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연애라는 신화
<언데이터블 우먼>
유자 / 2020-08-06
<언데이터블 우먼> ▶ GO 퍼플레이 조유경|2018|다큐멘터리|한국|29분 |
“그래서, 너는 남자친구 안 사귀어?” 몇 주 전 가족들과 모인 자리에서 어른들은 이렇게 물었다. 사촌들의 흥미진진한 연애 에피소드가 끝나고 나니 옆에 있던 내게도 같은 질문이 떨어진 것이다. 연애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가족들은 한 마디씩 충고한다. 그래도 젊을 때 많이 해봐야지, 지금 아니면 못한다, 나중에 후회한다 등. 그냥 흘려들으면 된다고도 생각하지만, 걱정 가득한 눈빛을 한 몸에 받고 나면 뭔가 크게 실수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찜찜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연애 좀 해”라는 말에 대한 탐구. 조유경 감독의 다큐멘터리 <언데이터블 우먼>(2018)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왜 연애하지 않는 사람은 연애하지 않는 상황에 대해 끊임없이 해명해야 할까. 연애란 모두가 반드시 해야 할 만큼 그렇게 중요하고 좋은 것일까. 한동안 남자친구가 없는 자신에게 주변 사람들의 걱정 어린 조언과 충고가 이어지자 감독은 궁금증이 생긴다. 도대체 이들은 연애가 뭐라고 생각하길래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커플 혜택, 커플 매칭 앱, 커플 예능까지 연애를 권장하고 조장하는 우리 사회의 인식이 과연 유효한 것인지 감독은 직접 연애 전선에 뛰어들어 그 실체를 파헤친다.
<언데이터블 우먼> 스틸컷
게으르다, 자의식 과잉, 사회성 없다, 고루하다. 이 무례한 말들은 전부 지인들이 유경을 묘사하는 말이다. 물론 이는 유경이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것은 아니다. 다만 연애, 오로지 연애에 있어서만큼은 그들이 유경보다 더 나은 사람, 한 마디 충고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유경은 주변 커플들에게 묻는다. 도대체 그들이 생각하는 연애란 무엇인가. 커플마다 답변은 상이하지만 성별에 따른 차이가 뚜렷하다. 남성들은 여자 친구가 자신을 잘 보살펴주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어서, 여성들은 남자친구에게 의지할 수 있고 행복하기 때문에 연애를 한다고 답한다.
무언가를 해주기에 좋다는 답변과 그냥 행복하다는 답변. 조금 불공평해보이지만 어쨌든 연애를 하지 않는 유경에게 그들이 설명하는 애틋한 감정이란 가늠하기조차 힘든 것이다. 그 소중한 감정이 정말 실재하는 것이고, 그것이 인위적으로라도 가져야 하는 특별한 것이라면 유경 역시 연애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다. 유경에겐 왜 남자친구가 없을까.
<언데이터블 우먼> 스틸컷
그의 지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은다. 유경은 연애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연애가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학 시절 연애 많이 해보라는 성공한 이들의 조언처럼, 솔로대첩에서 연인을 쟁취하기 위해 몰려들었던 사람들처럼 연애가 그토록 중요하고 좋은 것이라면 유경은 연애를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것일 터였다.
그렇다면 정말 연애는 그토록 좋은 것일까. 주변 사람들의 충고에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느꼈던 유경은 그들의 우려가 사실인지 알아보기 위해 직접 연애 전선에 뛰어든다. 선택한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클럽에 가는 것. 그리고 하나는 데이팅 앱을 이용하는 것.
첫 번째 관문인 데이팅 앱은 설레는 연애의 시작이라기엔 다소 팍팍했다. 데이팅 앱을 이용하려면 유경은 먼저 자신이 커플이 될 만한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증명해야 했다. 프로필에 ‘셀카’와 나이, 학교 같은 개인정보를 입력한 후 데이팅 앱의 심사를 받았고 합격 통지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상대를 물색할 수 있었다. 연애는 안 하면 이상할 정도로 흔하고 좋은 것이지만, 데이팅 앱은 이를 위해선 일정한 자격이 필요함을 암묵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언데이터블 우먼> 스틸컷
두 번째 방법이었던 클럽은 더욱 실망스러웠다. 헌팅 포차의 네온사인과 여성 입장 무료가 쓰인 클럽의 플래카드가 가득한 홍대 거리. 그곳에서 호객꾼들은 유경과 그의 친구들에게 거리낌 없이 반말을 하고 허락하지도 않은 연애 선배를 자처하고 나섰다. 언니가 남자친구 사귀게 해줄게, 신발부터 틀렸어, 얼굴은 예쁘게 생겨갖고. 친근함을 가장한 언어폭력과 외모에 대한 무례한 지적으로 유경은 그저 불쾌할 뿐이었고, 클럽 입장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데이팅 앱에서 알게 된 상대와 실제로 만날 때도 유경은 즐거울 수 없었다. 처음 만나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본인도 모르게 평소와 다른 과장된 몸짓과 이상한 거짓말들을 늘어놓았다. 인위적인 만남에 부자연스러운 자신의 모습에 유경은 결국 체하기까지 한다. 이쯤 되면 의문이 든다. 다들 연애가 좋은 거라고들 하는데, 이토록 불편할 뿐이면 연애에 대한 환상은 다 거짓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언데이터블 우먼> 스틸컷
크리스마스에 남자친구 대신 친구들과 생일 파티를 즐긴 유경은 그들에게 자신의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며 그동안의 심정을 털어놓는다. 그가 탐구한 결과 연애에 대한 환상은 결국 신화에 불과했다.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연애라는 틀 속에 반드시 사랑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그 안에서도 젠더 권력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억지로 연인을 만들수록 불쾌해진다는 것, 그리고 유경은 이미 자신의 상황에 만족한다는 사실 역시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다시금 깨달았다. 연애를 하지 않는 유경의 선택은 전 남자친구가 말하듯 연애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도, 그 무엇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혼자 있는 시간이, 친구와 함께하는 시간이 더 편하고 행복할 뿐이다.
감독은 마지막으로 연애를 하지 않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솔로’라는 단어로 범주화되어 무언가 결핍되고 부족한 것처럼 뭉뚱그려졌던 비연애 여성들은 생각 이상으로 다양한 사연을 갖고 있었다. 연애보다 일에서 더 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연예인을 좋아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고 기본적으로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다.
<언데이터블 우먼> 스틸컷
영화는 결국 연애란 당연하게도 개인의 선택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작품에서 보여주듯 연애하지 않는 여성들은 꼭 남자친구가 아니어도 이미 각자 무언가에 열정과 애정을 쏟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연애를 한다면 그것도 좋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좋다. 다만 연애를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그리고 신성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어쩌면 감독의 말대로 연애를 하려는 많은 이들은 연애라는 신화에 짓눌려 혼자 있기를 두려워하는 건지도 모른다.
다큐멘터리를 마치고 감독은 비로소 자신을 흔들림 없이 긍정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 속 유경을 가리켰던 ‘언데이터블 우먼’은 좀 다르게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연애를 못하는 여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연애할 수 없는 여자, 즉 연애하지 않는 여자로 말이다.
PURZOOMER
2018~2019 대학 교지편집부에서 활동. 재미있고 가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콘텐츠 제작자 지망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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