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퍼플레이가 만난 사람들
[필름X젠더] <차가운 숨> 채한영 감독 인터뷰
“청소년의 연애를 말하다”
퍼플레이 / 2025-08-29
2025년 양성평등주간 온라인 상영회 [잇-다, 평등을 비추는 스크린]을 기념하여 필름X젠더 감독들의 인터뷰를 공개합니다. 그들이 전하는 뒷이야기를 통해 영화를 보며 궁금했던 지점들이 해소되기를 바랍니다 :) *해당 인터뷰는 2023년 9월 [필름X젠더] 단편영화를 활용한 성평등 교육 안내서 제작을 위해 진행되었습니다. |
Q. 〈차가운 숨〉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A. 원래 주인공이 소년이었다. 지금의 주인공보다 더 어린 친구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쯤부터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성적인 것들을 받아들이고 언어 또한 공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초등학교 5~6학년대 남자아이를 주인공으로 시나리오를 썼는데, 그걸 읽어본 애인이 “남자애들은 빠르구나. 여자아이들은 중학생쯤 (성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 같다”고 하더라. 이 차이에 대해 얘기하다가 “그럼 너와 내가 어렸을 때 만났다면 이런 문제 때문에 연인이 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가 중3 때 만났다고 가정한다면 서로 추구하는 관계(성적 또는 정서적 관계)가 달라 위험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 문제는 지금의 아이들도 똑같이 겪고 있지 않을까. 어른들은 아이들의 성적 인식 수위를 낮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큰 문제라는 점을 얘기해보고 싶었다.
Q. 주인공을 여자아이로 바꾸면서 어려운 지점이 있었을 것 같다. 고민이 있었다면?
A. 자매 관계를 다루는 게 어려웠다. 그래서 시나리오 초고에서는 승연-승희의 관계가 지금보다 더 평면적이었고, 재준과 승희의 대화 장면도 기능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그리면 안 되겠더라. 만약 형제였다면 남동생이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감히 내 동생을?’이라는 생각으로 자기 자존심 때문에 상대방과 싸우거나 상황에 대응했을 텐데, 승연이는 언니가 겪는 곤란함을 이미 묘지에서 경험하고 왔기 때문에 더 공포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느꼈을 공포감에 이입하는 것과 캐릭터 간의 관계를 디테일하게 채워나가는 부분이 힘들었다.
Q. 영화는 10대의 연애, 청소년의 성과 관계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주제를 다루면서 조심스러우면서도 어려운 지점이 있었을 것 같다.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무엇인가. 혹은 시나리오 및 연출 과정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지점이나 새롭게 알게 된 점이 있다면?.
A. 영화가 다루는 주제가 민감하다 보니, 이것에 대해 배우들과 너무 편하게 얘기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배우들 또한 영화에서 다루는 문제가 심각하고 위험한 것임을 인지하고 촬영에 진지하게 임하게 했다. 제가 놀랐던 점은, 아이들은 성적 세계에 대한 자신만의 주관을 이미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 번은 승연 역의 민주 배우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재준이가 승희에게 그런(성관계를 요구하는) 말을 했을 때 위협을 느낄 것 같아?”라고 물었더니 “너무 잘 아는 감정이고 충분히 이해돼요”라고 하더라. 연수 역의 성우 배우에게는 “승연이에게 뽀뽀를 받고 나서 연기 톤이 바뀌어야 해”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연수는 승연이가 뽀뽀했으니까 그런 거(OK 사인으로 받아들인 것) 아니에요?”라고 하더라.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런 포인트들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필름X젠더 제작지원작 <차가운 숨> 스틸컷
Q. 승연이는 터프한 반면, 연수는 소심하고 내성적이다. 둘은 키도 비슷하다는 점에서 미디어에서 흔히 보여주는 ‘여성-남성의 전형성’에서 벗어난다. 이것은 애초에 두 배우를 캐스팅하는 단계에서 염두에 둔 것이었나.
A. 승연-연수, 승희-재준 커플을 표면적으로 반대되도록 그렸다. 승연이는 남자친구에게도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말하는 반면, 승희는 애인에게 구애받는 타입이다. 서로 다른 두 버전의 커플을 선택한 것은 근본적으로 몸과 마음의 관계를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장기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자라는 나이이기 때문에 육체적, 심리·정서적 호기심이 상충되곤 하는데 그럴 때 위험한 상황들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비되는 캐릭터들을 구상하게 됐다.
