재미있고 가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콘텐츠 제작자 지망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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