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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시내의 안부묻기] 숨지도, 숨기지도 않는 배우 조은지의 여자들

손시내|영화평론가 / 2020-11-19


“잘 지내고 있나요?” 손시내 평론가가 여성 영화인들을 향해 건네는 따스한 인사. 오래된 앨범을 넘겨보듯 애정 어린 시선으로 영화와 캐릭터를 들여다보고, 잊고 있었던 혹은 기억해야 할 이름들에게 안부를 묻습니다. ‘여성’과 ‘영화’를 오가는 이야기들 사이 사이 손시내 평론가가 전하는 ‘안녕’들을 포착해보시길.

〈눈물〉 스틸컷

어떤 영화에서 처음 만나더라도, 역할의 크기와 상관없이 기억에 강렬하게 남는 배우가 있다. 영화 전체가 그 캐릭터의 중심 이야기로 풀려가는 게 아닌데도 역할 자체의 독특함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안아 표현해내기에 온전히 시선을 끌어당기는 배우, 그래서 그 얼굴과 표정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는 배우, 영화를 보고 나면 그의 다른 출연작들을 찾아보게 되는 그런 배우. <눈물>(임상수, 2000)로 커리어를 시작해 어느덧 20년의 경력을 쌓아온 조은지가 바로 그런 배우다. 많은 사연을 품고 있는 듯하면서도 한없이 투명해 보이는 눈망울에 동그랗고 큰 코를 가진 매력적인 얼굴의 이 배우는 어딘지 특이하고 예사롭지 않은 캐릭터들을 통과하며 지금의 자리에 이르러있다. 아마 그 캐릭터의 연대기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한국 영화의 흥미로운 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000년 이후 제작된, 나름의 의미와 깊은 인상을 남긴 한국영화의 여러 장면들 속에는 이처럼 쉽게 잊기 어려운 조은지의 얼굴이 있다.

〈카센타〉 포스터

조은지는 지난해 11월에 개봉한 영화 <카센타>(하윤재, 2019)에서 배우 박용우와 함께 지방 국도변의 카센터를 운영하는 부부를 연기했다. 무엇이든 도전해볼 만큼 마냥 젊지도, 그렇다고 한세월을 다 겪고 삶을 관조할 만큼 나이 들지도 않은 중년 언저리 즈음의 부부. 이들의 가게 사정도 전혀 넉넉지 않아 파리만 날리는 실정이다. 그러니까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상상하긴 어렵지만, 어떻게든 바뀌어야만 하는 답답한 상황의 한중간에 이들이 있는 것이다. 영화의 큰 줄기는 이렇다. 인근의 큰 공사장에서 굴러온 부품으로 인해 도로를 지나다 펑크 난 차를 수리하게 된 재구(박용우)는 이것을 돈을 벌 수 있는 하나의 기회로 여기게 된다. 처음엔 말리던 순영(조은지)도 어느새 여기 가담해 금속 조각을 도로에 뿌려두거나 길에 못을 박기까지 한다. 

두드러지는 애정표현은 없어도, 서로 챙겨주고 돈 늘어가는 기쁨을 함께 나눌 때 이들은 꽤 좋은 팀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합이 잘 맞는 둘의 화려하고 유쾌한 범죄극 쪽으로 쭉 나아가는 대신, 그 안에 일렁이는 개인들의 사정과 흔들리는 얼굴에 시선을 돌린다. 돈이 없어 서러워하고, 초라함을 감당하며 자존심을 지키고, 욕망을 따라 끝까지 가다가 펑크 난 자동차처럼 비틀거리는 순영의 모습은 <카센타> 전체를 압축하는 이미지다. 조은지는 이처럼 어느 무리의 한 부분이면서, 그 무리를 뚫고 나오는 존재감을 가진 개인들을 연기해왔다. 그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 사정을 궁금하게 만들고,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어디선가 자신만의 모습으로 살고 있을 인물의 삶을 상상하게 하는 배우다.

〈아프리카〉 스틸컷

청춘들의 밑바닥 삶을 다룬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 <눈물>에서 조은지는 맑은 얼굴의 착하고 쾌활한 술집 종업원 란으로 등장한다. 더 강하고 더 자유롭고 더 거침없이 살기 위해 무엇이든 하는 청년들 무리 속에서 란은 때로 바보 같다고 느껴질 정도로 사랑에 매달리며 아이처럼 웃는 인물이다. 세상을 전혀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세상을 너무 잘 아는 것 같기도 한 그 얼굴은 이 영화의 등장과 함께 큰 충격과 발견으로 다가왔다. 깊이가 전혀 없어 보이는 동시에 너무나도 깊어 보이는 얼굴이라니. 그 앳된 얼굴엔 가늠할 수 없는 쓸쓸함이 함께 고여 있다. 

