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노년 여성이 쓰는 사랑의 언어

<러브레따>

유자 / 2020-08-20


<러브레따>   ▶ GO 퍼플레이
서은아|2016|드라마,  SF/판타지|한국|24분

<러브레따> 스틸컷

교실에서 노년의 여성들이 한글을 배운다. 아직은 서툴지만 한 글자 한 글자씩 깍두기공책에 적어 넣으며 그동안 가장 가까우면서도 알 수 없었던 언어를 새로이 익힌다. 배울 기회를 얻지 못했고, 또 삶이 바빠 배울 수 없었던 그들에게 한글 공부는 언어로 세상을 읽고 표현하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인다.

영화의 오프닝 속 한글을 배우는 여성들 중엔 주인공 옥자(예수정)도 있다. 낮엔 배움터에서 열심히 한글을 공부하고 저녁엔 책상 위에 편지지를 올려놓은 채 한동안 생각에 잠기는 백발의 노인. 그는 새로이 배운 언어로 무엇을 표현하고 싶을까. 서은아 감독의 영화 <러브레따>(2016)는 한글 만학도 옥자의 편지를 통해 그의 사랑과 삶을 따뜻하고 깊이 있게 그린다.

<러브레따> 스틸컷

노인 옥자가 편지를 쓰는 공간의 저편엔 시간과 위치를 알 수 없는 산속의 젊은 군인들이 있다. 편지가 왔음을 알리는 통신병의 목소리에 기쁜 얼굴로 달려가는 군인들. 이 젊은 군인들은 노인인 옥자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보는 사람들은 궁금해진다.

편지가 향한 곳은 서원석(김희찬)이라는 이름의 한 병사다. 그리고 그가 열어본 편지엔 어젯밤 옥자가 삐뚤빼뚤 눌러쓴 단 하나의 문장이 있다. “서원석씨 보시게요.완성되지 못한 편지에 의아해하며 농담 삼아 질책하는 동료들에게 원석은 괜히 그의 아내의 무뚝뚝함을 탓한다. 하지만 편지 속 글자를 천천히 눈에 담는 그의 얼굴엔 기쁨과 함께 사무치는 그리움이 느껴진다.

그렇게 영화는 다시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노인 옥자에게로 초점을 옮긴다. 손님을 기다리며 한글 읽는 연습을 하던 옥자는 그의 앞에 손을 꼭 잡은 노부부가 지나가자 누군가 생각나는 듯 그리운 표정을 짓는다. 옥자의 미세한 감정 변화, 그리고 원석의 말을 통해 작품은 옥자가 노인이 된 현재와 55년 전 전쟁 통에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그의 남편 원석이 연결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밤이 되자 옥자는 글짓기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편지지를 앞에 둔 채 골똘히 생각에 잠기지만 글은 그리 쉽게 써지지 않는다. 마음속에 있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글짓기의 주제라는데 그걸 어떻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러브레따> 스틸컷

사랑하는 사람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 채 아이를 키우고 살기 위해 발버둥친 55년의 세월. 그동안 사랑하는 이를 향한 그리움은 흐려지고 짙어지기를 반복하며 한없이 깊어졌을 텐데 그 마음을 어떻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이제 막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옥자에겐 버거운 일이지만 그래도 그는 공들여 한 문장씩 적는다. 그게 전해질지 아닐지 모르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옥자가 쓴 문장은 또 다시 알 수 없는 시간 속 원석에게로 전해진다. “서원석씨 보시게요. 55년 만에 불어봅니다.” 새로운 문장이라곤 뒤에 적은 한 문장이 전부지만 가족에게 돌아갈 날만을 꿈꾸는 원석에겐 옥자가 살아있음을 아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그에겐 또 다시 죽음의 그림자가 들이닥친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전쟁과 날아드는 포탄에 원석은 공포에 질린 채 점점 지쳐간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눈물을 흘리는 그의 손엔 사랑하는 옥자와 아들, 그리고 자신이 나란히 찍힌 사진이 꼭 쥐어져 있다.

