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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잠시, 다시] 잔인함 앞에 선 소녀들의 기다림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송아름|영화평론가 / 2020-11-05


송아름 평론가가 ‘또 다른 눈’으로 여성영화를 들여다봅니다. 지금보다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를 바라며, ‘잠시’ 멈춰 생각하고 ‘다시’ 또 생각합니다. 때로는 냉철하게 때로는 사려 깊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
아이에게 요구되는 것들. 이는 분명 어른들의 기대를 전제한다. 어른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삶, 이는 어른들의 존재 증명이거나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잔혹한 세상으로 인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홀로 떨어진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른의 도움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혼자서 살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는지 등은 이 세계에서 중요치 않다. 아이를 보호할 어른이 없으면 그 아이는 천덕꾸러기가 될 것이라거나 버림받을 것이고 급기야는 최후의 결과로까지 치달을 것이라는 어른들의 확신은 결국 제 스스로 최후의 결과를 실행케 한다. 아이들의 삶이 과도하게 발랄하거나 넘치도록 성숙하게 그려지는 것, 그러니까 어딘가 균형을 잡지 못하는 것은 아이의 세계가 온전할 수 없으며 당연히 어른의 세계에서 안정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강박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아저씨〉 스틸컷

그럴 수 있다. 아직 미약한 아이들의 힘은 분명 물리적으로 누군가에게 대항하기 힘들며, 또 그들의 순수함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아이들의 삶을 보호받아 마땅한 것이며 구원받아야 할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들이 극단적인 위험 속에 던져지는 일이 반복된다면 문제가 다르다. 그중에서도 약하고 처절한 상황에 처한 것으로 묘사하기에 적합한(?) 소녀들은 극단적 설정 속에서 무작정 자신을 구해줄 이를 기다리며 공포에 떨어야 했다. 이들은 과거 가난 때문에 눈물 훔치며 결혼 당하거나 스스로 부모를 두고 집을 나서야 했던 딸 팔기 서사나 서울로 상경한 소녀들의 서사 속 감정적 고통을 능가하는 상황들 앞에 위태롭게 서 있다. 더 이상 갑작스레 집을 떠날 수밖에 없던 이들이 굳건히 가질 수 있던 목표, 적어도 눈물 바람을 앞세워 그들을 안타깝게 생각이라도 해주던 가족들은 이들에게 없다. 현재의 소녀들은 더 어려졌고, 그들을 위협하는 상황은 실제 눈앞에 칼을 들이대는 이들과 대면해야 하는 공포의 순간으로 바뀌었으며, 스스로 위험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로 설정되어 버린다.

〈아저씨〉 스틸컷

시작은 <아저씨>(이정범, 2010)였다. 소미(김새론)는 마약에 취해 있고, 자신의 눈앞에서 고문당하다 결국 자신까지도 위험 속에 밀어 넣는 엄마가 유일한 가족이다. 얼마 후 소미의 엄마는 모든 장기가 사라진 채 멋대로 꿰매놓은 통나무로 발견된다. 소미는 엄마가 숨긴 마약을 찾으려던 이들에게 납치되고 비슷한 이유로 잡혀 왔을 아이들과 생활한다. 그곳은 마약을 전달하거나 제조하는 곳이며, 아이들이 약 기운에 픽픽 쓰러지다 언제부터인가 사라져 버리는 불안 그 자체인 공간이다. 소미가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모른 채 무작정 끌려온 곳, 그곳에 미리 잡혀와 어둠 속에서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던 남루한 아이들의 모습은 아직 뇌리에 깊이 남아 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난다면 소미의 미래는, 그리고 그 아이들의 미래는 그의 엄마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소미가 친하게 지내던 전당포 주인인 태식(원빈)은 병기가 될 정도의 훈련된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유일하게 소미와 말을 트고 지내며 그를 보호하려 했으므로 결국 그가 소미를 구해낼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그러나 그를 응원하기 전 알아야 할 것은 그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의 분노를 돋울 상황이 만들어져야 하며, 그것은 곧 소미의 고통과 공포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이 극단에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장기매매이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장기매매에 대한 암시, 혹은 직접적인 묘사는 이때부터 아이들에게로 옮겨온다. 반항을 꿈꿀 수도 없는 아이들 앞에 놓인 이 극한의 공포는 아이를 구해내야만 할 명분으로 작용한다. 물론 이는 탈출 직전까지 아이들이 겪어야 할 공포에 무관심했기에, 결국은 구해낼 것이라는 알리바이로 가능한 묘사였다.

〈아저씨〉 스틸컷

<아저씨>로부터 10년이나 지난 지금, 다시 어린 소녀의 장기매매가 영화의 중심에 놓이면서 부성이라는, 성인 남성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구출하여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서사가 등장하고 있다. 아이들이 장기매매라는 위협 속에서 살아남은 후 온전히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떠올려본다면, 이처럼 (일부러) 극단으로 밀어 넣는 서사의 의미는 결국 그를 구출한 자만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과연 구해내기 위해, 구해낸 자를 옹호하기 위해 구해야 할 상황을, 그것도 가장 공포스러운 방법으로 배치하는 것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그리고 왜 그 극단에 처해 있을 때에만 아이는 다시 돌아보고 돌보아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늘 이러한 서사가 반복될 수 있도록 부추기는 빈약한 상상력과 폭력성에 놀라고 만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스틸컷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홍원찬, 2020)의 유민(박소이)은 자신의 아버지 인남(황정민)에겐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려지지 않은 아이였다. 태국으로 건너가 영주(최희서) 홀로 낳아 키우던 아이가 납치되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시작된 인남의 딸 찾기는 그가 킬러라는 점에서 유민이 처할 위험의 순간들이 얼마나 높은 강도로 진행될 것인지를 예상케 한다. 인남이 태국 곳곳을 누비며 유민을 찾을 때 그가 마주한 것은 역시나 아이의 등급을 매겨 장기매매가 이루어지고 있던 빌딩이며 그곳에 남아 있던 유민의 흔적이다. 인남이 예상한 곳에 유민이 없다는 것은 곧바로 아이의 처절한 죽음으로 연결된다. 상기해야 할 것은 이 작품이 레이(이정재)가 자신의 형을 해친 인남을 쫓는 두 사람의 대결에 중심에 놓인 영화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유민의 위기는 인남이 레이의 위협에 쉽게 대응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일종의 걸림돌이자 위기로 몰아넣는 서브 서사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본 적 없는 딸을 위해 희생하는 아버지라는 설정은 과연 딸과 아버지 중 누구를 위한 것인지 궁금할 뿐이다.

