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부러져야 할 건 너의 샤프심이 아니야 -영화 ‘내게 사랑은 너무 써’에 나타난 성권력의 장소성과 애인(愛人)의 역할론에 대하여-

미디액트 ‘페미니즘 영화비평’ 수료작|<내게 사랑은 너무 써>

강은실 / 2021-03-26


[편집자주] 본 리뷰는 미디액트와 퍼플레이가 진행한 온라인 워크샵 <자기만의 글 - 페미니즘 영화 비평 쓰기> 1, 2차 강좌(주강사 : 김소희, 정지혜)의 수강생이 작성한 비평 수료작입니다. 교육 수료작으로서 수정없이 게재합니다.
* 총 8편의 비평 수료작은 매주 2편씩 4주에 걸쳐 진보적 미디어운동 연구 저널 ACT!와 여성영화 온라인 매거진 퍼줌(PURZOOM)에 공동 게재됩니다.
〈내게 사랑은 너무 써〉   ▶ GO 퍼플레이
전고운|2008|드라마|한국|22분

‘학생이 필통도 안 가지고 다니냐’는 말은 핀잔이다. 청소년은 곧 학생, 즉 배워야 하는 사람이라는 등치가 당연하게 먹히므로, 필통은 청소년이 필히 지참해야 할 소지품으로 취급된다. 물론 목련도 필통을 갖고 있고, 그 안에는 샤프가 있다. 샤프는 목련이 ‘그’ 모든 일을 겪고 집에 돌아온 후에도 책상에서 학생이라는 역할을 이어가도록 돕는 한편, 손끝까지 내몰린 불안한 심사가 분출되는 지점이 된다. 틀린 문제야 언제든 고쳐 풀 수 있지만, 마음에 불안이 찬 목련의 손에는 평소보다 힘이 들어가고 서두른다. 이윽고 샤프심은 톡 부러지고.

그렇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샤프심이 부러지는 소리가 나면, 고시원 앞에 서 있던 목련에게로 다시 돌아간다. 아직 그 샤프심이 온전하던 때로. 그 일들이 목련의 삶에 자리잡기 전으로. 그날 오후 목련은 남자친구인 병희가 살던 <열린 고시원 7호실>에 찾아갔었다. 그곳에서 전개된 목련의 서사에 한 번 더 바짝 따라붙기로 한다. 바라볼수록 더욱 혼란하지만, 모든 것이 시작된 지점이므로. <열린 고시원 7호실>은 연애의 당사자이자 여자 청소년인 목련이 자발적으로 입장한 공간이다. 목련은 이곳에서 연인인 병희와의 에로틱한 관계를 만들어 나가지만, 병희가 자리를 비운 잠깐의 틈을 파고든 옆방 남자가 창피한지도 모르고 성권력을 휘두르는 공간으로 순식간에 전복된다. 목련은 왜 그곳에 갔고, 옆방 남자는 왜 목련이 혼자 있는 방에 들어왔나.

옆방 남자가 듣고 있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하면서도 사근거리는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가고, 가만 눈을 맞추고, 함께 눕고, 처음으로 섹스를 하고, 목련을 남겨둔 채 혼자 간식을 사러 가는 병희와 목련의 연애 서사는 오직 7호실에서만 전개된다. 학생이자 미성년자로 통칭되는 십대 청소년들은 말 그대로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학업 이외의 영역에서 쉽게 눈총의 대상이 되지 않던가. 여전히 어른의 영역에 깊이 포섭되어 있는 연애를 하는 것도 모자라 에로틱한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면 그 눈총은 배가 된다. 이러한 분위기에 덧대어 첫 섹스에 곧잘 입혀지는 판타지와 순결성까지 결합되면 그들의 연애는 더욱 은밀해야 하고, 고시원이 갖는 밀폐성은 연애 장소로서 적격이라는 판단을 획득한다. 병희의 손길이 닿은 7호실은 분명 두 사람이 사랑하기에 괜찮은 공간이었다.

