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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익명의 우리, 평범의 보편성

허지은 감독론

송효정|영화평론가 / 2020-07-09


< ZOOM IN >에서는 여성 영화, 감독, 배우, 캐릭터 등을 퍼줌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도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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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진실되게 열심히 한다. 그런 허지은 감독의 영화는 더디다. 많은 것을 설명해주지 않는다. 공감을 강요하지 않는다. 고요히 시작하나 뜻밖의 조응과 은근한 공명에 도달한다. 느리지만 굳건히 전진하고 있는 허지은 감독의 영화세계를 단편 <오늘의 자리>(2017), <돌아가는 길>(2017), <신기록>(2018), <해미를 찾아서>(2019)를 통해 살펴본다. (이상의 작품은 모두 허지은·이경호 공동 각본에 의한 것으로, 이 중 <신기록>과 <해미를 찾아서>는 허지은·이경호 공동연출작이다.)

<오늘의 자리> 스틸컷

허지은 감독은 단편 <오늘의 자리>에서부터 일관된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오늘의 자리>는 기간제 교사가 사립학교 정교사 면접을 보러 가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우연히 존경하던 국어 선생을 만난 주인공은 스승의 입에서 여성에게 불합리한 표현들이 등장할 때 심한 마음의 동요를 느낀다. 낯선 교정에선 미래를 꿈꾸던 과거 자신인 것만 같은 누군가와 마주친 듯하다. <돌아가는 길>은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서비스 노동을 하는 주인공이 고향을 찾아 가족구성원 내부에 고착된 여성 노동과 서비스직에 대한 일상적 차별을 마주하는 사정을 다룬다. <신기록>에는 경찰공무원을 지망하는 여주인공이 스스로도 은근한 스토킹을 당하는 와중에 가정폭력에 내몰린 중년 여성과 만나는 설정이 등장한다. <해미를 찾아서>는 학내 성폭력 문제에 방관자처럼 보이던 주인공이 점차 고립된 세계에서 벗어나 또 다른 해미들을 만나 한 걸음 내딛는 과정을 다룬다. 

여기에는 공통되는 특징이 있다. 사회적으로 ‘을’의 위치에 선 여성을 따라간다는 것, 일상 속에 스며든 성차적 폭력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폭력을 재현하지 않고 생략과 암시의 수사학을 활용한다는 것, 불합리한 일상에 대한 경험이 점차 타자에 대한 연대와 공감으로 확장되어 간다는 것이다.

<돌아가는 길> 스틸컷

익명의 뒷모습

허지은 감독의 영화에는 극적인 과장이나 감정적 폭발이 없다. 대개 주인공은 여성에게 불합리한 구조 속에서도 조금씩 감내하며 살아가는 내성적인 여성이다. 그런 점에서 허지은 감독의 영화에서 인상적인 것은 뒷모습이다. <돌아가는 길>은 첫 장면부터 한 여성의 뒷모습을 따라가며, <오늘의 자리>, <신기록>, <해미를 찾아서>는 영화 타이틀이 등장하는 초반부에 주인공의 뒷모습을 비추는 장면을 배치하고 있다.  

익명의 그녀들은 특별하지 않다. 대학생, 취업준비생, 기간제 교사, 서비스직 감정노동자, 가정주부인 평범한 여성들이다. 어딘가 잘못되어 있음을 알지만 선뜻 나서기는 주저된다. 적어도 저 뒷모습이 등장하는 영화 초반에는 그러하다. 누구나의 뒷모습이지만 그렇기에 나에서 우리로 확장될 수 있는 존재들. 이들은 가정에서, 노동 현장에서, 학내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다양한 성적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오늘의 자리>엔 결혼, 임신, 출산으로 인해 여성은 정교사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는 무심한 언어폭력이 등장한다. <신기록>은 은근한 스토킹을 당하는 주인공의 불안이 또 다른 불안을 느끼는 중년여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다룬다. <돌아가는 길>엔 여성 감정노동자에게 둔감한 언어폭력을 일상화한 가족구성원이 등장한다. 