총을 들고 전국을 떠도는 네 명의 여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프리카>(신승수, 2001)의 영미도 겉보기와 달리 삶의 풍파와 울분을 가득 끌어안고 있다. 대학생인 지원(이요원)과 소현(김규리) 혹은 말수 적고 예쁜 진아(이영진)가 보여주는 세련됨의 반대편에서, 조은지가 연기한 말 많은 영미는 이 어설픈 4인조 강도단의 인간적인 욕망과 삶의 고단함을 대변하는 그런 인물이다. 그런데 란과 영미는 그런 서글픔이나 괴로움을 어른스러운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크게 소리 내 웃고 짜증내며 투정 부리는 게 바로 이들의 방식이다. 너무 솔직해서 절대 외면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까.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스틸컷

철없어 보이는 얼굴로 인생의 무게를 끌어안은 캐릭터는 조은지가 조금은 이른 나이에 비범한 ‘아내’로 등장한 두 영화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이무영, 2002)와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김태식, 2006)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의 은희는 말 그대로 철없는 아내다. 영화는 그런 은희를 사랑하는 두 사람, 남편인 두찬(최광일)과 태권소녀 금숙(공효진), 그리고 은희의 사연을 독특하고 코믹한 방식으로 담아낸다.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에서 ‘아내의 애인의 아내’인 소옥은 남편의 바람을 알면서도 사랑을 원하고 상처받을 것을 예감하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어쩌면 철없고 어쩌면 어리석게 느껴지는 여자들, 하지만 그렇게 보일지언정 은희와 소옥은 우스운 인물들은 아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을 인지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가능한 방법으로 노력하기에 이들은 남들이 보는 모습이 어떻든지 항상 본인들의 최선을 다하는 여자들이다. ‘파란만장한 남편’의 입장에서, 또는 아내의 애인을 만나러 간 ‘남편’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은희와 소옥은 그런 자신들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이미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젊은 여자에게 쉽게 덧씌워지는 여러 이미지들이 있지만, 이들은 그런 전형적인 옷을 적당히 입고 얌전히 앉아있지만은 않는다. 더 떠들고, 더 얘기하고, 더 노래하며 영화를 자신의 감정으로 짙게 물들이곤, 다시 내일의 삶을 위해 씩씩하게 일어선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스틸컷

임순례 감독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7)은 조은지가 온전한 팀플레이 역시 잘 해낸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다. 그가 핸드볼 팀의 일원으로서 언니들, 동생들, 곁에 있는 여자 동료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빚어내는 앙상블은 무척이나 안정적이고 또 감동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조은지가 연기한 골키퍼 수희가 팀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건, 조은지가 그간과 달리 별안간 평범한 인물을 연기하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이 영화에 나오는 여성들은 모두 평범하되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각자의 삶의 경로를 지닌 지극히 평범한 인물들이면서, 전형적인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는 독특하고 특별한 여성들이다. 조은지가 여기저기서 반짝이며 연기해왔던 여러 명의 여자들처럼 말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 팀의 실화를 소재로 삼은 이 영화는 가정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구르며 살아가는 여성들의 괴팍함과 간절함, 부끄러움과 연약함, 욕망과 자존심을 외면하지 않고 모두 담는다. 그런 언니들과 동생들이 곁에 있기에, 수희 역시 편하고 자연스럽게 존재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선샤인 러브〉 스틸컷

<후아유>(최호, 2002)와 <달콤 살벌한 연인>(손재곤, 2006)에서처럼 주인공의 존재감 강력한 친구로, <악녀>(정병길, 2017)나 <살인소설>(김진묵, 2017)에서처럼 비릿하고 씁쓸한 웃음을 내뿜는 센 여자로, 혹은 <선샤인 러브>(조은성, 2013)에서처럼 연애하고 싸우고 화해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로, 조은지는 지금껏 많은 영화를 오가며 다양한 여성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 넓은 스펙트럼을 억지로 요약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들은 때로 안쓰러울지언정 쉽사리 연민을 보낼만한 인물들은 아니었다는 점을 새삼 떠올려본다. 당신들이 날 어떻게 보든 상관없어, 나는 나의 진심을 숨기지 않을 거야, 라고 말하는 여자들. 아마 지금도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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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영화웹진 리버스 필진,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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