〈내게 사랑은 너무 써〉 스틸컷

그러나 목련은 이내 곧 방 모서리에 몰린 채 옆방 남자를 마주한다. 병희와는 평평한 벽에 나란히 기대어 앉아있던 것과 대조되게 벽과 벽이 만나는 틈새에서는 제대로 앉을 수 조차 없다. 핸드폰을 빌려 달라며 침대 끝에 걸친 남자가 통화 목록에서 마침내 ‘엄마’로 저장된 번호를 포착하면, 그는 자세를 편히 고쳐 앉는다. 그는 곧 일어나 앉아있는 목련을 내려다보며 엄마에게 전화하겠다는 협박을 내뱉고, 자신의 페니스를 주무르며 공간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한다. 엄마가 주었다는 이유가 소중해 묵주 반지를 끼는 목련에게 엄마는 사랑하는 가족이자, 자신의 비행을 들킬 수는 없는 보호자다. 그것도 유달리 순결성을 입는 십대 여성의 섹스라면 더욱이. 이와 같이 특정 성(性)에 오랜 시간 켜켜이 쌓아 올려진 관념을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함부로 이용하는 것은 성권력의 본질이며, 분명한 '선택' 행위다. 본능이나 욕구 따위로 가지를 뻗어 어쩔 수 없었다거나, 실수였다거나 따위의 변명이 허락되지 않는 의식의 영역에 옆방 남자는 그렇게 입장했다.

이처럼 목련과 둘 뿐인 공간에서 부끄럽게 날뛰는 옆방 남자의 모습은 성권력이 공적인 장소에서 떳떳하게 발현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착실히 증명한다. 물론 트인 공간일수록 성범죄의 발생 규모가 크지 않다는 식의 접근은 완전한 오해이며, 개방된 장소 혹은 인터넷 상의 공간이라 할지라도 권력을 행사하는 몸과 그것의 대상이 되는 몸이 밀접하게 맞닿는 공간은 충분히 은밀하다. 장소가 확보되었음을 확인한 가해자는 들킴에 대한 염려없이 함부로 제 것을 들이민다. 이 메커니즘에서 드러나는 성권력의 또 다른 본질은 안 된다는 걸 알고도 부려지는 힘이라는 것, 그렇기에 협소한 장소를 거점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떳떳하지도 못한 채 함부로 행사되고 마는 권력이 목련이 앉아 있던 모서리에서 뻗어 나와 시작되고, 아까는 남자친구인 병희와 제대로 못하지 않냐며 천박한 소임을 밝혀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목련의 겁에 질린 얼굴이 겹친다. 관객은 본격적으로 끔찍한 장면들을 마주할 준비를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시퀀스는 다소 갑작스레 전환된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알 수 없는 채로 할머니, 엄마, 여동생과 공유하는 작은 방에서 시작되는 목련의 새 시퀀스에서는 시종 핸드폰을 놓지 못하는 손이 보인다. 책상 아래로 뻗은 손에 온 신경을 집중한 목련은 병희에게 말하고 싶었을까. 쓰긴 해도, 목련은 병희가 사랑이라고 믿고 위로 받고 싶었을까. 그렇게 목련을 보고 있으면 소화기를 들고도 문 앞에서 돌아선 병희는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지고, 끝내는 애인으로서 적절한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병희의 부작위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성년인 옆방 남자에게 대적할 만한 힘이 충분치 않은 청소년이라는 현재 여건과 자신보다 큰 힘을 가진 동성에게 꾸준히 폭력의 피해를 입었던 학교 폭력 피해자라는 과거 경험이 병희라는 캐릭터에 입혀져 있고, 이 요소들은 병희라는 인물을 향한 전적인 원망을 어렵게 한다. 그럼에도 결국 목련을 두고 돌아선 이유 혹은 책임 역시 자꾸만 물을 수밖에 없도록 병희는 관객을 붙든다.