<러브레따> 스틸컷

다음 날 시장에서 조기를 팔던 옥자는 라디오로 북한과의 분쟁 소식을 듣는다. 전날 국군과 북한군이 서로 포탄을 주고받았다는 소식에, 옥자는 전쟁으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리운 이에 대한 걱정을 멈추지 못한다. 작품은 이처럼 한국 전쟁의 희생자와 현재가 연결되어 있다는 판타지를 통해 지금은 희미해진 전쟁의 아픔을 떠올리고, 남편을 그리워하는 옥자의 기억을 통해 전쟁 당시 희생된 자들을 복원한다.

아들이 증손자와 함께 놀러온 날 옥자는 유치원생인 증손자와 한글 받아쓰기 대결을 한다. 열심히 공부한 만큼 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기대 이하의 점수를 받자 옥자는 속이 상하고 분하기도 하다. 내 마음을 최대한 잘 표현하고 싶은데 받아쓰기 점수를 보니 그러지 못할까 걱정도 된다. 그날 저녁 옥자는 다시 편지를 쓰려고 해보지만 자신의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 써두었던 문장마저 지우고 결국 편지를 쓰지 않는다.

옥자의 걱정대로 전쟁터에서 생일을 맞은 원석은 반찬 하나 없이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운다. 통신병이 편지가 왔음을 알리자 원석은 내심 기대에 부풀지만 전날 옥자가 편지를 쓰지 않은 탓에 그는 편지를 받지 못한다. 여전히 한국 전쟁이라는 시공간에 묶여 있는 원석은 옥자로부터 소식이 들리지 않자 그의 신변을 걱정한다.

<러브레따> 스틸컷

한편, 글쓰기가 마음처럼 되지 않아 실망했던 옥자는 결국 포기하지 않고 배움터의 글짓기 대회로 향한다. 교실에서 빈 종이를 앞에 둔 옥자는 비록 떨리고 긴장되지만 마음을 추스르고 자신의 진심을 글에 담기로 한다. 그렇게 완성된 옥자의 러브레따엔 무엇이 담겼을까.

교단에서 같은 노년 여성들을 향해 그가 낭송한 편지엔 원석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그동안의 삶이 소박하고 애절하게 담겨 있었다. 어린 아들을 혼자 키워야 했던 젊은 시절의 막막함, 장성한 자식에 대한 뿌듯함과 삶을 잘 헤쳐 온 것에 대한 안도감, 그리고 죽어서도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보고 싶은 그리움까지. 뒤늦게 한글을 배워 서투르긴 해도 진심으로 써 내려간 옥자의 편지엔 그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그의 마음과 인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완성된 옥자의 러브레따는 원석에게도 전달된다. 옥자가 편지를 읽는 동안 원석 역시 그 편지를 자신의 동료들 앞에서 소리 내어 읽는다. 옥자의 모습과 오버랩되는 원석의 얼굴엔 행복과 자랑스러움, 그리고 그리움이 가득해보였다. 비록 그는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아들과 함께 할 순 없었지만 옥자의 진심 어린 편지 덕에 비로소 기억될 수 있었고 또 구원될 수 있었다. 러브레따로 옥자의 진심을 알게 된 원석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해보였다.

<러브레따> 스틸컷

서은아 감독의 영화 <러브레따>는 이처럼 노년 여성의 언어, 그 언어로 표현된 여성들의 경험, 그리고 그 경험이 닿아있는 사람들과 한국사의 순간을 조화시켜 진한 감동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 감동의 중심엔 옥자의 언어가 있었다. 격동의 세월을 살아온 노년 여성의 마음과 감정이 담긴 언어. 그 언어는 누군가를 기억했고 그리워했으며 또 사랑했다.

결말에서 옥자의 편지를 읽는 원석은 살아 있는지 아닌지, 어떤 시공간에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옥자가 쓴 편지,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사랑의 언어가 지닌 깊은 울림은 자유로이 뻗어나가 원석에게도 반드시 닿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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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019 대학 교지편집부에서 활동. 재미있고 가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콘텐츠 제작자 지망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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