Q. 연수를 내성적인 아이로 그린 이유가 있나?
A. 연수와 재준은 외적으론 달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같은 캐릭터다. 재준이처럼 자신감 넘치고 권력을 행사하려는 남자들보다 연수처럼 ‘연약함’을 어필하는 남자가 더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재준보다 연수를 조명한 이유다. 드러나는 성격으로 봤을 때 연수는 편지도 써오고, 음료수도 갖고 오고, 섬세하고 눈물 많은 아이처럼 보이지만 그가 갖고 있는 위험성은 재준이와 다르지 않다. 표현만 달리 했을 뿐, 연수도 재준이와 똑같이 여자아이들에게 위험 요소를 제공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연수라는 캐릭터를 가장 먼저 구축했다. ‘평소에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런 행동을 했다고?’라는 반응이 나오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잖나. 연수를 그렇게 그리고 싶었다.
Q. 승연과 연수의 연애를 통해 여성 청소년과 남성 청소년의 ‘동상이몽’이 잘 드러난 것 같다. 감독님이 생각하는 연애란 무엇이고, 여성 청소년과 남성 청소년에게 연애는 어떻게 같거나 다르게 받아들여진다고 생각하나.
A. 제가 청소년기에 경험한 연애와 지금 아이들이 경험하는 연애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남자아이들은 동정을 빨리 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길 거고, 여자아이들은 지금도 많은 제약을 받을 거다. 여자아이들은 연애 사실을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육체적 호기심은 차단된다. 그래서 정서적·관계적인 측면에 호기심을 좀 더 갖게 되는 것 같다. 이다 작가님이 사춘기 성에 대해 쓴 만화책을 본 적이 있는데, 여자아이들은 생리하는 것조차 숨겨야 하지만 남자아이들은 몽정을 농담처럼 이야기한다. 이건 지금도 지속되는 문제이기에 여전히 아이들의 연애는 아슬아슬하고 위험하다.
Q. 연수의 입장에서는 승연의 이별 통보가 갑작스럽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승연은 왜 이별을 결심하게 된 것일까. “다른 애들처럼 100일 넘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던 만큼, 100일을 넘겼으니 되었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A. 100일이라고 특정한 것은, 시나리오 모니터링 단계에서 멘토 감독님들이 말씀해주신 거였다. 묘지에서 편지를 받고 감동한 승연이가 연수에게 먼저 뽀뽀를 하는데, 이에 대한 감정적인 동기가 어색하다고 하셔서 포인트를 잡기 위해 100일이라고 설정했다. 승연이는 언니가 재준이와 사귀는 게 재미있어 보이고 연애를 경험해보고 싶어서 연수와 사귀기 시작했지만, 사실은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어떤 식으로 헤어져야 하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이별을 통보한 거다. 여성 스태프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본인들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승연이에게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충분히 있겠구나 싶었다. 성인들은 만나는 사람에 대한 예의와 의리를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욕구에 더 솔직할 것 같다. ‘이 정도 좋아하는데 사귀어도 되나?’라는 의문 자체가 어렸을 땐 희미하잖나. 서로 어울리는 무리 안에서 좋아하진 않지만 사귀는 경우도 많고. 승연이가 그런 마음으로 사귀었다 헤어지는 게 아이들로서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Q. 연수는 집에 가려는 승연을 주저앉히면서 “오늘은 내 말대로 좀 해. 그래야 공평하지”라고 한다. 이때 연수가 말하는 ‘공평’이란 무슨 의미인가. 왜 연수는 자신과 승연과의 관계가 공평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일까.
A. 연수가 아무리 다정한 아이라 하더라도 승연이에게 느끼는 점을 말하라고 한다면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연수는 자기가 기만당했다고 생각했을 거다. 승연이가 뽀뽀를 하자 연수는 “아, 덥네”라고 하면서 옷을 벗는다. 승연의 행동을 일종의 OK 사인으로 받아들인 거다. 성인들도 마찬가지지만 남자아이들은 뒤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OK 사인에 더 무섭게 반응한다. 이어서 공평이라는 단어가 연결된다. ‘너도 네 마음대로 헤어지자고 했잖아. 그럼 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네가 원하는 것(연애하는 기분)을 줬으니, 너도 내가 원하는 것을 줘야 공평하지’라고 생각하는 거다. 공평이란 단어에 ‘거래’의 의미가 내포돼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 무서운 것인데, 지금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되는 게 분명히 있을 거다.