재현의 권능을 불신함

앞서 말했듯 영화는 주인공의 뒷모습으로 시작한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우리는 그녀들에게 ‘다른 사연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허지은 감독의 영화는 그 다른 사연을 보여주기 위한 폭력의 스펙터클(구타, 강간, 차별의 현장) 없는 공감의 서사를 구축해간다. 가령 우리는 주인공이 다른 인물들과 나누는 파편적인 대화를 통해 혹은 주인공이 처한 부조리한 상황을 통해 그녀의 과거 사정을 추측할 수 있다. 이는 재현에 대한 감독의 윤리적 판단의 결과인 동시에 그녀의 영화가 생략과 암시를 통한 견인의 수사학을 기본 형식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물이 느끼는 고통과 불안과 슬픔은 영화가 지속되며 서서히 스며져 나온다. 

허지은 감독의 작품은 젠더적 둔감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소한(그러나 결코 사소하지 않은) 언어성폭력에서부터 심각한 물리적·심리적 성폭력까지를 아우른다. 여성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이러한 성차적 폭력에 대해 감독은 세세히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재현의 권능에 대한 불신, 그녀의 영화엔 서사적 설정을 위한 인위적 폭력 재현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대신 감독은 수사학적 방식, 즉 생략과 함축 그리고 비유를 통해 이를 은근한 방식으로 우려낸다.  

<오늘의 자리> 스틸컷

<신기록> 스틸컷

<해미를 찾아서> 스틸컷

친절한 경멸

반전과 놀람, 인위적인 악, 발견과 각성의 서사엔 관심이 없다. 허지은 감독은 욕심내지 않는다. 글에 비유하자면 그녀의 영화는 암시가 풍부한 서정적이며 내성적인 문체로 일관된다. 부드러운 일상 속에 스며든 사소한 부조리와 폭력은 예리하고 명징하게 암시된다. 

주변 인물들은 주인공에게 친절한 호감으로 대해주지만, 성차적 둔감성에 의한 발언들은 미소 띤 경멸로 주인공의 마음에 고통스럽게 박힌다. <돌아가는 길>에 등장하는 ‘아가씨’라는 표현을 보자. 표준국어대사전에 시집갈 나이의 여자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여기엔 여성의 정체성을 결혼 여부에 긴박시키는 규정적 폭력이 내재되어 있다)로 설명된 이 단어엔 아마도 다음과 같은 정의가 빠져 있을 터이다. 손아래 여성이나 서비스직 여성 노동자를 성적 대상화하거나 업신여기어 부르는 말. 

<돌아가는 길>의 서비스직 감정노동자는 ‘을’의 위치에서 ‘아가씨’라 불린다. ‘스태프 리더’라는 직위와 성명이 박힌 이름표가 있음에도 말이다. 여기서 아가씨는 멸시의 호칭이다. 아버지는 주인공인 딸을 늘 곧 시집갈 아가씨로 취급한다. 가족 내에서 시누이가 그녀에게 지칭하는 ‘아가씨’라는 칭호는 평등하지 않은 가족 내 호칭의 불편함을 상기시킨다. 

<돌아가는 길>의 가족 회식 장면에서 아버지가 자신의 딸과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여성 직원을 ‘아가씨’라 하대하며 ‘갑질’하는 장면과, 같은 식탁에서 시누이가 주인공을 ‘아가씨’라고 존대하여 부르는 장면에서 ‘아가씨’는 서로 다른 뉘앙스로 여성이 가정과 사회에서 경험하는 부조리함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신기록> 스틸컷

나가며

허지은 감독의 영화는 익명의 뒷모습을 통해 아무나이기에 누구도이기도 한 경험으로 자연스럽게 우리를 이끈다. 중심을 지향하거나 기교에 빠지지 않고 소박하나 진실된 스타일을 뚝심 있게 파고든다는 것. 허지은 감독은 지난 10여 년간 광주를 기반으로 지역 독립영화계에서 굳건히 활동해온 지역 영화인이기도 하다. 그녀는 보통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일상에 침윤된 폭력을 섬세하게 드러내왔다. 일견 내성적으로 보이던 주인공의 운명은 드라마틱하게 변화하지 않는다. 불합리한 현실 앞에 놓인 그녀는 무한한 가능성을 꿈꿨던 과거의 자신과 조응하나 슬픔에 지지 않고 담대히 미래를 향한 한 걸음을 내딛는다. 그렇기에 허지은 감독의 영화는 도달의 영화가 아니라 출발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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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ZOOMER

대구대학교 기초교육대학 교수, 인디포럼 작가회의 상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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