병희라는 캐릭터가 갖는 복잡성은 사실 함정이다. 만약 병희가 옆방 남자보다 더 우위의 여건을 갖췄더라면? 문을 열고 소화기로 남자를 내리쳐 목련을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아예 이 모든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 역시 있다. 그렇다면 건강하게 데이트를 마친 두 사람이 방을 나서 병희가 목련을 배웅하는 십대 로맨스물로 마무리되었을지도. 하지만 그렇게 되었더라도 그저 안심하고 관망할 수는 없는 세계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애인(愛人)을 지키거나 보호하는 메커니즘의 작동 여부가 동성 간 힘의 크기에 따라 결정될 수 있고, 위기에 처한 여성을 구하는 남성의 서사가 끈질기게 반복되는 세계는 계속해서 애인에게 중요한 역할을 안겨 왔지만 여전히 목련이들은 있어 왔다. 결국 모든 종류의 성권력과 이를 오용한 성범죄는 애인의 역할을 맡은 남성이 여성을 ‘지켜’ 막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병희라는 캐릭터, 그리고 이 영화에서 애인이라는 역할이 담당하는 소임이다.

병희에게서 시선을 거둬 다시 목련을 만난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시퀀스가 전환된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끔찍한 범죄를 재현하면서까지 감독은 무엇은 관철하고 싶었을까 내내 고민하던 눈에 마침내 목련이가 들어와 앉는다. 맞은 문제에는 동그라미를, 틀린 문제에는 선을 긋기도 하면서. 형언하지 못할 시간을 지나 책상에 앉은 목련이는 생존자이지만, 감히 짐작 못 할 수모를 떠올리는 손에 자꾸 힘이 들어가다가 마침내 샤프심이 부러진다. 아, 부러져야 할 건 너의 샤프심이 아닌데. 여성을 매개로 한 지리멸렬한 반복들이 부러지지 않으면 아무리 물어도 뜻을 헤아릴 수 없는 경험이 다른 시공간에서 반복될 테다. 이스탄불의 어느 여름날처럼.

이스탄불에 오면 가야 한다던 그랜드 바자르는 하필 그날 휴장이었다. 날은 더웠고, 가게가 닫은 길목은 모두 비슷하게 보였다. 헤매던 여자를 뒤에 두고 앞서 가던 구두장이가 마침내 솔을 떨어트리고 솔을 주운 여자는, hey, 하고 남자를 부른다. 두 사람만 있는 길목에서 남자는 솔을 찾아준 답례로 부디 당신의 신발을 닦게 해달라며 무릎을 꿇고, 여자의 다리를 잡는다. 가만 서 있던 여자는 허락하지 않은 체온이 닿자 그 행동의 의미를 헤아려보지만, 이내 남자의 손이 자신의 회음부로 향해 오는 것을 본다. 마침내 손길의 의미를 이해한 나는 분노로 감정이 전이되는 것을 느끼며 내달렸다. 그나마 양쪽으로 트인 공간이었고, 내가 바로 서 있었기에 가능한 대처였다고 곱씹는다. 그러나 나에게 허락된 운이 목련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일상과 여행의 공간을 비롯해 대체로 모든 곳에서 빈번히 경계해야 하는 삶.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예상치 못한 기척에 식은땀이 훅 빠지는 경험이 반복되는 삶. 그런 삶이 아니길 바라고, 그렇기에 소망한다. 누군가를 함부로 두고 보지 않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동등한 주체로서 인식하는 게 우리의 삶들이 엮인 세계에서 보편적인 것이 되기를. 그리고 부디 내가 거기 기여할 수 있는 이로 살기를. 그 방향으로 이 세계가 몸을 틀고 자세를 고쳐 앉을 때까지 목련이 스스로를 너무 탓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보란듯이 다시 샤프를 눌러 문제를 고쳐 풀고, 그어진 선을 어설프지만 동그란 것으로 되돌려 놓는 힘을 목련은 갖고 있으므로. 다만 손에 들어간 힘을 조금 빼놓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여름날의 나는 계속 달려 목련에게로 간다. 손에 너무 힘을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 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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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ZOOMER

‘미더운 어른’이 되고자 합니다. 『사랑하며 산 하루들』이라는 작은 독립출판물을 한 권 만들었고, ​멀지 않은 미래에 영화에 대한 사유가 다채로운 책도 엮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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