필름X젠더 제작지원작 <차가운 숨> 스틸컷
Q. 누군가는 ‘콘돔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겁을 안 먹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특히 승연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그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연이 그 상황에서 겁을 먹고 도망가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나?
A. 여자아이들은 공포감을 느끼고, 남자아이들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완력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연수가 승연이를 끌어 앉히는 장면을 넣었다. 시종일관 눈도 못 마주치던 아이가 처음으로 완력을 사용한다. 여성과 남성 사이에 어쩔 수 없는 신체적 차이가 있잖나. 그런 차이에서 오는 공포감이라고 생각했다. 승연이는 자기의 감정을 해소하고 싶어서 연애를 해봤지만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미안하지만 헤어지자고 말할 수 있는 아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완력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을까? 콘돔을 발견했을 때 ‘이거 뭐야’라고 바로 반응할 수 있다는 건 판타지 같다. 아무도 없는 묘지에서 그런 상황에 맞닥뜨린다면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을 거다. 그게 실제 아이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Q. 연수는 재준이 승희를 만나고 있는 것을, 재준은 연수가 승연과 함께 있음을 알고 있다. ‘어떤 상황’을 세팅하기 위해 일종의 ‘공모’를 한 것으로 봐도 될까. 그렇다면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A. 시나리오 초고에서는 엔딩 장면이 지금과 달랐다. 재준과 연수가 만나서 대화를 하고, 승연이는 숨어있는 결말이었다. 그게 아이들의 상황 차이를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멘토링이 끝날 무렵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혼내기만 하는 영화는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연수와 재준의 행동을 문제 삼을 수는 있지만 성인의 관점에서 ‘이 아이들 참 나빠’라는 식으로 꾸짖지 않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많이 고민했다. 사실상 연수와 재준의 공모가 맞고, 그래야 영화에 담긴 둘의 관계도 설명된다. 그런데 아이들의 공모를 확실시하고 승연이를 피해자로만 묘사하고 영화를 완전히 닫아버리면 아이들에게 영화를 보여줬을 때 더 얘기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편지에 집중해서 영화를 끝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누군가를 혼내는 게 아니라 ‘위험한 밤’을 보여주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을 연수의 젖은 편지로 마무리한 것도, 승연이와 연수가 서로 주고받았던 흐릿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편지에는 다정한 내용이 쓰여 있을 텐데, 승연이에게 연수는 이제 위협감을 주는 사람으로만 남게 됐잖나. 그게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방향과도 맞다고 생각했다.
필름X젠더 제작지원작 <차가운 숨> 스틸컷
Q. 승연의 휴대폰을 돌려주기 위해 돌아온 연수는 승연이 계속해서 자신을 노려보자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돌아간다. 재준 역시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간다. 자신들의 행동에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느끼면서도 그들은 왜 그런 ‘시도’를 한 것일까.
A. 성인들도 알면서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지 않나. 아이들도 똑같다. 잘못이란 걸 알면서도 저지르는 거다. ‘부끄러운 듯이’ 연기를 해달라고 한 건 이 영화를 본 남자아이들이 그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수와 재준이가 대화를 나누면서 시시덕거리는 장면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남자아이들이 영화를 보고 부끄러움을 느끼고 연수와 재준의 행동은 위험하고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Q. 교육 안내서에서 꼭 다루길 바라는 장면 또는 대사가 있다면?
A.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젖은 편지’에 대해 얘기해보면 좋겠다. 연수가 말하는 ‘공평’한 관계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늘 손해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갖게 되는데 연애에서라고 다를까? 그런 점에서 연수는 공평함을 말했을 텐데, 그것에만 집중하다 보면 서로 상처를 주게 된다. 승연이는 연수로 인해 상처를 많이 받았을 거다. 연수의 다정함을 알지만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안다. 젖은 편지는 그런 승연이의 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Q. 이 영화를 누가 봤으면 좋겠고, 영화를 본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길 바라나.
A. 아이들이 보길 바란다. 남자아이 중에는 ‘승연이가 연수를 갖고 놀았으니 먼저 잘못했잖아’라고 말하는 아이도 분명히 있을 거다. 그런 얘기를 해도 괜찮으니 이 문제에 대해 솔직하게 터놓고 선생님과 함께 이야기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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