〈소리도 없이〉 스틸컷

물론 아이도 살아남기 위해 철저하게 상황을 이용하고 어른을 이용할 수도 있다. 어떻게 해야 어른들이 자신을 믿게 될지, 좋아하게 될지를 알고 있다면 그 효과는 더욱 극대화될 것이다. <소리도 없이>(홍의정, 2020)의 초희(문승아)는 이런 면에서 독특한 캐릭터다. 양지에선 달걀을 팔고, 음지에선 시신을 처리하며 살아가는 태인(유아인)과 창복(유재명)은 갑작스레 납치된 초희를 맡게 된다. 며칠만 맡아주면 될 것이라며 아이를 떠넘긴 이가 사망하면서 태인은 초희와 함께 한다. 영화에서 초희는 자신이 동생과 같은 3대 독자 아들이 아니며(영화에서 좀 더 명확하게 등장하면 좋았겠지만 이 부분은 그리 부각되지 않는다. 이에 대한 명확한 지시가 있었다면 초희의 행동들이 좀 더 이해가 가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기에 부모가 큰돈을 들여서까지 자신을 찾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불안 속에서 살아온 초희는 자신을 납치하듯 데려온,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환경에 살고 있는 태인과 그의 동생 사이에서 본능적으로 자신이 살아갈 방법이 무엇인지를 안다.

초희는 태인과 마주할 때, 그가 없을 때에 드러내던 심드렁한 표정을 감추고 적극적으로 그의 눈에 들고자 노력한다. 이때 초희가 선택하는 방법은 정돈되어 있지 않던 방을 치우고, 예절이라곤 배운 적 없어 보이는 태인의 동생에게 태인을 위하는 법을 가르치며, 빨래를 하고, 그가 ‘처리’하는 일들을 돕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의아하기만 한 초희의 행동들은 그가 3대 독자인 동생에게 치여 가며 살아갔던 ‘여자아이’라는 그의 상황을 떠올렸을 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초희의 행동은 다행히 초희가 예상한 대로 태인의 마음을 끌며 결국 그 스스로 초희가 그곳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돕게 한다. 초희가 태인과 함께 학교에 도착했을 때, 태인의 존재를 의아해하는 선생님이 초희의 한 마디에 경악하듯 소리치는 장면은 초희와 태인의 교감은 태인만의 착각이며 초희는 살기 위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철저히 태인을 이용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스틸컷

그러나 초희가 교묘하게 어른들의 체계를 비틀어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초희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초희는 태인과 창복 사이의 소통의 오류로 산속의 한 식당으로 옮겨지는데, 초희를 본 식당 주인들의 얼굴에는 못마땅함이 가득하다. 자신들의 생각보다 아이가 크다며 투덜대는 이들은 혈액형을 묻고 아픈 곳이 없는지를 묻는다. 주인의 뒤로 널브러진 아이들의 모습은 그곳에서 거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짐작케 한다. 죽음을 전제로 자신의 몸을 훑으며 ‘견적’을 내는 이들 앞에 던져진 초희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소주를 탄 요쿠르트를 초희에게 건네는 이들을 외면하고 돌아서는 태인과 그를 분노에 차 바라보는 초희의 눈은 그곳에서 아이들이 겪었고 앞으로 겪을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에 의문을 품게 한다. 이후 집으로 돌아온 태인은 ‘초희가 빨래하여 걸어놓았던 슈트를 보고’, 식당으로 되돌아가 그곳에 있던 아이들을 구출해낸다. 이러한 상상력이 그려낸 아이들의 모습은 그저 불안하고 또 불안하기만 하다.

잠시 이야기했지만, 이 세 영화에 모두 등장하는 장면은 주인공 소녀가 당도하기 전 끔찍한 일들을 겪었거나 목도했을 아이들의 초라한 모습과 텅 빈 눈동자를 전시하는 장면이다. 장기매매라는 목적 아래 놓인 이들은 죽음을 목전에 둔 것과 다르지 않다. 구해낼 이를 위해 끔찍한 상황에 처한 아이들, 특히 소녀들은 어른, 더 정확하게는 성인 남성을 벗어나 절대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영화가 위치 짓는 아이들의 역할은 도구인 듯하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보다 어른을 위해 존재하며, 그것으로 아이의 가치를 규정하며 어른들의 승리를 만들어 낸다. 특히 무엇인가가 결여된(가령 <아저씨>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는 가족, <소리도 없이>에서는 내일에 대한 지향과 같은 것들) 남성에게 소녀는 그것을 일깨워줄 이로 등장하면서 점점 위험한 상황으로 내몰린다. 그것이 소녀들이 겪을 끔찍한 고통과 공포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이젠 이 비겁한 깨달음의 전시를 멈추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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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시네마 크리티크 필진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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